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것 말고 노화에 대해 정말 알아야 할 것들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10월 16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작가 로저 로젠블랏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58세의 나이로 “나이 듦의 법칙(Rules for Ageing)”을 썼습니다. 58세는 물론 적지 않은 나이입니다. 몇 년 뒤면 노인으로 불릴 것이며, 40대와 50대를 보내면서 나이가 든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25년이 지난 2023년, 이제 83세가 된 그는 자신이 노화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했다고 고백합니다.
전문 번역: 노화에 대해 우리가 이야기하지 않는 사실들
그가 지난 9월 30일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란을 통해 진짜 노화를 이야기하며 언급한 몇 가지는 우리에게 진짜 노화가 어떤 것인지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 문제에 대해 덜 이야기하는지도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물론 간단한 답은 있습니다. 널리 알리고 고민하고 토론한다고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진짜 노화의 예 몇 가지는 택시를 타기 어렵다는 것, 곧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과 건강이 나빠지면서 의사를 자주 만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문화와 멀어지기 때문에 TV 스타나 유행어를 모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로젠블랏이 말하는 것들은 모두 노화의 한 결과입니다. 움직임(mobility)은 정희원 교수가 “당신도 느리게 나이들 수 있습니다”에서 느리게 늙는 방법으로 제시한 4M 중 가장 먼저 이야기하는 것일 정도로 중요합니다. 우리가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자기 신체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필수 조건입니다.
움직임은 근육의 문제이며, 노화는 근육의 생성을 어렵게 하고 근육량을 감소시키기 때문에 정희원 교수는 젊을 때부터 근육을 많이 비축해 놓고 나이 든 뒤에도 이를 유지할 수 있는 생활 습관을 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여러 장기가 수명을 다해 의사를 만나야 하는 것도 노화의 결과입니다. 반면 TV 스타나 유행어를 모르게 되는 것은 세대 간의 취향의 단절 때문이지 노화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닐 것 같습니다. 혹은 젊은 세대에 더 집중하는 자본주의 미디어의 영향이라는 좀 더 복잡한 이유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어떤 노인들은 치매 등의 지적 능력 퇴화로 문화 활동을 즐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로젠블랏이 아직도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쓴다는 것은 역으로 나이듦이 그리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노화에 대해 오늘날 우리는 매우 양가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한쪽 극단에서는 20세기 시작된 급격한 기술 발전이 21세기에 지속되면서 특이점(singularity) 등을 통해 인류가 노화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합니다. 하버드의 데이비드 싱클레어 교수가 쓴 “노화의 종말”은 그런 포부를 담고 있습니다. 물론 20세기 이후 인간의 평균 수명은 계속 늘어났고, 어쩌면 지금의 80세나 90세를 넘어 100세, 120세가 평균 수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다수의 학자는 인류가 노화를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그보다는 로젠블랏이 이야기한 여러 가지 불편을 최대한 덜 겪으면서, 곧 죽기 전까지 건강하게 사는 것이 더 현실적인 목표가 됐습니다. 유행어로 자리 잡은 9988123, 곧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하루 이틀 아프고 사흘째 세상을 떠나자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일 겁니다.
물론 이런 삶이 목표가 되는 이유는 대부분 노인이 그렇게 세상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잃은 상태에서 삶을 지속하게 될 경우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도 이런저런 폐를 끼치게 되죠. 특히 신체의 퇴화는 종종 지적 능력의 퇴화를 동반하며, 이는 누구도 그리기 싫은 자신의 미래일 겁니다. 삶의 마지막 10~20년을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내고 싶은 이는 아무도 없을 겁니다.
베스트셀러인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인간답지 못한 삶을 지속하게 만드는 현대 의료 체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인류가 극히 대운을 타고나 특이점 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앞으로 몇십 년 안에 획기적인 수명 연장 기술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다음 몇십 년 동안에는 수명을 더 길게 연장하는 기술이 나올 수 있고, 그렇게 점점 더 기술의 발전 속도가 노화의 속도를 기어이 앞지를 수도 있습니다. 이는 죽음으로부터의 탈출 속도라는 개념입니다.
아지트 바르키의 “부정 본능”은 인간이 지적 존재로 진화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공포를 부정하는 능력, 곧 자신을 속이는 능력 덕분이라고 주장합니다. 바로 그런 부정 본능의 결과 기술 발전과 현대 문명이 만들어졌고, 인류가 실제로 죽음에 정면으로 도전하게 되었다는 것은 아마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아이러니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