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는 아랍 국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아랍의 봄’ 이후 민주주의가 그나마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는 나라는 아랍 22개국 중 튀니지 한 곳 뿐입니다. ‘아랍의 봄’이 없었다면 차라리 더 나았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랬다면 리비아, 예멘, 바레인, 시리아, 이집트에서 성난 사람들이 민주주의라는 이름 하에 난동을 일으키는 사태도 없었을 것이고 호스니 무바라크 같은 친서방적 인물이 물러나는 일도 없었을 거라면서요. 이들은 조용히 이제라도 이집트가 군부의 손아귀로 돌아갔으니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아랍 세계에 민주주의란 어울리지 않는 옷이라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의견에는 그럴 듯한 부분이 있습니다. 당연히 ‘아랍의 봄’에 이어 일어난 유혈 사태는 비극이었고, 민주주의가 하루 아침에 꽃 필거라 믿었던 리버럴들은 너무 순진했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독재가 대안일까요? 여기저기서 불거지는 ‘아랍의 봄’에 대한 비판에도 지나치게 순진한 구석이 있습니다.

알제리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1991년 선거를 계기로 촉발된 내전으로 인해, 알제리에서는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15년 간은 압델아지즈 부테플리카 대통령의 통치 하에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고, ‘아랍의 봄’도 알제리를 비껴갔죠. 하지만 잃은 것이 전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부테플리카 대통령은 77세 고령으로 작년에도 3개월 넘게 프랑스 파리의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가스가 풍부한 나라임에도 알제리의 경제 상황은 최악이고, 정치적 부패는 극에 달해 있죠. 불만에 찬 젊은이들은 자유와 일자리를 찾아 지중해 너머로 탈출할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75세의 수상쩍은 군인이 독재 정권의 계승을 노리는 가운데, 여러 해 동안 쌓인 좌절과 분노가 금방이라도 대중 시위로 이어질 분위기죠.

‘아랍의 봄’을 폄하하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은 것은 과연 ‘독재가 대안인가’하는 것입니다. 독재는 부패했고 억압적이며, 결국은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알제리의 사례가 장기적으로 이를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선거로 뽑힌 대통령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압델 파타 알시시도 결국은 경제를 살리지 못하면 무바라크의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특정한 문화권에는 민주주의가 맞지 않는다는 주장은 대만에서부터 남아공의 사례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오래가지 못했죠. ‘아랍의 봄’이 지금까지 엉망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랍 국가의 시민들은 굴종을 좋아한다고 낙인찍는 것이 답은 아닙니다. (Economist)

원문보기

욕설과 인간의 본능

어린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실수로 욕설이나 속어가 튀어나와 흠칫하며 입을 막아본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아직 순수하기만 한 아이들의 영혼에 나쁜 영향을 미친 건 아닐까 걱정하게 되죠. 하지만 심리학자인 제이(Timothy Jay)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어린 아이들은 놀라울 정도로 이른 나이에 이미 욕설과 속어를 익힙니다. (만 나이) 한 살인 아이는 욕설이나 속어에 해당하는 단어 6~8개를, 남자 아이의 경우 6살이 되면 이미 평균 34개나 되는 ‘나쁜 단어’를 알고 있습니다. (여자 아이는 21개)

그 전에, 왜 인간은 욕설을 하고 나쁜 단어를 입에 담게 된 걸까요? 언어가 다르니 당연히 욕설에 해당하는 단어도 언어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여러 언어의 욕설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면, 욕설은 크게 정신적인 부분과 육체적인 부분으로 나뉜다는 겁니다. 정신적인 부분을 먼저 살펴보면, 주로 이교도를 뜻하거나 공동체에서 배척당한 믿음, 신앙, 가치관과 관련된 단어가 나쁜 의미를 띄는 경우가 많고, 육체적인 부분은 신체적인 약점이나 성적인 농담을 수반한 욕설, 속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언어 기능을 담당하는 뇌(오른손잡이들에겐 주로 좌뇌)가 손상돼 의사소통이 제한된 사람들의 경우도 감정이나 습관을 조절하는 대뇌 변연계(limbic system)와 뇌 기저핵(basal ganglia)을 다치지 않은 경우 “비러머글(Goddamit)”과 같은 단어는 별 어려움 없이 말한다는 점입니다. 욕설이 의사소통에 필요한 언어 기능의 일부가 아니라 위험한 대상을 피하거나 금기시하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 속에 본능으로 자리잡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욕설이나 금기어의 어원 가운데 몇 가지 흥미로운 단어들을 살펴보겠습니다.

