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자본주의가 가장 마지막에 줄여야 하는 비용은 이것
2024년 5월 21일  |  By:   |  SBS 프리미엄  |  No Comment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4월 1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경영대학원 회계 수업에서 교수님은 늘 같은 질문으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이건 학생의 의견을 묻거나 토론을 위한 발제를 기대하고 하는 질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답이 정해져 있는, 전형적인 ‘답정너’ 문항이었죠.

“주주 이익의 극대화입니다.”

“좋아요. 그럼 다음 질문…”

적어도 그 수업 시간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정해진 답을 외우듯 뱉어내야만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고, 비로소 그날의 수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회계 수업은 어찌어찌 수료했지만, “이 명제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이 수업을 들을 수 없다”며, 매시간 읊어야 했던 ‘주어진 정답’을 저는 그때도, 지금도 온전히 수긍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주주 이익의 극대화”

자본주의, 시장 경제라고 가치를 창출하고 이윤을 나눠 갖는 방식이 다 같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기업의 존재 이유를 “주주 이익의 극대화”로 이해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가장 가까운 나라가 있다면 바로 미국일 겁니다. 기업을 경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방식으로써 주식회사는 대단한 발명품이었습니다. 미국 경제가 이만한 발전을 이룩하는 데 주식회사 제도가 기여한 바는 절대 작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한,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다른 모든 가치보다 우선에 놓음으로써 발생한 부작용과 문제도 적지 않습니다.

나라마다, 사회마다, 문화에 따라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희생해도 괜찮은 것들은 같지 않습니다. 변화를 통해 혁신을 추구하는 건 대개 어디서나 장려할 만한 일로 여겨지지만, 누구나 그 과정에서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변화가 무조건 좋다는 신화에 가까운 믿음이 팽배한 미국에서 지난해부터 종종 관찰되는 현상 중 하나가 빅테크 기업에서 시작해 테크 기업 전반으로 퍼진 구조조정, 그에 따른 대량 해고 열풍이었습니다. 미국은 원래 노동자 입장에서 볼 때 고용 안정성이 매우 낮은 나라이긴 합니다. (여기에 사회 안전망도 부족해서 문제죠.) 그러나 최근 테크 기업들의 구조조정은 “경기가 안 좋아서”, “긴축 경영이 불가피해서”, “고통 분담 차원에서”와 같은 예의 뻔한 이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올해 들어서는 “경기가 더는 나쁘지 않은데”, 그래서 “긴축 경영을 할 이유도 딱히 없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미국 기업들은 상시 구조조정을 이야기하며, 추가로 더 많은 해고를 예고하고 있습니다. “분담할 고통”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해고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걸 보면, 최근의 잇따른 해고 바람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리더십 전문가로서 오랫동안 컨설턴트로 일했고, 시스코 시스템즈의 임원을 지내기도 했던 경영 부문 작가 애슐리 구달은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주주 자본주의의 원칙이 선을 넘을 만큼 너무 강조돼 탈이 났다고 지적합니다.

전문 번역: 인간을 ‘믹서기 속의 삶’으로 몰아넣는 테크업계의 또 다른 유행

 

물론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변화가 불가피한 순간이 자주 있을 겁니다. 특히 미국 시장은 경쟁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곳인 만큼 환경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고 변화가 필요할 때 굼떴다가는 기업의 생존이 위협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만큼 더 멀리 내다봐야 하는 경영진이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도 많습니다. ‘변화와 혁신’의 좋은 본보기로 찬사 받는 기업의 사례들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그렇지만 기업이 세상의 전부는 아닙니다. 기업은 아무리 중요해도 사회라는 집을 떠받치는 기둥, 사회라는 자동차를 굴리는 엔진일 뿐입니다. 설사 기업이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명제가 맞다고 해도, 세상 사람의 목표가 기업의 목표와 일치해야 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주주가 아닌 사람들이 부당하게 손해를 보고 희생당한다면, 사회 전체적으로는 이를 조정하고 중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주 이익의 극대화를 외치다가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은 없는지,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우를 범하는 일은 없는지 늘 살펴야 합니다.

주객이 뒤바뀌면 실질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구달이 칼럼에서 지적한 것처럼 잇단 구조조정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인건비를 줄여 일시적으로 주가를 뻥튀기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한창 일해야 할 직원들이 불확실성에 갈팡질팡하게 된다면 조직은 아무것도 못하고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될 겁니다. 결국, 조금만 멀리 내다봐도 효율성이 전혀 없는 악수를 두게 만드는 것이 경영진의 인센티브 구조 탓이라면 그 구조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경영진의 성과급이 단기적인 어느 시점의 주가에 연동된다면 경영진이 1년 뒤, 10년 뒤를 내다보고 결정을 내리기를 기대할 수 없을 겁니다.

