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기회의 평등’에 기반했던 아메리칸 드림에 빨간 불이 켜진 까닭은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12월 13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아메리칸 드림” 하면 뭐가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기회의 땅 미국을 상징하는 이 말의 정의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옥스퍼드 사전이 정의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는 독특한 정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전의 정의를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메리칸 드림: 미국인이라면 누구든 가장 높은 열망과 결단력을 품고 열심히 노력해서 목표한 바를 이루고 번영을 누릴 수 있도록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이상적인 상황.
좀 더 쉽게 풀어써보면,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원하는 바를 이루고 살 수 있도록 기회가 주어지는 땅” 정도가 될 겁니다. 여러 부분 가운데 특히 ‘기회의 평등’ 부분이 가장 눈에 띕니다.
기회의 평등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보장하느냐를 두고는 의견이 갈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한 전제 조건에서 ‘기회의 평등’ 중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교육받을 기회라는 데 동의할 겁니다. 좋은 교육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자라 더 부유하고 풍족한 계층에 진입하는 데 결정적인, 이른바 “계층 이동의 사다리” 역할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교육받을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는 건 아메리칸 드림을 유지하는 데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사전의 정의는 “미국인이라면”이란 전제를 달았지만, 사실 꼭 미국인이 아니라 외국인, 이방인에게도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습니다. 특히 이민자의 자녀로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어려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 1.5세대가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는 교육의 역할이 아주 중요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필진 제시카 그로즈가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기 위한 미국 부모들의 과열 경쟁에 관한 칼럼을 썼습니다. 칼럼은 과도한 교육열과 이기주의가 초래한 문제를 다방면에서 짚고 있습니다.
전문 번역: 왜 부모들은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기 위한 ‘군비 경쟁’을 멈추지 못할까
그로즈의 지적에서 한발 더 나아가 교육의 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지지 않는 미국은 곧 아메리칸 드림이 무너진 미국이 되는 것 아닐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지금의 미국을 있게 한 중요한 원동력을 잃고 근본적인 위기에 봉착할 수도 있습니다.
바시티 블루 스캔들
칼럼에 소개된 배우 펠리시티 허프먼이 연루된 바시티 블루 대입 스캔들에 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미국판 스카이 캐슬”로 불렸던 이 스캔들은 미국의 부유한 기득권층이 자기 자녀에게 남들보다 앞서서 출발할 수 있는 특혜를 주려고 법까지 어긴 충격적인 사건으로, 아메리칸 드림이 위태롭다는 결정적인 징후로 볼 수 있습니다.
농구 코치 출신인 입시 컨설턴트 릭 싱어가 부유한 부모들에게 돈을 받고 자녀의 스펙을 위조해 줬는데, 자녀들을 체육 특기생(Athletes)으로 둔갑시켜 학교에 입학시키는 방법을 주로 썼습니다. 부유층 자제들은 한 번도 해본 적도 없는 종목의 체육 특기생이 되어 명문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체육 특기생이 주축이 된 대학교 운동부를 바시티(varsity)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이 스캔들의 이름도 바시티 블루가 된 겁니다.
미국 대학의 기여입학제(legacy admission)에 관해서는 지난여름에도 스프에 글을 썼죠. 체육 특기생 제도는 여러 논란 속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고, “미국의 ‘쓰앵님’” 릭 싱어는 이를 악용했습니다. 싱어는 운동을 전혀 못 하는 학생을 체육 특기생으로 둔갑시키는 것 외에도 부정한 방법으로 시험 점수를 올리거나 입학사정관을 매수하는 등 법과 규칙을 깡그리 무시하고 모든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허프먼도 “딸의 SAT 점수를 조작하려고 1만 5천 달러의 뇌물을 건넸다”고 인정했는데, 이런 비리가 조직적으로 일어난 겁니다.
미국을 흔히 실력주의(meritocracy)가 통하는 나라라고 부르는 것도 기회의 평등이 보장된 나라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실력에 따라 공정하게 경쟁해서 뛰어난 사람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받으려면, 우선 기회가 공평하게 주어져야 할 테니까요. 그런데 바시티 블루 스캔들은 돈으로 다른 이에게 갔어야 할 기회를 빼앗은 일로, 미국의 실력주의가 허상이라는 걸 보여준 사건입니다.
평등이라는 주제에 훨씬 더 민감한 한국이었다면, 사건의 파문이 훨씬 더 크고 오래갔을 것 같은데, 미국은 잠깐 떠들썩했다가 이내 잠잠해졌습니다. 배우 허프먼을 비롯해 죄를 지은 사람들도 상대적으로 가벼운 처벌만 받고 끝났습니다. 부유층과 기득권에 관대한 사법 체계의 맹점이 드러난 셈이죠. 물론 미국의 기득권이 이를 맹점이나 문제라고 여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여름 소수자 우대 정책을 둘러싼 대법원판결이 나왔을 때도 유색인종 단체들 사이에서 이번 기회에 기여입학제의 다양한 부조리를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구체적인 논의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대학 프리미엄이 사라진 미국
평생 다 쓰지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번 TV 스타 부부가 도대체 왜 법을 어기면서까지 자녀에게 명문대 타이틀을 달아주려고 애를 쓴 걸까요? 허프먼은 “딸에게 미래를 주고 싶었고, (명문대 간판 하나 못 달아주는) 나쁜 엄마가 되기 싫었다”고 말했고, 그로즈는 이를 두고 충격이라고 썼습니다. 그로즈는 이어 이름 있는 대학교 졸업장이 생각만큼 안락한 미래를 보장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졸업생들의 평균 연봉 자료를 근거로 든 그로즈의 지적은 타당해 보입니다. 다만 대졸자들의 연봉만 주목하다 보면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그 점을 함께 생각해 보려 합니다.
