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죽음에서 멀어지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2023년 5월 15일  |  By:   |  SBS 프리미엄  |  No Comment

* 지난해 11월부터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2월 16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지난 6일 뉴욕타임스에는 의학 발전이 한 사람의 인생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소개됐습니다.

전문 번역: 더 오래 살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준비해야 할 일들

 

1988년 태어난 몰리 팸은 열 살이 되던 해, 당시로서는 서른 살을 넘기기 어렵다고 알려진 낭포성 섬유증 진단을 받습니다. 그러나 몰리는 최선을 다해 살았고, 프리랜서 요리사가 되었으며,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고 결혼도 했습니다. 서른 살이 되기 전 예상대로 몰리의 폐는 망가졌고, 그녀는 폐 이식을 준비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2019년 트리카프타라는 약이 등장했고, 이제 낭포성 섬유증 환자들은 60대까지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흔한 현대과학과 의학의 성공담입니다. 말기 질환으로 분류되던 낭포성 섬유증은 만성질환으로 바뀌었고, 몰리와 같은 환자들에게는 30년 정도를 더 살 수 있게 됐습니다.

 

죽음으로부터 탈출하는 속도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두 가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줍니다. 하나는 의학의 발전 덕분에 사람들의 수명이 늘어나고, 더 많은 시간이 주어진다는 익숙한 사실입니다. 여기에는 우리도 포함됩니다. 예를 들어 암에 걸린 이의 5년 생존율은 지난 30년 사이 40%에서 70%로 높아졌습니다. 물론 암의 종류에 따라, 그리고 진행 단계에 따라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생존율이 올라가는 것은 단순히 몇 년의 시간을 더 버는 데 그치는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트리카프타는 몰리와 같은 이들에게 30년의 수명을 더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30년이 30년에서 끝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30년은 낭포성 섬유증을 포함한 의학계 전체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곧 몰리는 70세와 80세를 넘어 100세까지 살아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낭포성 섬유증의 예에서 보는 것처럼, 우리가 어떤 질병이나 노화를 피해 단 몇 년이라도 더 살 수 있게 된다면, 그 몇 년 사이에 새로운 기술이 나타나 다시 남은 수명을 더 늘려줄 가능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은 ‘영생‘이라는 극히 비현실적이며 환상적으로 들리는 개념을 현실로 가져옵니다. 어느 순간, 생명공학 기술이 수명을 늘리는 속도가 노화의 속도보다 빨라지게 될 때 사람은 죽지 않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는 ‘죽음으로부터 탈출하는 속도’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계획하는 일

물론 영생이 가까운 시일 내에 올 수 있을지, 아니면 아주 늦게라도 과연 올 수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기대수명은 지구에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계속 증가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칼럼 본문에서도 던진 것처럼 더욱 중요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바로, 미래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미래를 계획해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몰리의 경우 열 살 때부터 서른 살을 넘기기 어렵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몰리가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했을까요? 즐겁고 행복한 학생 시절을 보내는 데 집중하는 것이 더 나은 판단이지 않았을까요? 기대수명이 60대로 늘어난 지금도 몰리는 여전히 노후를 위해 얼마나 저축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도 비슷한 질문과 고민을 늘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40대나 50대의 사람들이 치아 교정이나 눈 성형을 고민할 때 자신의 기대수명이 70세인지 아니면 100세인지는 매우 큰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보험으로 재정을 보조해야 하는가 하는 좀 더 제도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오늘에 최선을 다하기와 죽음을 생각하기

사실 이 문제는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내일 유성이 떨어져 지구가 멸망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다음 주가 마감인 과제를 위해 밤을 새울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보다는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시간을 아름답게 보내려 하겠지요. 문제는 미래는 불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론적으로 생각해보면 답이 있기는 합니다. 미래에 일어날 커다란 사건들의 확률을 계산하고 자신의 선호를 고려해 종합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이죠. 물론 그 확률들을 계산하는 것은 고사하고, 자신의 선호를 제대로 아는 것부터 쉽지 않은 일이라서 또 문제이긴 합니다.

두 가지 격언이 떠오르네요. 하나는 내일 지구가 멸망할지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입니다. 저는 이런 의연한 태도에 끌립니다. 직업 정신이나 장인 정신, 존재의 이유(Raison d’être) 같은 단어도 생각납니다. 다른 하나는 메멘토 모리, 곧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이지요. 당장 내일 너에게 죽음이 찾아온다면 지금 하는 그 일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은 죽음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두 말은 얼핏 다른 의미를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내일 죽는다 해도 부끄럽지 않게 오늘을 보내라는 의미에서는 통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