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포퓰리즘 시대 전쟁이 된 선거, 결국 그들 손에 달렸다
2024년 3월 22일  |  By:   |  SBS 프리미엄  |  No Comment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1월 31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지난해 12월 3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부촌 키아와 아일랜드 지역 경찰에 다급한 신고 전화가 접수됐습니다. 전 주 UN 미국 대사이자, 그에 앞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를 두 번 지냈으며, 현재 공화당 경선에 참여하고 있는 니키 헤일리 후보의 집에 한 커플이 침입했고 아내를 총으로 쏜 남편이 지금 자해하려 하는 상황이니, 당장 이곳으로 경찰을 보내 달라는 신고였습니다. 키아와 아일랜드 경찰은 즉각 니키 헤일리 후보와 후보 가족의 소재부터 파악했고, 신고 전화가 스와팅(swatting)이란 사실을 이내 밝혀냈습니다.

스와팅은 말 그대로 긴급 전화에 거짓 내용을 신고해 무장한 특수 경찰이나 병력이 출동하도록 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나라에선 위험한 상황에서 경찰이 오면 대체로 상황이 정리되고 안심해도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경찰의 존재만으로 일어날 뻔하던 사고나 범죄가 억제되는 효과가 있죠. 그러나 사실상 누구나 원하면 총기를 소유할 수 있는, 그래서 민간이 보유한 총기 숫자가 인구보다 많은 미국에선 다릅니다.

범죄나 사건 현장에 갈 때 현장에 있는 사람 누구든 총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전제 아래 경찰 대원들도 중무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고 해도 총이 있는 곳엔 총기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경찰이 용의자나 범인의 무장 상태를 오인해 총격을 가하는 일도 심심찮게 일어나므로, 미국에서 스와팅은 단순한 장난 전화 이상의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곤 합니다.

전문 번역: 공직자를 겨냥한 ‘거짓 신고'(Swatting)와 정치 폭력의 위험한 부상

 

미국 연방 검사 출신 변호사 바바라 맥퀘이드가 스와팅과 정치 폭력의 부상에 관한 칼럼을 썼습니다. 스와팅의 문제를 잘 지적했는데, 앞서 니키 헤일리 전 UN 대사가 피해를 본 스와팅을 보도한 로이터 기사에도 지적됐듯 스와팅 사례는 최근 들어 급증했습니다. 최근 들어 스와팅이 급증한 것과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는 인물이 도널드 트럼프입니다.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유력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스와팅을 직접 부추긴 건 아니지만, 트럼프의 재집권 가도에 방해가 되는 인물들이 주로 스와팅의 표적이 되는 점을 고려하면 트럼프의 부상과 스와팅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하기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서둘러 공화당 후보 자리를 굳히고 바이든 대통령과의 리턴 매치를 준비하고 싶은 트럼프의 바람과 달리 니키 헤일리는 경선에서 사퇴하지 않고 버티고 있습니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죠. 헤일리를 표적 삼아 스와팅을 한 범인의 범행 동기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트럼프를 열렬히 따르는 지지자라면 트럼프에게 눈엣가시 같은 헤일리를 괴롭히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스와팅 피해자 목록을 보면, 경선 투표용지에 트럼프가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판단한 메인 주 주무장관이나 같은 판결을 한 콜로라도주 대법관들도 있습니다.

 

민주주의 선거는 전쟁이 아니거늘

포퓰리즘은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르는 민주주의 정치 체제에서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지만, 포퓰리즘이 득세하면서 오히려 민주주의의 원칙들을 해치고 갉아먹기에 이른 지금 미국의 상황은 새롭습니다. 대표적인 현상 두 가지를 꼽자면, 기존 제도를 향한 유권자들의 불신이 커진 것과 선거가 ‘여기서 지면 끝장’인 최후의 전투로 변질된 것입니다.

트럼프를 따르는 지지자 중에는 여전히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가 지지 않았다고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바이든이 승리를 부당하게 빼앗아 갔으므로, 이번에는 이를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싸움이 될 거라고 보고 있는 겁니다. 선거라는 제도와 그 제도를 지탱하는 규칙을 믿지 않으니, 제도가 정의를 구현해 줄 수 있다는 믿음도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니 기다려야 할 이유도 없죠.

