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제리맨더링과 미국 민주주의
2022년 5월 24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올해 11월 미국 중간선거의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는 제리맨더링(gerrymandering)이 될 겁니다. 제리맨더링의 기원과 영향력에 관해 지난 2월 7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쓴 글입니다.

제리맨더링의 기원을 찾아보면, 오래된 옛 신문에 등장한 아래 지도/삽화가 나옵니다.

정치학 교과서에도 나오는 이 삽화는 1812년 보스턴 가제트에 실린 그림입니다.

제리맨더링이 무엇인지, 왜 지금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민주당과 공화당이 제리맨더링 문제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지, 선거와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관해 정리했습니다. 뉴욕타임스가 지난해 11월 정리한 인터랙티브 기사를 뼈대로 삼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업샷에 “제리맨더링, 직접 해보실래요?”란 제목으로 흥미로운 게임을 올렸습니다. 글로 읽으면 도무지 개념이 와닿지 않지만, 직접 해보면 금방 이해하는 경우가 있죠. 독자분들 중에도 민주주의에는 해롭지만, 내가 지지하는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짜 보고 싶으신 분은 위 링크를 눌러 직접 제리맨더링에 도전해보셔도 좋겠네요.

저도 한 번 해봤는데, 그저 그런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두 정당이 선거구 재획정에 필요한 전략통으로 저를 스카우트할 가능성은 원래도 거의 없었지만, 이로써 0이 됐다고 봐야겠네요. (성적표는 크게 내세울 만한 게 못 되니, 글 뒤에 조그맣게 공개하겠습니다.)

 

먼저 제리맨더링이 무엇인지부터 간략히 알아보죠.

제리(Gerry)라는 사람 이름과 도롱뇽(salamander)이라는 단어의 뒷부분에 “-ing”를 붙인 말입니다.

1812년, 매사추세츠 주지사였던 엘브릿지 제리(Elbridge Gerry)는 주 상원의원을 뽑는 선거구를 자기 당에 유리하게 그렸습니다. 야당이었던 연방주의당이 상원 다수당이 되지 못하게 막으려는 생각이었는데, 당시 보스턴 가제트는 제리 주지사의 결정을 비판하며, 위의 삽화를 그렸습니다.

당시 종이 신문에 실린 삽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웃한 동네 주민들과 한 선거구로 묶여야 하지만, 특정 정당에게 유리하게 선거구를 그리다 보니 삽화 속 도롱뇽 같은 기형적인 선거구가 나온 겁니다. 보스턴 가제트는 “새로운 괴물이 나타났다. 괴물의 이름은 제리맨더.”라는 해설을 달았습니다. 두 세기가 지난 오늘날 제리맨더링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선거구를 왜곡하는 일을 통칭하는 말이 됐습니다.

제리맨더링이란 단어가 지금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제리맨더링 문제를 놓고 법정 공방이 잦다 보니, 관련 기사가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럼 법정 공방은 왜 요즘 들어 잦아진 걸까요? 지금이 주 별로 선거구를 다시 그려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2020년 인구 총조사 센서스(Census) 결과를 토대로 연방 하원과 주 의회 선거구를 다시 그리고 주 선관위의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연방 상원은 주 전체의 표를 합산하므로 선거구 재획정이나 제리맨더링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습니다. 대통령 선거도 승자독식 방식으로 선거인단을 주 별로 한 후보에게 몰아주기 때문에 제리맨더링과 큰 상관이 없습니다.

(2020년 센서스 결과에 관해선 아메리카노 팟캐스트에서 자세히 다뤘습니다. 센서스 결과에 따라 435석의 연방 하원 의석은 조금 복잡한 공식에 따라 배분하는데, 이에 관해서도 팟캐스트의 설명을 들으시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2020년 센서스 결과 텍사스, 플로리다처럼 인구가 늘어나서 하원 의석이 늘어난 주도 있고, 뉴욕, 미시간처럼 인구가 줄어들어 하원 의석이 줄어든 주도 있습니다. 주들은 저마다 선거구를 다시 그려야 합니다. 의석 수가 그대로 유지된 주도 주 안에서 인구 이동, 유권자 지형 변화를 고려해 10년 전에 정한 선거구를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결국, 모든 주가 선거구를 새로 그릴 수 있죠.

