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사이다 발언’에 박수 갈채? 그에 앞서 생각해 볼 두 가지 용기
2024년 6월 11일  |  By:   |  SBS 프리미엄  |  No Comment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4월 22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상대로 테러 공격을 벌인 뒤 그에 대한 반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군사 작전 혹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이 벌써 반년이 더 지났습니다. 평화적인 해결은커녕 잠시 총을 내려놓고 민간인들의 목숨부터 살리자는 휴전 논의도 번번이 무산되는 가운데 인도적 지원 활동을 펴던 구호단체 직원 7명이 이스라엘군의 명백한 실수로 숨지는 일도 있었고, 이란이 이스라엘을 향한 공격을 감행해 전선이 오히려 늘어날 조짐까지 보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 모두의 의견을 모아볼 수 있다면, 싸움을 멈추고 어떻게든 평화롭게 공존하는 법을 찾기 바라는 사람이 훨씬 더 많을 겁니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건 한쪽의 잘못과 책임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주장도 얼마든지 접할 수 있습니다. 편을 가르고 상대방에 더 큰 책임을 묻는 주장이 아무래도 언론에 더 많이 보도됩니다. 지금 세상은 마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한쪽 편에 서기를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미국에서도 평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부분이지만, 똑같이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도 문제의 원인을 다른 데서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저도 이스라엘 친구나 이스라엘에 가족이 있는 유대인 친구들도 있고, 팔레스타인 혹은 아랍계로서 이스라엘, 특히 네타냐후 총리의 배타적인 민족주의 정책을 강력히 규탄하는 친구들도 있다 보니, 평범한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전쟁 이야기가 나오면 항상 조심하게 됩니다.

이 글의 첫 문장에도 지금 상황을 전쟁으로 봐야 할지, 압도적인 군사력을 앞세운 이스라엘군의 일방적인 군사 작전으로 불러야 할지 확신하기 어려워서 두 가지 용어를 같이 썼습니다. 이스라엘 친구 앞에서 하마스가 벌인 테러를 조금이라도 두둔하는 것처럼 오해할 소지가 있는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고, 반대로 아랍 친구 앞에서는 이스라엘의 공격적인 정착촌 건설부터 가자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사실상의 민간인 학살을 간과하는 듯한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수많은 사람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사건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지금 이 순간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자연히 어느 쪽도 절대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번에 새삼 눈에 띄는 현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문제의 원인을 규탄하고 해결을 촉구하는 주장이 세상에 격문을 띄우는, ‘공개 서한(open letters)’의 형태로 세상에 나온다는 점입니다.

전문 번역: 끊임없이 쏟아내기만 했던 “공개서한”의 시대, 이제는 끝내자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 록산 게이가 “공개 서한의 시대”를 끝내자는 글을 썼습니다. 게이는 공개 서한의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오히려 해결책을 찾아가는 과정을 방해하기도 하는 등 한계가 명확하다고 지적합니다. 특히 요즘처럼 정치적 양극화가 극심해진 세상에서 상대방의 의견을 듣기보다 내 주장을 한 번 더 외치는 셈인 공개 서한의 범람은 갈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늘은 공개 서한과 정치적인 용기에 관해 생각해 보려 합니다.

 

내 주장을 밀어붙이는 용기

공개 서한은 분명할수록 좋습니다. 수신인도, 메시지도, 주장도, 그래서 뭐를 어떻게 하자는 구체적인 행동 지침까지 명시할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내가 주장하는 대로만 하면 해묵은 문제든 갑자기 불어닥친 문제든 말끔히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써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지지 서명을 받고 세간의 이목을 끌어 여론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을 테니까요.

색깔이 선명할 주장을 펴는 건 나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이야 환영할 일이지만, 반대로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무엇보다 내가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한 반대편 진영에서는 비난을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가 저들을 적으로 몰아붙일수록 저쪽 진영에서는 내가 적이 될 수밖에 없다 보니, 공개 서한을 쓰고 위험을 감수하며 목소리를 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공개 서한을 통해 편 주장에는 어느 정도 책임이 따르기도 합니다. 혼자서 머릿속으로 생각한 게 아니라, 또 친구들끼리만 주고받은 이야기가 아니라, 공론장에서 화두를 던지고 특정한 행동이나 변화를 촉구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합니다.