필요하다면 자기가 볼 때 옳은 말을 하는 사람, 정의의 편에 선 사람(트럼프)을 지키기 위해 실정법을 어기더라도 실력을 행사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부패한 기득권으로부터 미국을 구해 낼 구세주와 같은 트럼프의 앞길을 막는 자는 당적을 불문하고 모두 심판의 대상인데, 선거일까지 기다렸다가 표로 심판하는 것보다 직접 실력을 행사할 수 있다면 그 방법이 더 낫다고 믿는 겁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에겐 공화당 대통령 후보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상대방(opponent)이 아니라, 평범한 미국인이 겪는 어려움을 전혀 모르는 한 줌 갑부들의 후원을 받고 트럼프의 앞길을 막고 있는 적(enemy)입니다. 경쟁에서는 정해진 원칙에 따라 대결을 벌여 승리하면 좋고, 패배해도 승자를 축하하고 다음번 승부를 기다리면 됩니다. 반면 적과 벌이는 전쟁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지워버리는 것만이 살길입니다. 패배하면 내가 제거될 테니까요. 트럼프는 2020년 선거 결과에 불복하고, 1월 6일 의사당 테러를 최소한 방조했거나 부추긴 뒤 4년 뒤 다시 대통령직에 도전함으로써 민주주의 선거를 경쟁이 아닌 전쟁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자신이 승리하면 자신을 향해 마녀사냥을 일삼은 모든 이들을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트럼프의 다짐에선 ‘여기서 지면 끝장’이라는 비장한 현실 인식이 엿보입니다.

생각의 차이가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다원주의 원칙과 정면으로 어긋납니다. 다원주의가 대접받지 못하는 곳에선 민주주의가 번성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 보수주의, 개인주의 등 여러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정당이던 공화당이 트럼프 개인을 추종하는 열성팬으로 가득한 정당으로 변하면서 이제 공화당은 트럼프 아닌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트럼프의 당이 돼 버렸습니다. 당내 민주주의도 자연히 말라죽었습니다.

 

미국 유권자들은 스와팅에 어떤 판결을 내릴까

트럼프의 부상은 “나만 옳고 나와 다른 생각은 다 틀렸다”는 독선이 노골적으로 발현된 결과입니다. 틀린 것을 바로잡기 위해 실정법보다도 강력한 권위가 개입해도 좋다는 발상은 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위험하지만, 적잖은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상황입니다. 오늘 소개한 스와팅만 해도 엄연히 실정법을 어긴 범죄 행위지만, 법을 어긴 데 아랑곳하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정의를 구현하는 데 이바지했다는 착각을 자기 진영 안에서 서로 부추기며 응원하는 실정입니다.

다만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2016년 이후 트럼프가 전면에 나선 공화당은 단 한 번도 전국 단위 선거에서 이긴 적이 없다는 점은 미국 유권자들이 계속해서 선거에서 트럼프의 극우 포퓰리즘과 권위주의를 심판해 왔다고 해석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사실 2016년 대선도 (트럼프는 인정하지 않지만) 전체 득표에선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보다 287만 표 모자랐고, 2018년 중간선거, 2020년 대선과 의회 선거, 2022년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앞세운 후보들은 경합주, 경합 선거구에서 대부분 고배를 마셨습니다. 주 단위 선거에서는 주지사, 시장은 물론 대법관, 치안판사, 검사도 유권자들이 직접 선거로 뽑는 곳이 많은데, 그런 선거에서도 경합주에선 트럼프의 지지를 받은 후보들이 승리한 경우가 드뭅니다.

이미 선거의 해가 밝았습니다. 이제 와서 트럼프의 이름을 대선 투표용지에서 제거하려는 시도는 효과를 거두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도 있죠. 이번에도 유권자들의 선택에 맡기는 편이 가장 현명한 길일 겁니다. 그게 주기적인 선거의 본질에 가깝기도 하고요.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것, 그 폭력을 방조하거나 부추기는 건 모두 민주주의의 적이자 걸림돌입니다. 스와팅이 묵인하는 정치 폭력을 그대로 용인하느냐, 반대로 심판하고 제어하느냐가 이번 선거에 참여하는 유권자들의 손에 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