전국적으로 비례대표제를 시행하거나 중대선거구제를 운영하지 않고, 우리나라 국회나 미국 하원, 영국 하원 선거처럼 소선거구제를 따르면 선거구에 따른 인구 편차에 기준을 둬야 합니다. 연방제가 아닌 단일 국가인 우리나라의 경우 국회의원 선거구의 인구 편차가 2:1을 넘으면 안 된다는 2014년 헌법재판소 판결이 적용되고 있습니다. 기존에는 해당 기준이 3:1이었는데, 그 경우 인구가 많은 선거구 유권자의 표값은 인구가 적은 선거구 유권자 표값의 1/3에 그칠 수 있는 셈이죠. 이에 헌법소원이 있었고, 헌재는 평등권이 침해됐다는 원고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연방제 국가인 미국은 선거구 인구 편차를 고려해 선거구를 획정하는 일이 연방 정부가 아닌 주 정부와 주 의회의 일입니다. (물론 주별로 하원 의석 몇 석을 배분하는지는 연방 선거법에 따라 정해집니다.) 여기서 또 50개 주마다 각기 다른 역사, 정치 지형에 따라 서로 다른 상황이 발생합니다.

50개 주에서 선거구를 그리는 권한과 책임이 누구한테 있는지 큰 기준을 세워 나눠 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50개 주 가운데 11개 주는 (두 정당으로부터) 독립적인 선거구 재획정 위원회가 선거구를 그리도록 주 법으로 정해뒀습니다. 여기서는 제리맨더링이 발생할 가능성이 작죠. 남은 39개 주 가운데 인구가 아주 적어서 주 전체에서 하원의원을 한 명만 뽑는 주가 6개 있습니다. 알래스카나 와이오밍 같은 주는 유권자가 너무 적어서 주의 경계가 곧 선거구인 셈이죠.

이제 33개 주가 남네요. 남은 33개 주에선 의회가 직접 선거구를 다시 정하고, 주지사가 승인하면 선거구가 확정됩니다.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는 것 같지만, 역사와 전통이 그렇습니다. 주지사와 주 법무부가 우리나라로 치면 선관위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의회의 다수당과 주지사가 속한 당이 같을 경우 제리맨더링이 일어날 소지가 크다고 볼 수 있겠죠.

현재 공화당이 주의 입법, 행정부를 장악한 곳이 20개 주, 민주당이 양쪽 모두 장악한 곳이 10개 주입니다. 공화당은 435석 가운데 187석의 선거구를 마음대로 그릴 수 있고, 민주당도 그보다 적긴 해도 75석의 의석을 정하는 선거구를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그릴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제리맨더링의 역사는 미국 의회 정치의 역사만큼 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788년 버지니아의 패트릭 헨리 주지사는 정적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의 하원 당선을 막기 위해 선거구를 왜곡했습니다. 매디슨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도 승리했지만 말이죠. 2018년 위스콘신 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의 스캇 워커 주지사는 민주당 토니 에버스 후보에게 30만 표, 득표율 1% 차이로 석패했습니다. 그런데 주 의회 의석 분포를 보면 전혀 딴판입니다. 공화당이 99석 가운데 63석을 차지하고 있죠. 제리맨더링을 의심할 여지가 충분합니다.

제리맨더링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이에 관해선 앞서 언급했던 뉴욕타임스 업샷의 게임을 직접 해보시는 편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게임 이야기를 하기 전에 중요한 규정 하나만 같이 짚어보고 가죠.

1965년 제정된 투표권법은 지나치게 노골적인 제리맨더링을 막아주는 유의미한 견제 장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업샷 게임에서도 최소한 선거구 두 곳은 소수 인종이 다수가 되는 선거구여야 한다는 제약이 있는데, 투표권법을 게임에 반영한 겁니다.) 투표권법은 유색인종 유권자들을 여러 선거구에 나눠서 희석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1960년대까지만 해도 노골적인 인종차별이 심했던 주로 남부 주들에선 흑인 유권자들을 여러 선거구에 퍼지도록 희석했는데, 흑인들의 표는 모든 지역구에서 소수 의견에 그쳐 투표 결과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투표권법은 전체 인구에서 인종이 차지하는 비중에 따라 최소한 몇 개의 선거구는 소수 인종이 다수를 차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정했습니다. 전체 유권자 100명 가운데 흑인이 20명인데 한 선거구에 20명이 배분돼 총 5개 선거구가 있다면, 5개 가운데 20%에 해당하는 적어도 한 선거구는 흑인 유권자가 다수를 차지해야 한다는 규정입니다.

