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아카데미상과 성별격차
2022년 5월 25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지난 2월 열린 제94회 아카데미상은 배우 윌 스미스가 코미디언 크리스 락을 생방송 중에 폭행한 사건에 다른 모든 이슈가 덮여버린 해로 기억될 겁니다. 그래서 어쩌면 아카데미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들을 되돌아보는 일이 소중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글은 2월 9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쓴 글입니다.

 

미국 현지 시각으로 오늘(8일) 아침, 제94회 아카데미상 후보 명단이 발표되었습니다. 작품상을 비롯해 총 12개 부문 후보에 오른 “파워 오브 도그”의 감독 제인 캠피언 감독은 1994년에 이어 생애 두 번째로 감독상 후보에 오르는 명예를 누리게 됐습니다. 그러나 100년 가까운 아카데미상 역사에서 감독상 후보에 이름을 올린 여성은 캠피언을 포함해 단 일곱 명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수상한 이는 캐서린 비글로(2010년, 허트 로커)와 클로이 자오(2021년, 노매드랜드) 두 사람뿐이죠.

영화계의 성별 격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세계 영화산업의 중심지 할리우드에서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역시 남성 중심, 백인 중심이라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물론 장기적인 시각에서 보면 다양성 부문에서도 나름 발전이 있었지만, 변화는 기대만큼 빠르지 않습니다. 당장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에 도전한 276편의 장편영화 가운데 여성이 감독한 영화는 27.1%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던 작년(27.3%)보다 오히려 줄어들었죠. 상대적으로 여성 감독이 강세를 보였던 다큐멘터리 부문(46%->43%)이나, 국제영화상 부문(35%->24%)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나마 애니메이션 부문에서는 여성 감독의 이름이 하나라도 들어간 작품의 수가 작년(27편 중 2편)보다 크게(23편 중 6편) 늘었습니다.

아카데미상에 출품한 작품 가운데 여성이 감독한 영화의 비율.

2017년 유럽위원회가 영화계에서 2020년까지 (성비) 50:50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던 유럽의 상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작년 제78회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출품된 총 3500편의 작품 가운데, 여성 감독의 작품은 29%에 그쳤습니다. 베니스에서도 마찬가지로 올해는 그 비율이 더 떨어졌고(24.6%), 경쟁 부문의 여성 감독 비율은 그보다 더 낮은 수준입니다.

영화계의 성별 격차는 감독 성비에서만 드러나는 게 아닙니다. 영화 주인공은 대부분 남성이고, 여성들은 보조적인 역할에 그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여러 한계가 지적되고는 있지만, “이름을 가진 여성 등장인물 두 사람이 남성 이외의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지”로 통과 여부를 가리던 벡델 테스트가 등장한 것도 이런 배경 때문입니다. 여성 배우들은 남성 동료에 비해 낮은 출연료는 물론, 하비 와인스틴 성범죄 사건이 보여주듯 적대적이고 위험한 환경이라는 추가적인 부담을 안고 일해왔습니다. 데뷔작으로 성공을 거두고 인정을 받더라도 여성 등 소수자 감독에게는 다음 단계로 도약할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는다는 현실도 지적된 바 있습니다.

변화의 기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회 전반의 성평등 강화와 인식 변화로 새로운 세대의 젊은 여성들이 더 의욕적으로 남성 중심 분야에 도전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영화계도 예외가 아닙니다. 작년 베니스 국제영화제의 대학생 영화 부문에서는 여성 감독의 작품이 67%로 절반을 훌쩍 넘어섰죠. 업계의 지형 변화가 뜻밖의 변화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최근 애틀란틱에 실린 기사를 보면, 스트리밍 시장의 성장과 OTT 업체 간 경쟁 심화로 드라마들이 쏟아지면서 여성 배우에게 과거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기회도 많아졌습니다.

전통적으로 할리우드의 여성 배우들은 20대에 스타로 큰 주목을 받아도 40대에 진입하는 순간 커리어가 끊겨 버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차별과 나이 차별이라는 이중고를 겪은 거죠. 동년배 남성 배우들이 경륜을 바탕으로 더욱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승승장구할 때, 여성에게는 아내나 엄마 역할밖에는 돌아오지 않았죠. 메릴 스트립 같은 대배우도 50대 이후에 주어진 역할은 “고르곤이나 드래곤, 아니면 어딘가 그로테스크한 역할” 뿐이었다고 토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스트리밍 시장의 확대로 제작되는 작품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보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만들어지면서, 예전 기준으로는 “한물 간” 나이의 배우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습니다. 특히 여러 시즌 이어지는 드라마는 영화보다 상대적으로 호흡이 길고 등장인물도 많기 때문에, 다양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할 여지도 큽니다.

영화는 시대상을 반영할 뿐 아니라, 인기 있는 대중 예술로서 대중의 인식에도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다음 달 27일 열릴 제94회 아카데미상이, 또 내년, 후년의 영화계가 어떤 변화를 보일지, 기준이 될 만한 몇몇 수치를 비교해가며 지켜보는 것도 또 하나의 관전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