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페미니즘 연극영화 만들기, 벡델 테스트가 전부는 아닙니다
2016년 8월 24일  |  By:   |  문화, 세계, 정치  |  No Comment

그래픽노블 작가인 앨리슨 벡델이 1985년 고안해낸 벡델 테스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제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렸습니다.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영화 속에서 이름이 있는 여성 캐릭터 두 사람이 남성 이외의 주제로 대화를 나누어야 하죠. 영화 속 젠더 불평등을 파악할 수 있는 지표입니다. 요즘은 연극에도 같은 잣대를 대보는 캠페인도 있더군요.

그러나 영화나 연극 속 페미니즘을 오로지 이 기준만으로 논하는 것은 조금 우려스럽습니다. 벡델 본인도 의도했던 바가 아니죠. 놀랍도록 퇴행적인 여성상을 보여줬던 “트와일라잇”은 벨라와 엄마의 대화 장면 덕에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만, 용감하고 똑똑하며 흥미로운 여주인공이 나오는 그래비티는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니까요. 때로는 두 여성이 남자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 내용이 여성주의적일 수도 있고요.

심지어는 남성과의 연애나 섹스에 대한 대화마저도 여성주의적일 수 있습니다. 남성을 사귀는 것 자체에 반페미니즘적인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어떻게 하면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연애 관계에서 평등을 추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페미니스트와 사귀는 법(How to Date a Feminist)”이라는 연극을 쓰면서, 이런 이유로 제 연극이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할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저는 여성주의적 연극을 만들 수 있는 다른 방법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습니다. 무대에 서는 배우의 39%, 극작가의 32%, 연출가의 39%만이 여성인 현재 영국 연극판의 불평등 덕분에 스핑크스 테스트 라는 것이 등장했죠. “무대 중앙에 여성이 있는가?”, “여성 캐릭터가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인가?”, “여성 캐릭터가 호소력이 있고 복잡한 인물인가?” 등 극작가가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는 질문들로 구성된 테스트입니다.

저도 연극을 쓰면서 자문하곤 합니다. 등장인물 중 여성 비율은 어느 정도인가, 대화 중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여성이 스스로 선택을 하는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가, 스토리가 여성에게 힘을 실어주는가 아니면 여성을 벌하는가, 주제가 여성들, 또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사를 다루는가, 연극이 현상 유지를 옹호하는가 아니면 관객들에게 변화를 꿈꾸게 하는가 등 다양한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코미디라면 여성이 웃긴 대사를 하는가도 제겐 중요한 문제입니다. 코미디 연극에서 위트는 남성 캐릭터들이 독점하고, 진지한 여성 캐릭터는 영원히 고통받는 전통적인 구조를 저는 매우 경계합니다. 페미니즘은 재미있을 수 없다는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연극을 쓰고싶지 않으니까요.

각본이 완성되어 제작 단계에 들어가도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합니다. 연출가가 여성주의적 렌즈를 통해 각본을 재해석하거나, 성별을 정해놓지 않은 캐스팅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제작진 중 여성 비중은 어느 정도인가, 리허설 과정에서 여성들이 존중을 받는가, 배우들이 불편하게 여기는 의상은 없는가도 중요한 문제죠. 연극을 홍보하는 방식도 중요합니다. 제 작품도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너무 직설적이고, 정치적이며, 재미없게 들리니 제목을 바꾸면 안되겠냐는 제작자를 여럿 만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저는 그 단어를 제목에서 빼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대 조명이 켜지기도 전에 연극의 주제를 드러낼 수 있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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