곰 –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고 모든 생명체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한 건 인류의 역사 전체로 보면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닙니다. 총을 비롯한 다른 도구가 없다면 인간은 여전히 맹수들 앞에서 한없이 나약한 존재입니다. 유럽의 언어들 가운데는 곰을 상당히 완곡하게 표현한 사례가 많습니다. 러시아 총리의 이름이기도 한 메드베데프(Medbedev)는 “꿀을 먹는 동물”이라는 뜻으로 곰을 에둘러 표현한 단어입니다.

죽음 – 죽은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는 건 여러 문화권에서 금기시하는 일이죠. 저승으로 떠난 영혼을 불필요하게 불러올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호주 및 남태평양 지역의 언어를 연구한 한 자료에 따르면, 자일라(Djäyila)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죽고 나자, 한 부족에서는 무언가를 원한다,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쓰이던 동사 “djäl”를 폐기하고 이에 해당하는 단어를 이웃 부족으로부터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바람핀 아내를 둔 남편(cuckold) – 간통이나 부부 사이에 의리를 저버리고 바람을 피는 일은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비난 받아 마땅한 일로 치부돼 왔습니다. 그런데 특히 가부장 문화가 뿌리 깊거나 부계 사회에서는 바람핀 아내를 둔 남편을 무능력자 취급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프랑스어 꾸꾸(cuckoo, 뻐꾸기)를 어원으로 하는 비슷한 언어들은 아직도 배신과 눈 뜨고 배신을 당한 멍청한 존재를 뜻하는 의미로 모욕적인 언사로 여겨집니다. 뻐꾸기는 다른 새가 만들어놓은 둥지에 몰래 알을 낳아 자손을 번식시키는 얌체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의 이름 – 많은 문화권에서 신성한 존재는 입에 담기 어려운 대상이기도 합니다. 신(God)을 뜻하는 단어는 있지만, 신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뜻하는 단어는 의외로 많이 발달하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힌두교에서 자비를 뜻하는 시바(Shiva)신은 원래 더 높은 지위의 신이라 할 수 있는 루드라(Rudra)를 지칭하던 것이 굳어진 단어입니다.

아프리카 남부에서 쓰이는 언어 가운데 하나인 반투(Bantu)어에 혀를 이용해 내는 딸깍 소리가 많은 이유는 이들이 금기시되는 단어들을 점점 암호화하고 폐기해왔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가족이나 친척이 죽으면 그 이름과 비슷한 단어들을 직접 발음하는 대신 이웃 코이산(Khoisan)어에서 딸깍 소리를 차용해 이를 암호화했습니다. 그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언어에는 딸깍 소리가 늘어가고 있습니다. (Guardian)