제 게임 결과입니다. 직접 게임을 해보시면, 얼마나 당파적으로 선거구를 그렸는지 뉴욕타임스 다른 독자들과 비교한 상대평가 점수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게임의 원리는 간단합니다. 내가 속한 또는 지지하는 정당이 전체 지지율에서 열세지만, 선거구를 잘 그리면 더 많은 의석을 차지하고 여당이 될 수 있습니다. 주 의회를 장악하면 10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구 재획정 시즌마다 우리 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고착화시킬 수 있죠. 실제로 미국 선거구가 바뀐 역사를 살펴보면, 20세기 후반부터 공화당은 성공적으로 이 전략을 써왔습니다.

우리 당을 찍은 유권자의 사표는 최대한 줄이고, 상대 당을 찍은 유권자의 표는 최대한 사표로 만드는 게 핵심입니다. 업샷 게임에선 15명이 한 선거구가 되니까, 우리 당은 가능한 한 8:7 또는 9:6으로 이기고, 상대 당은 최대한 15:0, 14:1로 이기도록 선거구를 짜면 됩니다. 현실에선 숫자가 15보다 훨씬 크겠지만, 득표율 51:49로 이기는 곳을 많이 만들고, 지는 선거구는 화끈하게 10:90으로 지게 만들 수만 있다면 우리 당이 전체 득표의 열세를 극복하고 의회를 장악할 수 있을 겁니다.

텍사스주는 지난 10년 사이 인구가 빠르게 늘어 유일하게 하원의원 두 석이 더 늘어났는데, 텍사스주 의회 여당인 공화당은 정확히 이런 전략을 썼습니다. 민주당 지지자가 몰려 있는 대도시에 지역구를 하나 더 만들면서 신설 지역구는 보나 마나 민주당이 이기는 지역구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서 민주당을 찍은 수많은 표들은 사표가 되고, 텍사스 다른 지역구에서 공화당 후보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겁니다. 비슷한 일이 테네시주 내쉬빌을 비롯한 수많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제리맨더링을 기획하는 건 주로 공화당, 당하는 쪽은 민주당인데 소송을 해도 시간만 오래 걸리고, 제리맨더링을 입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법원에서 불법을 입증하긴 어렵지만, 제리맨더링은 ‘법이 허용하는 선에서’ 줄기차게 시도됐습니다. 그 결과 미국 전체 지도를 놓고 봤을 때 이른바 격전지라 부를 만한 선거구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습니다. 2020년 센서스 결과를 토대로 민주, 공화 양당이 새로 획정한 선거구 가운데 격전지로 분류할 만한 선거구는 40개가 채 되지 않습니다. 10년 전엔 ‘누가 이길지 모르는’ 선거구의 숫자가 73개였습니다.

실제 선거운동이 펼쳐지면 여러 변수가 발생해 승자가 뻔할 것으로 예상되던 곳이 격전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거 자체에 경쟁이 줄어들면 가뜩이나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한 시대에 양쪽 정당 지지자들의 심리적 거리는 서로 더욱 멀어질 수 있습니다. 정치적 교착 상태가 심각해지고, 이는 정치 혐오와 냉소주의를 부추겨 정치 참여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한 정당의 승리가 따 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는 곳에서는 당내 경선 과정에서 훨씬 더 극단적인 도전자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특히 공화당 내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여전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를 당내 경선에서 떨어트릴 수 있는, 사실상의 ‘공천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죠. 자신이 재선되면 지난해 1월 의사당을 무단 점거한 폭도들의 죄를 사면하겠다는 말을 하고 다니는 트럼프가 밀어주는 후보들은 아마도 전통적인 공화당 정치인보다 훨씬 극단적인 주장을 서슴지 않고 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민주주의에 이롭다고 보기는 아무래도 어렵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