[뉴페@스프] ‘안전한 의석’, ‘소액 기부 급증’은 미국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까
2023년 5월 1일  |  By:   |  SBS 프리미엄  |  No Comment

* 지난해 11월부터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글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1월 16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붉은 파도’는 없었지만, 공화당은 지난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되찾아왔습니다. 전체 435석인 하원의 최소 과반은 218석입니다. 선거 전에는 민주 222석, 공화 213석으로 민주당이 아슬아슬한 다수당이었는데, 공화당이 9석을 더 얻으면서 118기 의회의 하원 의석 배분은 공화 222석, 민주 213석으로 바뀌었습니다.

공화당이 예상보다는 의석을 덜 얻었다는 건 곧 공화당 의원 한 명 한 명의 몸값이 높아졌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난 회기에 민주당이 바이든 행정부의 인프라 재건 법안 내 기후변화 대응책을 두고 조 맨신 의원 한 명에게 내내 끌려다닌 걸 생각해보면 됩니다. 지난 회기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의석을 50석씩 나눠 가졌죠. 민주당은 부통령에게 주어지는 캐스팅보트로 아슬아슬한 다수당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곧 민주당 의원 한 명만 이탈해도 법안을 통과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민주당 지도부는 울며 겨자 먹기로 조 맨신 의원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 3일 개회한 118기 의회에서는 시작부터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회기의 첫 공식 절차인 하원의장 선출부터 난항을 겪은 겁니다. 재적 하원의원 과반의 선택을 받아야 하원의장이 되는데, 하원의장 후보로 나선 케빈 매카시 의원을 도저히 못 찍겠다고 선언한 공화당 강경파 의원이 20명이나 나왔습니다. 하원의장 선출을 위해 필요한 과반에서 표는 한참 모자랐고, 결국 매카시 의원은 강경파의 요구를 사실상 다 들어주고 나서야 간신히 하원의장에 선출됩니다.

오늘은 하원의장 선출 과정에서 드러난 118기 의회의 특징과 우려되는 점에 관해 짚어보려 합니다. 특히 공화당 내 강경파 또는 극우 성향의 강성 트럼프 지지파 의원들이 이렇게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된 원인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뉴욕대학교 법학대학원의 리처드 필데스 교수가 쓴 칼럼을 번역했습니다.

 

전문번역: 미국 공화당은 어쩌다 이토록 자격 미달인 의원들에게 휘둘리게 됐나?

 

칼럼에서 두 가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하나는 “안전한 의석”이 늘어난 것의 문제점이고, 다른 하나는 소액 기부가 급증한 것이 의회의 권력 지형에 미친 영향입니다.

제리맨더링(gerrymandering)이란 용어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리(Gerry)라는 사람 이름과 도롱뇽(salamander)이라는 단어의 뒷부분에 “-ing”를 붙인 말입니다. 자기 당에 유리한 결과가 나오도록 선거구를 그리다 보니 선거구의 모습이 뱀처럼 자연스럽지 않게 왜곡되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연원은 19세기 초 미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812년, 매사추세츠 주지사였던 엘브릿지 제리(Elbridge Gerry)는 주 상원의원을 뽑는 선거구를 자기 당에 유리하게 그렸습니다. 야당이었던 연방주의당이 상원 다수당이 되지 못하게 막으려는 생각이었는데, 당시 보스턴 가제트는 제리 주지사의 결정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은 삽화를 그렸습니다.

삽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웃한 동네 주민들과 한 선거구로 묶여야 하지만,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그리다 보니 삽화 속 도롱뇽 같은 기형적인 선거구가 나온 겁니다. 보스턴 가제트는 “새로운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의 이름은 제리맨더.”라는 해설을 달았습니다. 두 세기가 지난 오늘날 제리맨더링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선거구 왜곡을 통칭하는 말이 됐습니다.

 

제리맨더링이 낳은 “안전한 의석”

미국 상원은 주마다 두 석씩 총 100석이 정해져 있으므로 선거구 획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대신 하원은 435석을 인구에 비례해 나누는데, 10년마다 하는 인구충조사 센서스(census)를 토대로 선거구를 다시 정합니다. 주별로 배분되는 의석은 공식에 따라 정해지는데, 그다음 단계, 즉 주무부 또는 선거구획정 위원회가 주 지도를 펼쳐놓고 선거구를 그리는 지점에서 제리맨더링이 일어납니다.

제리맨더링을 판별하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법원에서 불법을 입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느 당이든 할 수만 있다면 게임의 규칙을 자기한테 유리하게 바꾸려고 합니다. 다만 선을 넘어 민의를 노골적으로 왜곡하는 수준이 되면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라는 민주주의 원칙에 위배됩니다. 이때 주 정부나 주 법원이 선거구 획정안을 반려하며 선을 다시 그으라고 명령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지사나 주 의회는 물론이고, 주 법원의 판사나 대법관도 선거로 뽑는 주가 있습니다. 자기 당의 이해관계 때문에 제리맨더링을 묵인하고 선거구를 공정하지 않게 획정할 여지는 늘 있습니다.