원문보기

역사상 처음으로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시간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뒤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대개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가졌습니다. 20세기 초반의 영국 상류층 사회를 묘사한 드라마 다운타운 애비(Downtown Abbey)를 보면 고상한 귀족이 등장하는데, 그녀는 “주말(weekend)”이라는 단어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면 그녀와 같은 귀족들에겐 매일 매일이 여가 시간으로 가득차 있었으니까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지루한 노동을 반복해서 계속해야 했습니다. 취리히 대학의 경제사학자인 한스 호아킴 보스(Hans-Joachim Voth)에 따르면 1800년대에 영국 노동자는 일주일에 평균 64시간 일을 했습니다. 그는 19세기에는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는가로 그 사람이 얼마나 가난한지를 알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선진국에서는 상황이 다릅니다. 평균 주당 근무 시간은 지난 100년간 감소했습니다. 하지만 부유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오랜 시간 일을 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965년에만 해도 대학 학위를 가진 남성의 경우 이들은 고등학교 졸업장을 가진 남성에 비해 평균적으로 더 부유했고, 조금 더 많은 여가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2005년에는 대학 졸업장을 가진 남성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성에 비해 여가 시간이 8시간 적었습니다. 작년에 발표된 미국인들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와 관련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대학 졸업자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은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에 비해 하루 평균 2시간 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남성 중에서 주당 50시간 이상을 일하는 남성의 비율이 1979년에는 24%였지만 2006년에는 28%로 상승했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이제 부유한 것과 더 많은 여가 시간이 있다는 것을 함께 묶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경제학자들은 이를 대체효과로 설명합니다. 높은 임금을 받을수록 여가 자체가 가져오는 기회 비용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1980년대 이후 소득분포 상위에 있는 사람들의 임금이 크게 오른 반면,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의 임금은 정체되었거나 오히려 떨어졌습니다. 소득 불평등이 증가하면서 부자들은 더 오랫동안 일을 하려고 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일을 더 적게 하게 되었습니다.

승자독식과 같은 근대 경제의 특징은 이러한 대체효과를 더 확대 시켰습니다. 세계화로 시장의 규모가 커지면서 유튜브나 애플과 같이 혁신을 선도하는 기업의 경우 시장으로부터 취할 수 있는 이익의 규모가 크게 확대되었습니다. 이런 기업일수록 경쟁자들을 물리치는 것이 가져오는 이득은 큽니다. 이는 고소득 숙련직 노동자들에게도 적용됩니다. 몇 시간 더 일한다고 바로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장 성공적인 직장인들은 대체로 가장 오랜 시간 일을 하고 승자독식 경쟁 체제에서 큰 보상을 받습니다. 1980년에는 같은 직군에서 주당 40시간 일하는 남성에 비해 주당 55시간 일하는 남성은 11% 높은 임금을 받았지만,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임금 격차는 25%로 증가했습니다.

1899년에 미국 경제학자인 소스타인 베블렌 (Thorstein Veblen)은 여가가 명예 훈장과 같다고 주장했습니다. 즉 부자들은 더럽고 반복적인 일을 하도록 다른 사람을 고용할 수 있기 때문에 유한 계급은 노동을 하는 대신 글을 쓰거나 자선, 그리고 토론 등의 활동에 시간을 쓸 수 있었다는 겁니다. 최근 옥스퍼드 대학에서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베블렌의 이러한 주장은 시대 상황에 맞춰 고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기계를 들어올리는 것과 같은 육체를 사용하는 일보다는 패션 디자이너와 같은 일자리가 더 많습니다. 즉, 과거에 부자들이 여가 시간에 했던 활동들이 직업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일들을 노동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에 여가 시간이 많다는 것은 더 이상 권력의 지표가 아니라 불필요한 사람, 혹은 실업 상태를 상징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의 직업 만족도를 보면 특별한 기술이 필요없는 서비스 직종이나 단순한 육체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직업에서 느끼는 만족도가 가장 낮았습니다. 캘리포니아-버클리 대학의 사회학자 아리 혹스차일드(Arlie Hochschild)에 따르면 하는 일이 지적으로 자극이 되거나 고무되는 것일수록 사람들은 집에서 여가를 즐기는 것보다 일을 하는 것을 즐기게 됩니다. 또 부유한 사람들은 집에서 빈둥거리는 것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006년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연간 소득이 10만 달러 이상인 미국인들은 소득이 2만 달러 이하인 사람들에 비해 TV를 시청하는 것과 같은 수동적인 여가 활동을 하는 비율이 40%나 낮았습니다.

