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법치’와 ‘민주주의’ 기로에 선 미국?
2024년 2월 20일  |  By:   |  SBS 프리미엄  |  No Comment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12월 27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 판결에 관해선 아메리카노에서도 다뤘습니다.


미국에는 ‘공식 선거운동 기간’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한 차례 선거가 끝나면 곧바로 다음 선거가 시작됩니다. 호들갑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대선이 끝난 직후에는 4년 뒤 후보가 될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 짚어보는 기사들이 앞다투어 실리곤 합니다.

2020년 미국 대선은 현직 대통령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으면서 수많은 ‘초유의 사태’로 얼룩진 선거가 됐습니다. 갖은 우여곡절 때문에 4년 뒤 어떤 매치업이 성사될지도 큰 관심을 모았는데, 바이든과 트럼프가 다시 맞붙을 거란 전망이 늘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첫손에 꼽혀 왔습니다. 수많은 사건과 변수가 등장했음에도 이 전망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바이든 대 트럼프 리턴 매치 대세론”에 균열을 일으킬 만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이 미국을 향한 반란에 가담한 트럼프에게 대통령 출마 자격이 없다고 판결한 겁니다. 이 판결이 뒤집히지 않으면 당장 3월 5일 “슈퍼 화요일”에 열리는 콜로라도 공화당 경선에서 트럼프는 투표용지에 이름을 올릴 수 없습니다. 우선 이 판결의 의미를 자세히 짚은 칼럼을 번역했습니다.

전문 번역: 미국 정치 제도에 경종을 울린 콜로라도 대법원의 판결

 

연방제 국가 미국에서 주 대법원의 판결은 주 안에서만 효력이 있습니다. 물론 연방 대법원이 주 대법원의 판결을 다시 뒤집을 수 있고, 트럼프 측은 곧바로 연방 대법원에 이 사건을 상고했습니다. 오늘은 수정헌법 14조 3항이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살펴보고, 이번 판결을 둘러싼 쟁점, 그리고 판결이 대선 가도에 미칠 영향을 짚어보겠습니다.

 

수정헌법 14조 3항을 이해하는 열쇳말: 남북전쟁

원래 미국 대통령 출마 요건은 매우 간단합니다.

  1. 35세 이상이어야 한다.
  2. 태어날 때부터 미국 시민이어야 한다. (natural born citizen)
  3. 지난 14년간 미국에서 거주했어야 한다.

이 세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대통령 출마 요건은 갖춥니다. 미국에서 보통 출마 자격을 제한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정말로 쪼개질 뻔했던 내전(civil war)을 겪은 뒤엔 미국도 예외적으로 반란에 가담한 자의 후보 자격을 박탈한다는 조항을 무려 수정헌법에 넣어둔 겁니다. 먼저 이번 판결의 핵심이 된 수정헌법 14조 3항 전체를 번역했습니다.

미합중국 헌법에 반하는 전복 행위 또는 반란에 가담한 자, 미합중국과 그 헌법의 적을 돕거나 적에게 원조를 제공한 자는 미합중국 헌법 앞에 선서해야 맡을 수 있는 미합중국 상원의원, 하원의원, 대통령과 부통령의 선거인단이 되거나 미합중국 또는 각 주에서 민사 또는 군사상 어떤 공직도 맡을 수 없다. 그러나 의회는 각 하원 2/3 이상의 투표로 제약을 무효로 할 수 있다.

“전복 행위”나 “반란”과 같은 단어가 뜻하는 바를 이해하려면 수정헌법 14조가 제정, 비준된 시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수정헌법 14조는 1868년 7월9일 비준됐습니다. 바로 남북전쟁이 끝난 직후였죠. 북부 주들이 중심이 된 연방(the Union)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 남부 주들이 꾸린 남부 연합(the Confederate)의 정치적 영향력을 봉쇄하려 했습니다. 이들이 정치권에 진출해 전쟁의 결과를 뒤바꾸는 걸 용납할 수 없었죠. 그런 행위는 곧 미국과 헌법을 향한 반란(insurrection)이었습니다. 그래서 의회는 수정헌법 14조를 제정했습니다. 즉 3항에서 말하는 반란이란 남부군이나 남부 연합 출신으로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거나 미국 연방을 적으로 간주하는 행위였습니다.

