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지금의 정치적 양극화에 미디어는 얼마나 책임이 있을까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5월 22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4월의 마지막 토요일 저녁, 백악관 기자단 만찬이 열렸습니다. 출입처 제도가 없는 미국에서 백악관은 등록된 기자만 드나들며 궁극의 취재원이라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취재할 수 있는 독특한 부처입니다. 백악관 출입기자들은 원활한 취재 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협회를 꾸렸는데, 우드로 윌슨 대통령 때부터 이어진 역사가 109년이나 됩니다.
1921년 5월 어느 날 협회 사람들이 모여 저녁식사를 같이한 것이 연례행사로 굳어졌으니, 백악관 기자단 만찬의 역사도 어느덧 100년이 넘었습니다. 만찬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주요 인사와 정, 재계 명사들도 초청됩니다. 또 1980년대부터 당대를 대표하는 희극인이 초청돼 권력과 다양한 세태를 풍자하는 연설을 하는 게 전통이 됐습니다. 올해 백악관 기자단 만찬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것도 초청된 코미디언 로이 우드 주니어(Roy Wood Jr.)였습니다.
로이 우드 주니어의 퍼포먼스에 대한 주요 언론의 평가는 칭찬 일색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악관 기자단 만찬을 모두가 즐긴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민주당과 민주당 편인 주류 언론, 이른바 워싱턴 엘리트들끼리 벌인 ‘자기들만의 잔치’ 아니냐는 마뜩잖은 시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화당 지지자 중에는 백악관 기자단 만찬이 열린 줄도 모르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존재도 모르는 행사를 싫어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죠. 트럼프 지지자 중에는 “바이든이 (2020년 선거에서) 부당하게 트럼프의 승리를 찬탈한 뒤” 워싱턴 D.C.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예 관심을 끊은 사람도 많습니다.
트럼프 시대를 거치며 공화당 지지자들은 “주류 엘리트”와 사이가 매우 나빠졌습니다. 공화당 정치인 중에도 ‘트럼프의 후광으로’ 당선된 이들은 기존의 엘리트 정치인과는 여러모로 결이 다릅니다. 전국적으로 보면 민주당과 공화당 지지율이 엇비슷하게 나오는 미국이지만, 수도 워싱턴 D.C.의 정치적 성향은 완전히 한쪽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2016년 대선 투표 결과를 투표소별로 집계해 표시한 뉴욕타임스의 지도를 보시죠. 빨간색이 짙을수록 공화당이 표를 많이 받은 곳이고, 파란색이 짙을수록 민주당이 표를 많이 받은 곳입니다. 미국 전체 지도의 색깔은 대체로 빨갛죠. 민주당 지지층은 대체로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워싱턴 D.C.와 근교 지도를 확대해 보면 새파랗다 못해 시퍼렇습니다. D.C.에서 일하는 공무원이나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들이 많이 사는 북부 버지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2020년 지도도 있는데, 워싱턴 D.C. 바로 옆에 있는 버지니아(VA)주 데이터가 누락돼 있어서 2016년 지도를 썼습니다. 최종 결과는 한 번은 트럼프 승리, 한 번은 트럼프 패배로 정반대였지만, 도시는 민주당, 시골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표심의 대세는 같습니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백악관 기자단 만찬을 “다 한통속인 워싱턴 D.C. 엘리트들끼리 웃고 떠드는 잔치”로 여기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정치적 양극화와 언론의 관계
사실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는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느 사회나 이념적으로 보수와 진보로 나뉘는 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만 미국의 정치적 양극화가 최근 주목받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예전에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정치적으로 견해가 달라도 서로 싸우다가도 토론하고, 화해하고, 양보도 하면서 끝내 함께 무언가를 만들어 냈는데, 이제는 이른바 공통분모를 찾지 못해 서로 말이 안 통하고,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 사이가 됐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치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통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공화당 지지자와 민주당 지지자들은 서로 너무 싫어하게 돼서 지지 정당을 뛰어넘는 결혼은 고사하고 데이팅 앱에서도 상대방을 걸러내고, 서로 이웃으로 지내기도 싫어하며, 자기 자식이 상대당 지지자와 결혼하려 하면 그 결혼을 뜯어말린다는 겁니다.
위에 링크를 건 기사가 벌써 7년 전인 2016년에 나온 기사입니다. 즉, 정치적 양극화의 골이 깊어졌다는 지적과 분석도 더는 새롭지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 집권 4년을 거치며 모두가 깨달은 것 하나가 있다면, ‘같은 미국 사람인데 생각하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일 테니까요.
오늘 같이 생각해 보려는 주제는 이토록 깊어진 미국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와 언론의 관계입니다.
언론은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길까요? 아니면 정치적 양극화를 반영한 결과, 지금의 언론 지형이 형성된 걸까요?
앞서 소개한 백악관 기자단 만찬을 두고도 민주당 지지자들이 보는 주류 언론은 만찬 앞뒤로 몇 일간 만찬 관련 이모저모를 “장안의 화제”로 다뤘지만, 보수 언론에서는 거의 언급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양극화의 단면은 미국의 언론 지형에서도 곧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 중에 어떤 게 원인이고, 어떤 게 결과인지 가려내기란 정말 어렵죠. 닭이 먼져냐, 달걀이 먼저냐 문제 같기도 하고요.
