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부자들의 일탈인가, 모험가의 비극일까… 잠수정 사고를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글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7월 5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1912년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해상 사고일 겁니다. 1,514명의 사망자를 낸 이 사건은 1997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 주연의 영화로 제작되어 당시 바다를 소재로 한 영화는 성공할 수 없다는 말을 무색하게 만들며 전무후무한 흥행으로 역대 흥행 1위에 올랐습니다.
사고가 발생한 지 111년이 지난 올해, 타이타닉호는 다시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됩니다. 바로 지난달 중순 타이타닉 호를 직접 관찰하기 위해 출항한 잠수정 타이탄 호가 잠수 1시간 45분 만에 연락이 두절되었고, 며칠 뒤 잔해가 발견되며 공식적으로 잠수정에 탄 이들이 사망한 것으로 결론 났기 때문입니다.
이 사건의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타이탄 호를 제작하고 관광상품을 판매한 오션게이트 익스페디션의 CEO 스탁턴 러시일 겁니다. 이는 그가 기존의 규제, 곧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여러 원칙을 따랐다면 이 비극을 막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지난 6월 28일 하버드의 역사학자인 나오미 오레스케스는 뉴욕타임스를 통해 안전은 혁신의 방해물이라는 러시의 생각이 적어도 심해 탐사에서는 틀렸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전문 번역: ‘타이타닉 관광’ 잠수정 타이탄호의 운명을 결정지은 속설
오레스케스는 러시가 인터뷰 중에 말한 “혁신은 정의상 시스템 외부에 있다”에 대해 실제 예를 들어가며 반박합니다. 곧, 미국 심해 탐사의 역사에서 주요한 진전의 예들은 미군과 정부 연구소 등 미국 정부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으며, 또 이들이 안전을 중요시한 결과 큰 사고 없이 꾸준히 혁신을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잠수정의 설계와 제작에 참여했고 이를 관광상품으로 사업화했을 뿐 아니라 직접 잠수정을 조종한 러시도 승객들과 같이 사망했다는 점에서 명백한 비극이지만, 동시에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기 좋은 면들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수심 4,000 미터에서 타이타닉 호를 직접 관찰하는 이 경험이 매우 고가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총 여행 시간은 8시간이며 실제 타이타닉을 관찰하는 시간은 길어야 1시간 남짓이었을 이 모험에 참가자들은 25만 달러, 우리 돈으로 3억 원이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대기하고 있는 이들이 많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는 말도 있다는 것입니다.
부유한 이들이 일반인이 하지 못하는 경험을 찾아 나서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취향을 통해 계급을 구별하려 한다는 부르디외의 구별 짓기 이론이나, 무용한 일에 매진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라는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왜 부유층이 수억 원에서 수백억 원에 이르는 비용을 내며 심해나 우주를 경험하려 하는지에 대한 한 가지 힌트를 줍니다.
게다가 이 세상의 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에 극도로 비정상적인 소비는 사회 전체의 비효율을 야기하며, 따라서 비난의 소재가 되기 쉽습니다. 지구 온난화라는 인류적 과소비의 결과를 나날이 체험하고 있는 오늘날은 더욱 그렇습니다. 특히, 그 소비의 근원에 혹시라도 일상에 무료함을 느낀 초상류층의 일탈적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면 더욱 그럴 겁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다른 시선도 있습니다. 바로 러시와 다른 탑승객들을 모험 정신을 지닌 탐험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망자 중의 한 명인 프랑스 인 폴 앙리 나졸레는 해군 잠수부 출신의 유명 탐험가로 타이타닉을 35회 이상 탐험한 전설적인 인물입니다. 러시 역시 지난해부터 같은 잠수정으로 10회 이상 타이타닉 탐험을 성공적으로 마쳤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이 단순히 안전 수칙을 지키지 않아서라고 비난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레나 코리아의 피처 디렉터인 박찬용 칼럼니스트는 SNS에서 이 관점을 이렇게 뭉클하게 표현했습니다. 곧, 궁극의 럭셔리는 한계에 도전하는 것이며, 한계에 도전하는 그 자체에 비합리적으로까지 보이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인류의 문명 자체가 바로 한계에 대한 도전과 극복의 역사라는 점을 지적하며,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목숨을 걸고 한계를 향해 간 이들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저도 여기에 동의합니다.
물론 여전히, 어떤 이들은 바로 그 부분, 곧 그렇게나 중요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무시한 규제와 안전 수칙이 있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제 문제는, 자신의 목숨은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바뀌고, 진정한 철학적 문제는 단 하나 자살이라는 카뮈의 말로 다시 돌아가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