교육 수준이 낮은 사람들 사이에서 여가 시간이 증가한다는 것은 저숙련, 단순 노동을 요하는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이들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965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미국인의 실업률은 대학 졸업 이상의 학력을 가진 사람들의 실업률보다 고작 2.9% 높았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 차이는 8.4%로 증가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여가 시간을 늘린 것이 아니라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여가 시간이 늘어난 것이라는 지적입니다. (Economist)

원문보기

프란치스코 교황, 기업회생에 성공한 CEO

경영대학원에서는 망해가는 기업에 뛰어들어 위기를 극복하는 CEO 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합니다. IBM 의 루 거스너, 피아트(Fiat)의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애플의 스티브 잡스 등이 대표적이죠. 여기 또 하나 멋진 사례가 나타났습니다. 천주교라는 거대한 조직을 탈바꿈 시켜논 프란치스코 교황이죠.

일년전 그가 CEO(조직의 수장)로서 첫 부활절을 축하할때마다 해도 전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다국적 조직(천주교)은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경쟁자(다른 종교)들이 이머징마켓에서 시장점유율을 가져가고, 기존시장(유럽)에서는 스캔들이 발생하여 고객(신자)이 떠나고 영업인력(사제) 사기가 꺾였죠. 종신고용 보장에도 신규 직원(사제) 채용이 어려웠습니다. 회계도 엉망이었습니다. 회계 내부자료가 유출되어 바티칸 은행이 부패와 무능의 온상이란게 밝혀졌죠. 600년만에 처음으로 스스로 사임한 베네딕트 16세를 두고 이사회가 개입했다는 루머도 있었습니다.

1년만에 기업은 기사회생에 성공했습니다. CEO은 85% 지지율을 자랑할정도로 인기가 많습니다. 고객들 발걸음이 늘었고, 영업인력을 이를 ‘프란치스코 효과’ 라고 부릅니다. 핵심 성공요인은 멀까요? 프란치스코는 세가지 원칙을 따랐습니다.

첫째, 핵심역량에 집중하는 겁니다.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조직의 미션에 집중합니다. 전용 관저 대신 다른 성직자 50명과 함께 살며 소년원에서 12명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교황들이 줄곧 입어온 벨벳 망토와 붉은 신발을 벗어던지고 차도 메르세데스 대신 포드를 탑니다. 성경의 해석을 둘러싼 논란이나 화려한 행사 등 부수산업에 투자를 줄였습니다. ‘가난한 자 우선 전략’은 성장 가능성이 높은 이머징 마켓의 수요와도 부합합니다.

새로운 전략 방향에 맞추어 교황은 두가지 경영 도구를 사용하였습니다. 먼저 브랜드 재수립입니다. 조직의 전통적인 가치에 따라 낙태와 동성연애자 결혼에 반대하긴 하지만 대단히 비판적인 논조는 아닙니다. “내가 누구라고 단죄한단 말입니까?(Who am I to judge?) “라는 발언이 큰 화제를 일으켰죠.

조직도 재구성하였습니다. 8명의 추기경에게 교회 구조를 리뷰하는 책무를 주었고 맥킨지와 KPMG에게 행정기구와 바티칸 은행을 점검해보도록 프로젝트를 주었습니다. ‘신의 컨설턴트’가 된 셈이죠.

창업자(신) 의 뜻은 아무도 모릅니다. 전염병이나 개구리의 재앙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데서 새 CEO 를 승인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죠. 여성에게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는 등 더 급격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새 CEO는 기업회생에 성공한 걸로 보입니다. (Economist)

원문보기
일년전 교황선출을 CEO선출에 비유한 이코노미스트 기사 보기

미 대법원, 미시간 주의 소수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철폐 조치를 인정하다

지난 화요일 미 대법원은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철폐하기로 선택한 미시간 주의 결정 과정이 위헌이 아니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 판결로 인하여 그간 다소 미온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던 다른 주들의 정책 폐기 과정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 소수계의 인권 후퇴 문제가 발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인종, 성, 종교, 출신국 등을 이유로 상대적으로 열악한 사회적 지위에 머물러있는 소수집단에게 취직 및 교육의 기회를 확대하는 제도입니다. 이 제도는 대학과 기업들에게 입학생 선별이나 직원채용 과정 중 소수민족들에게 적극적(affirmative)으로 정원의 일정 비율을 할당하거나 가산점을 주는 행동(action)을 취하도록 장려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때문에 오히려 주류 백인사회의 구성원들이 전형과정에서 역차별을 받고 있다는 논란이 일기도 합니다.