생각해 보니, 15년 전 언론사 입사시험 면접에서 저는 비슷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언론은 여론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여론을 선도한다고 생각하나요? 당신이 고를 수 있다면 어떤 언론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정확한 자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대략 위와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미리 정답을 말씀드리자면, 정답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릅니다.
원래 세상엔 정답이 명확하지 않은 문제가 많죠. 그런 문제일수록 어렵다고 피해가지 말고, 더 많은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더 좋은 답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가려고 노력해야 할 테니, 두 주장을 한 번 차분히 살펴보죠. 양쪽 다 근거로 드는 사례들도 일리가 있습니다. 먼저 오늘 이 글을 쓰는 데 많은 힌트를 준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해 소개합니다.
전문 번역: 보수 언론이 맞닥뜨린 ‘시청자 편향’ 문제
언론이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긴다
언론이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긴다면, 즉 언론이 원인이고 정치적 양극화가 결과라면, 세상을 보는 투명한 창이어야 할 언론이 투명하지 않고, 기울어져 있다는 뜻이겠죠. 또한, 실제 세상은 언론에서 그리는 것처럼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사람들로 가득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할 테고요.
그래서 (앞서 지도에서 보셨듯) 공화당이 우세한 주는 빨간 주(red state), 민주당이 우세한 주는 파란 주(blue state)라고 부르는데, 사실 미국은 보수와 진보로 극명하게 갈라졌다기보다 중도에 있는 사람들이 더 많으므로, 보라색 주들(purple states)의 연합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언론이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긴다고 볼 만한 사례를 살펴보죠. 보수 언론의 사례로는 얼마 전에 스프에 소개해 드린 폭스뉴스 메인 앵커 터커 칼슨의 부정선거 보도를 들 수 있습니다. 터커 칼슨은 2020년 선거 이후 바이든의 당선이 정당한 결과인지 의심된다는 주장을 거듭 뉴스에 내보냈습니다.
사실보다 의견이 더 중요해진 케이블 뉴스에서 칼슨은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스라는 회사가 만든 투표 기계가 부정선거에 동원됐다는 음모론을 계속 퍼뜨렸죠. 그런데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스가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 과정에서 터커 칼슨이 동료 직원들과 주고받은 이메일, 문자 메시지가 공개됐습니다. 거기서 터커 칼슨은 부정선거 주장이 터무니없는 억지라고 여러 차례 말합니다.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측의 근거도 부실하다, 폭스 뉴스 기자들이 취재한 것도 도무지 못 믿겠다는 말도 했죠. 그러니까 칼슨은 자기는 믿지도 않는 말과 주장을 뉴스에 버젓이 내보낸 겁니다. 왜? 그 주장이 폭스 뉴스가 그리는 세상에 더 들어맞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미 폭스 뉴스 시청자 가운데 상당수가 2020년 선거가 부정선거였다고 믿지만,) 시청자들은 진짜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믿음을 더 굳혔죠.
진보 혹은 친민주당 성향으로 분류되는 주류 언론들도 “이슈몰이”를 합니다. 백악관 기자단 만찬에서 로이 우드 주니어도 그 점을 콕 집어 풍자했습니다. 백악관 기밀문서 유출 스캔들에 관한 보도 행태가 대표적입니다.
사건 초반, 즉 백악관에 있어야 할 기밀문서를 몰래 자택으로 가져간 게 트럼프만의 문제이던 때 언론들은 트럼프가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열을 내며 앞다투어 보도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바이든 대통령의 백악관 밖 개인 사무실에서도 백악관 기밀문서가 발견되고, 사건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죠.
이때부터 기사의 톤이 대폭 누그러집니다. 기밀문서 관리가 잘 안 돼서 누구든 실수할 수 있다는 식의 기사가 많아졌죠. 그러다 뜬금없이 중국이 보낸 정찰 풍선이 미국 상공에 떠다닌다는 뉴스가 나면서 기밀문서 스캔들은 대중의 관심사에서 멀어졌습니다.
중국 정찰 풍선이 실제 미국의 안보에 커다란 위협을 가했을 수도 있지만, 대중의 시선을 돌리기 위한 여론몰이 아니냐는 지적은 그때부터 꾸준히 제기됐습니다. 트럼프가 하면 큰 잘못, 바이든이 하면 눈감아줄 수 있는 실수인 것처럼 다른 잣대를 적용해 기사를 쓰는 건 분명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일입니다.
언론은 정치적 양극화를 비추는 거울일 뿐
이번에는 정치적으로 극단으로 갈라진 세상이 원인이고, 언론은 세상을 충실히 취재해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다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살펴보죠. 앞서 살펴본 터커 칼슨의 사례만 해도 진실을 보도하지 않은 폭스 뉴스와 터커 칼슨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긴 하지만, 사실 뉴스 시청자 대부분이 듣기 싫어하고 불편해할 말을 선뜻하기 쉽지 않은 사정도 있어 보입니다. 이렇게 비위를 맞춰야 할 시청자가 처음부터 특정 이념에 쏠려 있다면, 불편부당한 방송을 하기는 어렵습니다.