“대학 프리미엄(college premium)”이란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대학교 학위가 가져다주는 프리미엄이란 뜻이죠. 대학 졸업장이 있어야 연봉 높은 일자리를 구할 가능성이 커지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이 보장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국 세인트루이스 연준의 경제학자들이 지난 2019년 색다른 연구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대학 프리미엄이란 개념을 좀 더 세분화해서 살펴보자는 겁니다.
기존의 “대학 프리미엄”은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평생 버는 소득만 주목했습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분류하면 “대학 소득 프리미엄(college income premium)”이라고 부르는 게 정확합니다. 이어 이들은 “대학 재산 프리미엄(college wealth premium)”이란 개념을 소개합니다. 소득만 보지 말고, 소득 프리미엄에 대학 교육을 받는 데 드는 비용을 합산해 보는 겁니다.
1940~1960년대생의 경우 “대학 소득 프리미엄”과 “대학 재산 프리미엄”이 거의 일치합니다. 대학 졸업장이 있는 사람들이 고등학교까지만 나온 사람들보다 돈도 더 잘 벌고, 더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두 프리미엄 사이의 차이가 점점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1980년대생부터는 이 차이가 매우 벌어져서 대학 소득 프리미엄은 여전히 높지만, 대학 재산 프리미엄을 계산해 보면 0에 가까운 수준까지 떨어집니다.
대학 졸업장이 있으면, 고소득 직장에 취업해 돈을 잘 벌 가능성은 여전히 큽니다. 그러나 돈을 잘 벌어도 부유해질 가능성, 즉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확률은 확연히 낮아졌습니다. 당장 학비가 너무 비싸서 학자금 빚을 수십 년 동안 갚는 사람이 수두룩한 현실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겁니다. 결국, 대학교에 가든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바로 취업하든 미래의 기대 재산은 비슷해졌습니다. 대학 교육을 받기 위해 포기해야 했던 투자의 기회비용까지 따진다면, 대학교에 안 가는 게 더 낫다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차상위 계층이나 중산층에 대학 교육이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는 존재가 되면, 상대적으로 형편이 넉넉한 집 자제들만 대학 교육을 받게 될 겁니다. 대학 소득 프리미엄은 여전히 견고한 사회에서 이들은 프리미엄에 ‘부모 찬스’를 더해 안락한 삶을 보장받습니다. 기회가 공평하게 돌아가지 않는, 실력주의가 무너진 사회의 모습이 이럴 텐데, 지금 미국 사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꼭 이렇습니다. “용이 나는 개천”은 이미 말라서 잇따라 자취를 감췄고, 바시티 블루 스캔들에서 보듯 사회의 기득권은 원래 개천에서 난 용을 위해 마련된 자리를 빼앗아 거기에 자기 자식들을 앉히고 있죠.
정책이 잘못됐어도 시장에 다 맡기는 건 신중해야
스캔들만 자꾸 파다 보면, 근본적인 제도 차원의 부조리를 보지 못하고 겉으로 부각되는 개인의 일탈에만 화살을 돌리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주의 시장 논리에 종속된 미국의 대학 교육 시스템에 있습니다.
미국 대학은 모든 면에서 규모가 어마어마하게 큽니다. 주요 명문대를 보면, 동문이나 기업에서 받는 기부금, 후원금을 바탕으로 학교 차원에서 운용하는 기금의 규모만 수십억 달러에 이릅니다. 연구비도 풍부하고, 학교의 여러 시설도 훌륭하며, 등록금과 학비도 자연히 비쌉니다. 물론 기금이 넉넉한 학교들은 성적 장학금보다 가정 형편에 따라 학비를 면제해 주는 등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를 마련해 뒀습니다.
문제는 더 많은 학생이 가게 되는 대부분 보통 대학입니다. 장학금 제도를 비롯해 교육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할 장치가 부족한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부모가 학비를 대줄 수 없으면 학자금 대출을 받을 수밖에 없고, 오랫동안 (대학 소득 프리미엄은 누릴지 몰라도) 대학 재산 프리미엄을 누리지 못하는 굴레에 빠질 가능성이 큽니다.
열심히 일해도 꿈을 이룰 기회를 좀처럼 얻지 못하게 되므로, 결국 꿈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선배들의 경험에 비추어 점차 꿈을 꾸는 것마저 허락되지 않는 사회로 가는 길이 열리고 있는 겁니다. 아메리칸 드림 자체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시장 논리에 종속된 교육 제도와 정책을 무조건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대학들이 상당수 미국에 모여 있는 것도 결국, 끊임없는 경쟁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교육의 모든 부문에서 시장에서 말하는 ‘효율’만 추구하는 게 과연 최선인지는 치열하게 토론해 볼 만한 문제입니다. 더 좋은 교육 정책과 제도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면, 이를 시장에 맡기는 게 좋을지, 아니면 정부나 공공 부문이 나서서 정책을 규제하거나 유도하는 게 좋을지 신중히 따져봐야 합니다.
미국의 대학들이 뛰어나다고 미국 대학 교육 시스템을 그대로 수입하는 건 우리 실정에 맞지 않습니다. 원하는 결과를 내지 못할 가능성이 크죠. 그보다는 미국 대학이 아메리칸 드림을 보장하는 지름길이던 시절, 소위 대학 프리미엄이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던 시절에 제도가 효과를 거둔 원인을 분석해 우리 실정에 맞는 교훈을 뽑아내는 편이 더 나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