소수집단 우대정책은 1965년 존슨(Lyndon B. Johnson) 미 대통령의 행정명령 11246(Executive Order 11246)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회경제적으로 불리했던 과거의 경계 조건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불공정 경쟁 구도가 가속화되고 사회계층의 고착화 현상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인권신장운동의 산물이었죠.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본 사건의 쟁점은 소수집단 우대정책의 합헌성 여부를 다투는 것이 아니었다 설명했습니다. 미시간 주의 결정에 손을 들어준 대법원의 판결이 소수집단 우대정책을 위헌이라 규정하는 것으로 오인되는 것을 경계한 것입니다. 수석재판관 케네디는 이 사건의 보다 핵심적인 쟁점은 연방 정부로부터 비롯된 공공정책의 시행을 중단하기로 결정한 미시간 주의 의결 과정이 합헌적이었는지 여부를 판가름하는 것이었다 밝혔습니다. 즉, 본 판결은 대통령의 행정명령으로 시작된 소수집단 우대정책이 근본적으로 위헌이라 규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합헌적인 의결과정을 전제로 이러한 공공정책의 시행을 중단할 수 있는 주정부의 재량권, 혹은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지난달 미국 시민들을 대상으로 벌인 퓨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3%는 소수집단 우대정책에 찬성하는 입장을, 나머지 30%가량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Pew Research Center)

원문 보기

그 사건의 원인은 무엇인가

(역주: 아래는 마크 뷰캐넌(Mark Buchanan)의 “예측(Forecast)”의 부분 발췌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원인과 결과라는 개념이 가진 까다로운 본성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깊이 생각해 왔습니다. 이는 세상의 대부분의 사건들이 수많은 원인들의 상호작용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이며, 그 사건들을 하나의 이야기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그들이 느껴왔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혼돈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작은 사건들이 서로 얽혀 전체 국가의 운명까지 좌우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920년 그리스의 왕이 애완용 원숭이에게 물려 죽은 사건은 결국 그후 연속된 사건들을 통해 그리스와 터키가 전쟁을 일으키도록 만들었습니다. 후에 영국의 수상이 되는 윈스턴 처칠은 이 당시 “한 원숭이가 25만명을 물여죽었다”고 평한 바 있습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할렛 카(Edward Hallett Carr)는 역사학의 입장에서 ‘무엇을 한 사건의 원인으로 보아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해 한 가지 해결책을 제안했습니다. 그는 한 사건에 대해 수많은 다양한 원인들이 존재할 때, 그 원인들 중 이를 통해 미래를 위한 교훈을 끄집어 낼 수 있는, 곧 “일반화 시킬 수 있는” 원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1937년 5월 6일, 뉴저지의 레이크허스트 해군기지에 계류 중이던 독일의 비행선 힌덴부르그는 36명의 사상자를 내며 폭발했습니다. 이 폭발의 가장 큰 원인은 비행선을 공중에 띄우기 위해 비행선 내부에 존재했던 수소 기체가 폭발한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 힌덴부르그 사건의 원인을 무엇으로 돌렸을까요? 어떤 이들은 힌덴부르그가 구름을 통과하면서 그 금속 표면에 전하가 축적되었고, 이 때문에 발생한 정전기의 불꽃이 수소기체를 발화시켜, 폭발이 이어졌다고 말했습니다. 곧, 이들은 힌덴부르그가 폭발한 원인으로 정전기에 의한 불꽃을 꼽았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폭발을 막기 위해서는 불꽃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우리가 이 사건에서 얻어야 할 바른 교훈이었을까요?