실제로 지난해 중간선거는 앞서 2020년 인구총조사를 토대로 획정한 선거구에서 치른 첫 선거였습니다. 중간선거를 앞두고 누가 이길지 예측하기 어려운 “박빙 선거구”가 줄었다는 분석이 이미 여러 번 나왔습니다. 우리나라도 어느 지역에서는 “00당 후보는 죽은 사람이 와도 당선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죠. 그런 선거구에서는 최고의 후보를 뽑지 못하는 것뿐 아니라, 최악의 후보를 걸러내지 못한다는 측면에서도 문제가 심각합니다.

칼럼에서는 간략하게 언급된 조지아주 14번 지역구를 대표하는 머저리 테일러 그린 의원이 대표적입니다. 큐아넌을 비롯한 극우 음모론이나 1월 6일 의사당 테러를 대놓고 지지한 적이 있는 그린 의원은 여러모로 자질이 부족하지만, 지난 중간선거에서 무려 66%의 지지를 받으며 민주당 후보를 더블 스코어로 완파했습니다. 혐오 발언을 밥 먹듯이 해도 선거에서 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고, 오히려 막말할 때마다 후원금이 주체하기 어려울 만큼 모이니, 누구라도 지금의 노선을 버리지 않을 겁니다.

안전한 의석 출신 의원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건 매카시 의장만이 아닙니다. 지난 회기까지 하원의장을 지낸 낸시 펠로시도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아 코르테즈(A.O.C.) 의원을 비롯해 진보파 의원들과 치열한 기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A.O.C. 의원은 뉴욕시 퀸스와 브롱크스를 아우르는 뉴욕 14번 지역구를 대표하는데, 지난 선거 득표율은 71%로 그린 의원보다 더 높았습니다.

안전한 의석인 지역구에서는 당내 경선이 본선보다 더 치열합니다. 마치 우리나라 양궁 국가대표 선발전 같죠. 당내 경선에서 투표하는 당원들은 중도적인 성향보다는 색깔이 확실한 후보를 선호합니다. 자연히 선명성 경쟁이 벌어집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당선된 의원들은 상대방과 공통분모를 찾고 접점을 넓혀 협상하는 것보다는 상대방을 논쟁에서 꺾는 데 관심이 더 많습니다. 사안에 따라 의견이 다르면 논쟁도 벌이고 대치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당을 떠나 협력하고 양보해가며 법안을 처리해야 할 필요도 있는 법인데, 당 지도부로서는 절대 물러서지 않으려는 ‘투사형 의원’들이 여러모로 부담스럽습니다.

 

소액 기부와 직접 민주주의의 그림자

소액 기부의 증가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도 재미있습니다.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런, A.O.C. 등 진보 진영의 스타 정치인들은 자신은 거대 자본이나 대기업, 갑부로부터 후원금을 받지 않았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평범한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성원을 받들어 서민을 위한 정치를 펴겠다고 말하죠. 트럼프와 극우 정치인의 정치자금 데이터를 봐도 상당수의 열성적인 지지자로부터 받은 소액 후원금이 적잖은 비중을 차지합니다.

사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후원금을 내기 때문에 소액 기부자들을 평범한 시민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논문을 두 편 소개합니다. 하나는 브리검영 대학교의 마이클 바버 교수가 2016년에 쓴 논문입니다.

미국은 개인이나 정치행동위원회(PAC, Political Action Committee)를 통해 낼 수 있는 정치 후원금의 상한선이 주마다 다릅니다. 이를 토대로 주마다 선출되는 정치인의 성향을 살펴봤더니, 개인이 후원금을 많이 내는 주에서는 이념이 뚜렷한 극단적인 성향의 정치인이 많이 선출됐고, 반대로 기업이나 정치행동위원회가 더 많은 후원금을 낼 수 있는 주에서는 중도 성향의 후보가 더 많이 당선됐습니다. 바버 교수는 개인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많이 받는 후보들이 더 많이 당선되는 것과 미국 정치에서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상 사이에 관계가 있다고 결론짓습니다.

또 다른 논문은 로랑 부통, 줄리아 까제, 에드가르 드위트, 뱅상 퐁 교수가 함께 쓴 논문입니다. 저자들은 소액 기부자들의 특징을 직접 살펴봤습니다. 2005~2020년 사이에 한 번의 선거 주기인 2년 동안 정치 후원금을 200달러 이하로 내는 소액 기부자들이 급증했습니다. 많은 돈을 기부하는 이들과 비교했을 때 소액 기부자 중에는 여성과 소수 인종이 많았습니다. 또한, 소액 기부자들은  같거나 비슷한 인종, 이념이 뚜렷한 정치인, 같은 주나 같은 지역 출신 정치인에게 더 많이 기부했습니다.

소액 기부가 오히려 의회에서 초당적인 협력을 가로막는다는 점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통념과 다릅니다. 일부 정치인은 소액 기부의 증가를 직접 민주주의의 훌륭한 사례로 포장해 왔지만, 어쩌면 소액 기부자가 늘어난 것은 포퓰리즘의 단적인 예로, 정치 기능이 오히려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방증일지도 모릅니다.

매카시 신임 하원의장은 강경파 의원들의 표를 얻기 위해 많은 것을 양보했습니다. 의원 한 명 한 명이 지난 회기 조 맨신 의원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상의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실제로 이들이 사사건건 하원의장을 겁박해 쟁취한 권리를 내세운다면, 자칫 118기 의회는 아무것도 협의하지 못하는 실패한 의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