 

최근 사고 잇따른 보잉도 주객이 뒤바뀐 사례 아닐까?

최근 뉴스에 자주 등장하는 비행기 제조사 보잉의 사례는 주객이 바뀐 대표적인 예로 보입니다. 물론 최근 발생한 보잉 비행기 안전사고의 원인이 최종적으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에 알려진 정황을 토대로 한 추측에 불과하지만, 엔지니어들이 회사의 중요한 결정을 내리던 ‘좋은 시절의 보잉’은 비용 절감과 효율성 제고, 그로 인한 주주 이익 극대화만을 고려한 회사와 합병 이후 전혀 다른 회사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커다란 비행기가 도대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는지 사실 저는 아직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비행기는 엄청난 기술이 집약된 복잡한 장치죠. 그런 장치를 제대로 만드는 일은 당연히 간단할 리 없습니다. 주주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비용을 줄여야 하는데, 비용 절감이란 목표에 몰두하다 보면 가장 먼저 거슬리는 것들이 안전 규제입니다.

보잉이 비행기를 건조하는 과정에서 있던 문제를 폭로한 보잉 출신 내부고발자 존 바넷 씨의 증언에 따르면, 보잉은 비행기 생산 기일을 맞추기 위해 규격에 맞지 않는 부품을 여기저기 썼고, 심지어 오래 기다려야 하는 새 부품 대신 폐품 처리장에서 떼온 낡은 부품을 가져다 쓴 적도 있다고 합니다. 비행 중에 사고가 났을 때 기내에 산소를 공급하는 시스템의 고장률이 25%에 이르렀다는 폭로도 있습니다.

부품 하나 잘못 끼워서 사고가 날 확률, 아주 드문 비상 상황에나 작동할 산소 시스템의 문제가 드러날 확률은 모두 매우 낮을 겁니다. 예를 들어 그 확률이 원칙을 다 지켰을 때 0.0001%인데, 원칙에 슬쩍 눈을 감는 대신 비용을 수백, 수천만 달러 아낄 수 있다면 보잉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요? 시장 논리를 신봉하는 이들은 주주 이익의 극대화만 고려해도 여기서 적절한 균형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할 겁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기체 결함으로 인해 항공기 안전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비행기를 만든 제조사의 주가는 폭락할 수밖에 없을 테니, 이를 고려해서 안전 점검을 소홀히 하지 않으리라는 거죠.

논리적으로는 빈틈이 없는 말이지만, 현실에서는 고려 사항이 좀 다릅니다. 특히 지금 미국처럼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게 인센티브 구조가 짜인 자본주의에서는 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비용을 줄이는 게 최선입니다. 규제 당국에 발각돼 벌금을 내지 않을 만큼만 하면 됩니다. 소비자를 비롯해 시장에 참여하는 더 많은 사람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주주 이익만큼이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안전, 고용 안정, 사회 안전망에 대한 고려는 낄 자리가 없습니다. 구달은 이를 두고 경영진, 이들에게 자문하는 컨설턴트, 금융기관과 애널리스트들,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자기들만의 세상에 갇혀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줄여야 하는 비용이 있다면?

사실 미국 노동자들에게 잦은 해고와 일터에서의 차별은 낯설지 않습니다. 대형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가운데 비정규직, 계약직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은 이미 여러모로 부당한 대우를 받지만 다른 대안이 없다는 소설가 아델 왈드먼의 칼럼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미 파편화된 채 거대한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한 긱 노동자들에게 노동자의 권리는 언급하는 것조차 사치로 느껴지는 세상이기도 합니다.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단결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은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실리콘밸리의 빅테크 기업에서 예고 없이 구조조정 대상으로 내몰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어쩌면 목소리를 모아내 정치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겁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수많은 원칙을 무력화한 채 범람하는 주주 자본주의 가치에 맞서 이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겁니다. “가장 마지막에 줄여야 하는 비용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건비”라고 말이죠.

회계 수업 시간에는 저 때문에 수업이 진도를 못 나가고 정체되면 안 되니 입 밖에 내지는 못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던 말을 지금도 혼자 합니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인류가 여기까지 발전하는 데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준 위대한 원칙이라고 해도 될 겁니다. 다만 단기적인 성과에 집착하는 식의 주주 자본주의가 유일한 정답이 될 필요는 없다, 그럴 수도 없다는 점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하고 싶었습니다. “주주 이익의 극대화”라는 원칙이 주는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정책이 가져올 결과와 효과를 염두에 두고 제도를 운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