수정헌법 14조가 제정된 뒤 가장 많이 인용된 부분은 “적법 절차 조항”이나 “평등 보호 조항”이 담긴 1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북전쟁 이후 오랫동안 실제로 적용되거나 논의되는 일이 매우 드물던 3항이 주목받게 됐습니다.

 

적법한 판결인가? 판결 둘러싼 쟁점들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지난 대선 직후 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의회가 투표 결과를 최종 비준하는 날이자 대통령 취임 2주 전인 1월 6일 트럼프 지지자들이 일으킨 의사당 테러를 수정헌법 14조 3항에 언급된 “반란”에 해당한다고 판결했습니다. 또 지지자들을 부추겨 공격을 사실상 지시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반란에 가담한 자”이므로 공직을 맡을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트럼프가 수정헌법 14조에 따라 맡을 수 없는 공직에는 대통령도 포함됩니다.

판결 직후 예상대로 다양한 주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습니다. 우선 남북전쟁 때 남부군과 남부연합이 연방을 상대로 한 행위와 지난 1월 6일 의사당 테러를 같은 반란 행위로 볼 수 있느냐, 150년도 더 전에 제정된 수정헌법을 인용해 2024년 주요 대통령 후보의 출마를 가로막을 권한이 과연 사법부에 있느냐에 관해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또 1월 6일 의사당 테러가 반란 행위였는지, 법을 어겼다면 누가 얼마나 어겼으므로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지에 관해 법원은 아직 아무런 판결을 한 게 없는데, 트럼프를 “반란에 가담했다”고 단정한 콜로라도주 대법원의 판결이 과연 적법한 절차를 지켰는지도 쟁점입니다.

재밌는 건 수정헌법 14조 3항을 트럼프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제기한 것이 흔히 생각하는 진보 진영이 아니라 헌법을 원문 그대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보수적인 법학자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시카고대학교의 윌리엄 보드와 세인트토머스대학교의 마이클 스톡스 폴센은 1월 6일 의사당 테러 전후 트럼프의 행동은 수정헌법 14조 3항에 적시한 반란 행위에 들어맞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들은 트럼프가 마이크 펜스 부통령을 협박해 선거 결과를 비준하지 못하게 하려 했고, 지지자들을 부추겨 의회에 실력을 행사하자고 말하는 등 헌법이 보장한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적극적으로 가로막은 행위는 남북전쟁 이후 연방을 전복하려던 남부군 출신의 반란 행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진영 논리에 따라 법을 해석하는 건 물론 경계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콜로라도주 대법원판결을 끌어낸 소송을 제기한 진보 단체들이 수정헌법 14조를 적용하는 아이디어를 보수적인 법학자들에게서 얻었다는 점은 이례적인 일로 보입니다.

