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테라노스 재판, 실리콘밸리 문화를 바꿀까?
테라노스(Theranos)라는 회사를 아시나요? 한때 전 세계 의료 산업을 이끌 기술 혁신의 상징으로 주목받던 테라노스와 창업자 엘리자베스 홈즈(Elizabeth Holmes)는 이제 “희대의 사기극”의 주인공으로 전락했습니다. 지난해 9월 홈즈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면서, 테라노스의 흥망성쇠, 홈즈의 운명, 그리고 실리콘밸리 문화 전반에 대한 이야기들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엘리자베스 홈즈는 2003년, 약관의 나이도 되기 전인 19세에 스탠포드 대학을 중퇴하고 테라노스를 창업했습니다. 간단한 혈액 검사로 수천 가지 질병을 진단할 수 있는 키트가 테라노스를 이끌 상품이었죠. 홈즈는 자신이 “헬스케어계의 아이팟”이라고 명한 혁신적인 기술을 통해 의료산업의 판도를 바꾸겠다는 비전을 밝혔고, 스티브 잡스를 벤치마킹한 패션과 국가 정상을 방불케 하는 경호, 여기에 저명인사들과의 친분까지 더해 개인적인 유명세를 누렸죠. 테라노스는 7억 달러에 이르는 돈을 투자받았고, 한때 회사 가치는 90억 달러, 우리돈 10조 원에 달하기도 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유명한 창업자들이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회사를 망친 사례는 다양합니다. 최근의 사례만 보아도 위워크(WeWork)를 파산 위기에 처하게 한 애덤 뉴먼(Adam Neumann), 성추행 스캔들로 물러난 우버(Uber) CEO 트래비스 캘러닉(Travis Kalanick), 청소년 전자담배 열풍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한 줄스(Juul)의 케빈 번스(Kevin Burns)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민사소송을 당해 합의금을 물어주고 평판과 커리어를 잃은 사례는 많지만, 형사 고발을 당하거나 징역형을 받은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성차별적, 남성 중심적 문화를 비판해 온 레딧(Reddit)의 전 CEO 엘렌 파오(Ellen Pao)는 홈즈가 극적으로 추락한 배경에도 성차별적인 요소가 존재한다고 지적합니다.
실리콘밸리의 “하이 리스크, 하이 리워드(high risk, high reward) 문화, 즉 높은 위험과 높은 보상을 추구하는 경향,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느 정도 허풍과 허세가 용인되고, 나아가 장려되는 문화(“fake it till you make it”)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 홈즈 개인이 특출난 악인이라기보다 이런 토양의 산물이라는 주장이죠.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 검사 출신의 전문가들은 홈즈의 경우 투자를 받기 위해 홍보한 기술이 실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 적당히 과장한 정도가 아니라 거짓말이 지나쳤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테라노스가 고객의 건강, 생명과 직결된 헬스케어 기업이라 죄가 더 무겁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모든 사기 범죄가 그러하듯 관건은 홈즈가 자신의 행위를 사기라고 인식하고 있었는지, 즉 사기를 칠 의도가 있었는지 증명하는 것입니다. 수익 전망을 과장하거나 불투명하고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기업을 운영하는 것만으로는 연방법에 따른 사기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검찰 측은 확보한 이메일, 문자, 증언 등을 통해 이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반면 변호인 측은 이 사건이 단순히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스타트업의 실패담일 뿐이며, 홈즈가 비전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다가 실패한 것은 범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판결이 가져올 후폭풍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립니다. 한편에서는 홈즈의 사례를 거울삼아 실리콘밸리의 기업 문화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또 한편에서는 잠재적인 창업자들을 위축시키는 유죄 판결은 창의성과 생산성에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우려도 있습니다. 실리콘밸리의 창업자들이 지금껏 법적인 특혜를 누려왔고, 검찰이 이번에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만만한 케이스를 골라 기소한 것일 뿐, 홈즈가 징역형을 살게 되는 정도로는 실리콘밸리의 부정적인 면이 전혀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시니컬한 의견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