 

내 주장을 접고 타협하는 용기

그러나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용기는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 용기입니다. 바로 공개 서한을 통해 내 주장을 더 크게 내세우고 관철해 내는 용기가 아니라, 반대로 상대방 주장을 들어보고 내 주장을 일부 접고 양보하고, 상대방과 타협하는 용기입니다.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두고 물러설 수 없는 논쟁에서 지는 것이나 다름없는 양보와 타협을 용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방을 지워버리는 게 지상목표가 될 수밖에 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상황에선 상대방에게 발언권을 허락하는 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합니다.

양보와 타협을 용기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현실적인 해법을 찾기 위해 우리 편으로부터도 욕을 먹고 손가락질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개 서한을 통해 ‘강 대 강’으로 부딪치기만 해서는 지금의 문제가 하나도 해결되지 않습니다. 상대방 주장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내 주장만 펴고 상대방을 억압하려 하면, 우리 편 안에서야 “속 시원한 사이다”라는 극찬이 쏟아질지 모르지만, 그저 양쪽 진영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갇힌 반향실의 외벽이 두꺼워질 뿐입니다. 상대방이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라는 자극적인 주장을 펼수록, 상대편에서도 나와 (내 말에 열광하는) 우리 편을 마찬가지로 지워버리겠다고 할 겁니다.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통분모 찾기’

하마스의 테러가 발생하고 이스라엘군이 보복 작전에 돌입한 10월 각각 프린스턴대학교와 컬럼비아대학교의 공공정책 대학원장인 아마니 자말과 케렌 야르히밀로가 함께 쓴 칼럼에 대해 쓴 해설의 제목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공통분모 찾기'”였습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을 하기 위해 내디뎌야 하는 걸음걸음에는 당연히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말 교수와 야르히밀로 교수도 당연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문제를 바라보는 모든 시각이 같지 않습니다. 어쩌면 서로 생각이 다른 지점이 더 많아서 서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을 찾는 과정이 상당히 괴로웠을지도 모릅니다. 몇 다리만 건너면 하마스의 테러 공격으로, 그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반격으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를 알 만큼 둘은 서로 다른 편에 서 있습니다. 그런 이들이 지치지 않고, 공통분모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건 정말 박수받아 마땅한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정치의 본질도 내 주장을 관철하는 용기보다 내 주장을 접고 타협을 통해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는 용기를 더 크게 쳐줍니다. 정치는 본질적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일이 아닙니다. 사람의 생각을 정말로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거야말로 허무맹랑한 이야기일 겁니다. 그보다 생각이 달라도 서로 양보하고 합의할 수 있는 점을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정치가 제대로 작동할 때 나타나는 이상적인 기제일 겁니다.

타협은 정치적으로 비겁하다고 손가락질받을 일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 일부를 내려놓고 공존하는 법을 찾는 과정에서의 타협은 오히려 용기가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일 때가 많습니다. 공개 서한의 시대에 내 마이크를 절대 끄지 않고, 내 할 말만 되풀이하겠다는 고집이야말로 비겁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해결책을 찾기 위해선 상대방 주장을 먼저 들어야 하는데, 그에 필요한 용기를 내지 못해서 그저 내 주장만 되풀이하는 거라면, 그게 더 비겁한 일입니다.

타협할 각오로 내 주장을 접고 양보하고 상대방 말을 듣다 보면, 당장은 내가 손해보고 지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무언가 잔뜩 얹힌 것처럼 더부룩하고 불편해서 사이다가 그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불편함을 이겨내고 공통분모를 찾고 이를 넓혀가야 합니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이를 통해 달성할 수 있는 성과를 믿고 타협을 위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