콜로라도주 1심 재판부는 트럼프가 1월 6일 테러에 역할을 하는 등 반란에 가담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수정헌법 14조 3항이 대통령직에는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트럼프가 반란에 가담했더라도 대통령으로서 헌법을 지키겠다고 선서한 것을 어긴 건 아니라는 판결이었습니다. 법적으로 이견이 있을 수 있는 판결이었고, 실제로 콜로라도주 대법원이 이를 뒤집었습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볼 쟁점은 적법 절차에 관한 문제입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은 트럼프가 반란 행위에 가담했다는 전제로 트럼프의 출마 자격을 박탈했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트럼프가 반란을 일으켰다는 판결을 근거로 들 수는 없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아직 그에 관한 법원의 판결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수많은 혐의로 형사 기소를 당했고, 민사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다. 1월 6일 의사당 테러에 책임이 있다며 기소된 사건만 하더라도 공판 일정이 잡히려 하자, 트럼프 측에서 예상대로 면책 특권을 주장하고 재판 일정을 늦춰달라고 요청하는 등 시간 끌기에 들어간 상태입니다. 누군가에게는 명확한 사건으로 보일지 몰라도 법치 국가에서 법원 판결이 아닌 임의의 판단을 확정적인 근거로 쓸 수는 없는 일입니다. 즉, 트럼프가 반란에 가담한 사실을 법원이 확정하지 않는 한, 이를 근거로 트럼프의 피선거권을 박탈하는 건 적법 절차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이는 법리적 공방을 차치하더라도 정치적으로는 분명 트럼프에게 유리하게, 반대로 민주당이나 잭 스미스 특검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법치’와 ‘민주주의’ 기로에 선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을 둘러싼 수많은 법정 공방에 관해 뉴스가 나올 때마다 꼭 언급되는 질문이 있다면 “그래서 이번 일이 대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데?”일 겁니다. 트럼프는 소위 “사법 리스크”에도 불구하고 가장 유력한 공화당 후보는 물론이고, 본선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차기 대통령 1순위” 자리를 유지해 왔습니다. 그 말은 곧 트럼프를 둘러싼 잡음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번에는 다를까요? 예단하기 쉽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그래도 트럼프의 독주에 별 영향을 못 미칠 사건으로 쉬이 사라질 것 같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콜로라도주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연방 대법원이 어떤 판결을 하느냐가 중요한데, 여기서 대법원과 미국 정치는 ‘법치’와 ‘민주주의’라는 얼핏 보기엔 서로 보완적인 두 가치 사이의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합니다.

이번 사건의 쟁점을 헤아려보면 이해가 갈 겁니다. 먼저 제시 웨그만이 오늘 칼럼에서 내세운 주장이 ‘법치’를 대변합니다. 즉, 트럼프가 법 위에 군림하는 전제 군주가 아닌 이상 헌법을 어긴 시민에게 특혜를 베푸는 일은 있을 수 없으며, 특히 헌법을 위협하는 자에게 헌법이 보장한 권리를 똑같이 주는 건 옳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못 하도록 제약하는 것이 법치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법원의 책무라는 겁니다.

공화당 경선에 참여하고 있는 트럼프를 제외한 후보들은 ‘민주주의’ 측면을 부각했습니다. 아무리 트럼프에게 후보로서 결격 사유가 있더라도 그건 유권자가 판단할 일이라는 겁니다. 유권자가 판단하기도 전에 사법부가 개입해 선거 출마 자체를 결정하는 건 민주주의 원칙에 비춰볼 때 문제가 있습니다. 대법원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대법원이 서둘러 판결한다면 누구 손을 들어주느냐와 상관없이 이른바 ‘사법 과잉’ 논란이 불거질 수 있습니다. 연방 대법원에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서둘러 개입하기보다 천천히 기다리는 불문율이 있기도 합니다.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트럼프가 죗값을 치른다며 쾌재를 부를지도 모르지만, 이번 판결이 트럼프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가능성은 크지 않아 보입니다. 당장 콜로라도주 공화당 내에서 이번 경선을 프라이머리 대신 코커스 방식으로 치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뉴스가 나왔습니다. 프라이머리는 우리가 흔히 아는 투표 방식이고, 코커스는 지역별로, 선거구, 마을별로 당원들이 모여 지지 후보를 토론과 설득을 통해 정하는 방식입니다. 투표용지가 필요하지 않으므로, 대법원판결을 우회할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급격히 경선 방식을 바꿀 수 있을지 모르지만, 법원이 개입하는 데는 한계가 뚜렷해 보입니다. 어느덧 첫 경선이 아이오와 코커스는 약 20일 앞으로 다가오기도 했고요.

현재 미시건을 비롯해 몇몇 주 대법원이 콜로라도주 대법원이 판결한 사안과 비슷한 사안을 심리하고 있습니다. 곧 판결이 잇따라 나올 텐데, 만약 콜로라도주 대법원판결과 같은 판결이 여러 건 나온다면 공화당 경선 레이스에 의미 있는 변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트럼프에 도전장을 내민 후보들에겐 희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도 역풍이 불어 “나를 향한 공격은 모두 정치 공작”이라는 트럼프의 주장이 오히려 더 큰 지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누군가에게는 트럼프가 “명백한 반란의 수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이 모든 법정 공방이 부정선거를 감추려는 또 다른 수작”으로 비춰지는 양극화된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