터커 칼슨과 폭스 뉴스에는 뉴스에서 다루는 이야기가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취재를 얼마나 빈틈없이 하고 쓴 기사인지도 우선순위가 아니었죠. 그보다 우리 시청자들이 듣고 속 시원하다고 박수쳐 줄 이야기인지가 가장 중요한 고려 사항이었습니다.
어쩌면 이는 폭스 뉴스뿐 아니라 시청률, 구독자 숫자에 목을 매야 하는 모든 언론사에 해당하는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언론사의 수익 구조도 언론의 논조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인데, 그 얘기까지 하면 오늘 글이 너무 길어질 테니, 그 이야기는 다음에 기회를 봐서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렇게 시청자/청취자/독자의 비위를 맞추는 게 중요해진 언론 환경은 가짜뉴스와 음모론이 늘어나는 데도 일정 부분 기여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칼럼에서 로스 두댓이 지적한 조 로건은 입버릇처럼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전문가가 아니라 잘 몰라요. 그런데 자유의 나라 미국에서 다양한 의견, 생각 들어보는 게 뭐 어때서요? 어디 한 번 들어나 봅시다. 듣고 나서 우리가 판단해 보자고요.
이런 소개와 함께 수천만 명에 이르는 구독자에게 조 로건은 실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도 많고, 신선한 관점도 접할 수 있지만, 과학적 사실을 존중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전문가가 아닌 사람에게 의견을 구해서 위험천만할 때도 있습니다. 그 결과 조 로건의 방송에는 좋게 말하면 괴짜 같은,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음모론을 펴는 수준 미달의 게스트가 꽤 자주 나옵니다.
회충약이 코로나19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의견을 걸러내지 않고 소개하자, 전국적으로 동물병원에 구비해 둔 강아지, 고양이용 구충제까지 동이 났습니다. 물론 조 로건의 방송에 엉터리 전문가가 출연하기 전에도 사재기가 일어나긴 했지만, 방송 이후 회충약 사재기가 전국적으로 번졌으니, 조 로건은 이 사태에도 적잖은 책임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조 로건을 욕할 수 있겠지만, 그럼 조 로건은 그저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라고 답할 겁니다. 결국, 문해력이 부족한, 사실과 주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청취자들이 음모론의 온상이라고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로스 두댓이 쓴 칼럼의 제목 “보수 언론이 맞닥뜨린 ‘시청자 편향’ 문제”가 지적하는 것도 바로 이 부분입니다. 좋은 기사를 써도 독자나 시청자들이 이를 알아주기는커녕 편 가르기로 언론사를 낙인찍고 조리돌림하는 세상에서 좋은 언론사는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미국의) 보수 언론은 다시 주류에서 경쟁할 수 있을까?
사실 앞서 언급한 면접시험을 봤던 언론사에 입사해 기자가 되고 나서, 해당 문제를 냈다는 선배 기자가 정답을 귀띔해 줬습니다.
“둘 다 맞다. 언론은 여론을 선도하기도 하지만, 충실히 반영하기도 해야 한다.”
상당히 김빠지는 답이었지만, 그만큼 기자의 꼼꼼한 취재와 보도국, 편집국의 판단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할 겁니다. 미국 언론과 정치적 양극화의 관계에도 이 두루뭉술한 답변을 대입해 보면 이렇습니다. 언론이 정치적 양극화를 부추기기도 했지만, 균형 감각을 잃은 시청자들이 정론직필하는 언론을 말려 죽이고 있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라고요.
특히 폭스 뉴스를 비롯한 보수 언론에 어쩌면 이는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폭스 뉴스가 케이블 뉴스 가운데 돈은 가장 잘 벌지만, 가짜뉴스와 음모론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하는, 심지어 때로는 일부러 키우기도 하는 뉴스 채널이 번창하는 건 장기적으로 미국 민주주의에도 해로운 일입니다.
내년, 내후년 백악관 기자단 만찬은 보수 언론에서도 다뤄질 수 있을까요? 보수 언론은 멀어질 대로 멀어진 주류에 다시 편입해 건강한 균형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언론은 여론을 선도하기도 하고 반영하기도 하지만, 여론이 철저히 반영되기만 하는 선거 결과를 떠올려 보면, 지난 몇십 년 동안 서서히 만들어져 굳어진 지금의 흐름이 쉽게 바뀌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 흐름이란 위에 지도에서 보여드린 대로 워싱턴 D.C. 등 도시의 교육 수준 높은 엘리트와 중산층은 민주당을, 반대로 대도시가 아닌 근교나 시골에 사는 주로 대학 졸업장이 없는 사람들은 공화당을 지지하는 흐름입니다.
아니면, 주류 언론의 대명사와도 같은 뉴욕타임스 칼럼을 번역하고 해설하는 저도 이미 정치적으로 다분히 편향된 색안경을 끼고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내년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순리대로’ 다시 당선되고,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온 뒤’ 주류 언론이 반복해 온 트럼프를 향한 “마녀사냥”을 되짚어 보는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