거대한 금속 장비가 구름을 통과할 경우 전하가 축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으며 따라서 불꽃은 항상 일어나게 됩니다. 금속 장비가 역시 금속으로 이루어진 정거장에 착륙할 때에도 마찰에 의해 불꽃은 발생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꽃이 일어난다고 해서 항상 폭발이 발생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수소 기체는 폭발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수소 기체가 가득 차 있는 풍선은 항상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습니다. 곧, 힌덴부르그 사건의 보다 일반적인 원인은 바로 비행선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수소 기체인 것입니다. 수소로 가득 차 있는 비행선을 하늘에 날리는 한, 비록 매 번 다른 이유에 의해 그 비행선이 폭발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항상 재난이 발생할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불꽃이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이 아니라 수소기체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Forecast)

[칼럼]세월호 참사, 끔찍한 일이지만 ‘살인’은 아니다

-세월호 사태에 대한 대통령의 발언을 다루어 일부 국내 언론에 소개된 가디언지 칼럼 전체를 정리한 확장 요약판입니다. 

현재 한국에서는 세월호 사고에 관련된 (불행히도 초기 대응을 제외한) 모든 것이 너무 “업”되어 있습니다. 참사의 규모나 희생자 다수가 어린 학생이라는 점에서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고 엿새째, 국가 수반인 박근혜 대통령도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일부 승무원들이 “살인과도 같은 행태”를 저질렀다고 말했죠. 대통령은 희생자 부모나 국민 일반이 아닌 정부 관료들 앞에서 책임 있는 모든 자들에게 민형사상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습니다. 서방 국가에서 국가적인 비극에 대해 지도자의 반응이 이 정도로 늦었을 때 지도자가 지지율과 자기 자리를 그대로 보전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지만, 박 대통령은 늦어버린 타이밍을 수사의 강도로 만회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번역이나 문화적 차이 때문에 말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어렵겠지만, “살인”이라는 단어는 분명 두드러집니다.

어쩌면 이번 참사를 보고는 누구나 감정적인 반응을 할 수밖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죽음을 예감한 학생들이 가족에게 보낸 마지막 문자 메시지, 아직도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해안에 서서 슬퍼하는 부모들, 살아남은 것을 견딜 수가 없다며 자살한 학교 교감… 모두의 감정이 고조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분노와 슬픔의 강력한 조합은 문화권을 넘나드는 현상입니다. 100여 명의 학생들이 목숨을 잃은 영국 애버팬 산사태, 역시 수백 명의 학생들이 숨진 러시아 베슬란 학교 인질극, 중국 쓰촨성 지진 등은 여러 해가 지나도 여전히 큰 상처로 남아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살인”이라는 단어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세월호의 학생들이 정말로 “살해”당한 것일까요? 베슬란 학교 인질 사태 때 죽은 학생들은 실제로 테러 행위 때문에 목숨을 잃었죠. 애버판 당시에는 산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업무 과실이 있었지만, 기소된 사람은 없었습니다. 1987년 헤럴드오브프리엔터프라이즈호가 침몰해 193명이 목숨을 잃었을 때도 회사 사장이 물러나기는 했지만, 선수문을 닫지 않은 승무원들에게 집중적인 비난을 가하며 개개인을 탓하기 보다는 사태가 일어난 과정 자체를 비난하는 여론이 더 컸습니다.

하지만 한국의 분위기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재까지 공개된 교신 전문을 보면 사고 대응 과정은 공포에 질린 승무원들의 무능과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누군가를 벌하고자 하는 욕구가 끓어오르겠지만, 동시에 사회는 책임과 의도에 대한 보편적인 질문에도 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과실이나 공포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어졌다고 그 사람을 “살인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어디에 선을 그어 “살인”을 정의해야 하는 것일까요? 문화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서양 어디에도 박 대통령이 “살인”이라는 발언을 했을 때 그은 선 만큼이나 그 선이 명확하게 그어지는 곳은 없을 겁니다. (Guardian)

원문보기

Follow

Get every new post delivered to your Inbox.

Join 16,842 other follow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