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언제고 남성성이 끝내 ‘사망’한다면 그 부고기사는 어떤 내용일까
2023년 8월 18일  |  By:   |  SBS 프리미엄  |  No Comment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6월 26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뉴욕타임스에서 즐겨 읽는 코너 중 하나가 바로 부고(obituaries)란입니다. 사실 부고 기사는 단순히 누가, 언제, 몇 살을 일기로 숨졌다는 단순한 정보 이상으로 중요한 글입니다. 고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고인의 주변 사람들, 나아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끼친 사람인지 제대로 정리해 글을 쓰려면 웬만한 취재와 필력으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울 때가 많죠.

세상에 유명한 사람은 많고, 부고를 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그가 세상에 남긴 흔적, 품고 있는 이야기도 각양각색이겠죠. 한 해를 마무리할 때 그해 나온 부고 기사만 모아 봐도 지금 어떤 시대가 저물고 있는지 개략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번 달에도 늘 그렇듯 인상적인 글, 또 여러 경로로 들어본 적 있는 유명인의 삶을 돌아본 이야기가 부고로 실렸습니다. 그런데 저는 각각 따로 읽으면서 엮어볼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한 세 명의 죽음을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로스 두댓이 하나로 엮어 칼럼을 썼습니다.

전문 번역: 남성성을 상징하던 세 명의 죽음

 

‘남성성의 소외’라는 주제로 어쩌면 서로 관련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죽음을 하나로 묶어 낸 글입니다. 저는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를 제외하고는 아예 처음 들어봤거나 이름만 들어봤을 뿐 그 삶에 관해선 잘 몰랐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두댓의 칼럼에 관한 평가 대신 칼럼의 소재가 된 세 명에 대한 간략한 소개로 해설을 대신하려 합니다.

 

우나바머(Unabomber)

우나바머(Unabomber)란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1978년부터 1995년까지 미국 사회를 공포에 떨게 했던 희대의 테러리스트입니다. 우나바머는 주로 사제 폭탄을 우편물에 실어 보내는 공격 방식을 택했는데, 피해자들은 소포를 열어보다가 터진 폭탄에 손가락이 잘리거나 화상을 입거나 유독가스를 마셨습니다. 우나바머의 공격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3명이나 됩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초기에 주로 대학(University)교수와 항공사(Airlines) 경영진을 공격한 이 테러리스트에게 우나(University & Airlines의 앞 글자를 따 UNA)라는 분류 코드를 붙였습니다. 범인의 유형은 일찌감치 분류해 뒀지만, 우나바머를 잡기까지는 18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우나바머는 FBI가 체포하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린 테러리스트 중 한 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나바머는 1978년부터 1987년까지 매년 1~4건의 공격을 감행합니다. 그러다 유타주 솔트레이크시티의 한 컴퓨터 가게에서 점원과 눈이 마주쳤었는데, 그 인상착의를 기억한 점원의 신고로 몽타주가 배포되자, 이후 6년 동안은 공격을 멈췄다가 1993년 6월, 다시 두 차례 폭탄 테러를 벌입니다.

이어 1995년 4월, 우나바머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자신의 정체를 일부 드러냅니다.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언론에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 겁니다. 내용은 간단했습니다. “당신들이 내가 써서 보내는 성명서를 토씨 하나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신문에 실어준다면, 더는 사람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겁니다. 뉴욕타임스워싱턴포스트는 FBI와 협의한 끝에 6월에 우나바머가 보낸 3만 5천 자 분량의 성명서(manifesto)를 싣습니다.

성명서는 현대 사회가 “정치인, 대기업 경영인, 익명의 기술자, 관료들이 다른 모든 이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흔드는” 잘못된 사회로 치닫고 있다며, 현대인들이 “원시인”들은 겪지 않아도 됐던 우울증에 시달리는 이유도 여기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성명서에 따르면, 원시인은 “원시 자연(WILD nature)”에서 스스로 안전을 지키고 삶과 죽음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였습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저도 성명서가 있었다는 것 이상으로 그 내용을 자세히 소개하기는 어딘가 망설여집니다. 테러리스트의 억지 자기합리화를 그대로 실어주는 게 옳은가, 자칫 테러리스트의 협박에 굴복해 언론의 사명을 저버린 것처럼 비치지는 않을까 당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편집국도 고민을 거듭했을 겁니다. 실제로 적잖은 독자들이 짐작할 수 있는 이유로 그 결정을 맹렬히 비난했죠. 그러나 FBI는 성명서를 실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피해보다 더 클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다행히 범인이 원한대로 토씨 하나 바꾸지 않은 글 덕분에 FBI는 중요한 제보를 받습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철학과 교수 린다 패트릭이 성명서의 내용을 읽고는 남편에게 말합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당신이 말했던 그 연 끊었다는 친형이 쓴 글 같은데?”

패트릭 교수의 남편 데이비드 카진스키는 온라인에서 성명서를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딱 봐도 형이 쓴 글이 틀림없었죠. 형 테드는 인류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자연에 살겠다며, 가족과도 사실상 연을 끊고 몬태나주 숲속에 처박혀 있었습니다. 형이 사는 곳에 가본 적은 없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알고 있던 데이비드는 즉시 FBI에 이 사실을 알렸고, 이듬해 우나바머는 처음 범행을 저지른 지 18년 만에 체포됐습니다.

우나바머의 본명은 테드 카진스키였습니다. 1942년생 카진스키는 어려서부터 수학 천재였습니다. 또래보다 2년이나 월반했고, 16살에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죠. 나중에 알려진 바에 따르면 IQ도 167이었다고 합니다. 미시건 대학교에서 수학 박사를 받았는데, 남들은 잘 풀려고 들지 않는 문제에 천착해 그의 지도교수들은 카진스키가 연구하는 분야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미국에 10~12명밖에 없을 거라고 썼습니다. 어쨌든 그는 25살에 이미 UC버클리 조교수가 됐습니다. 교수로 임용된 지 얼마 안 된 1971년, 그는 일을 그만둡니다. 단지 교수직만 그만둔 게 아니라 아예 문명과 단절한 채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 은둔하며 살기 시작했죠.

카진스키의 성명서는 본인이 원한 만큼 긍정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습니다. 일부 극단적인 환경운동가들 사이에서만 진지하게 다뤄졌을 뿐 대다수 미국인은 카진스키를 사회성이 없는 은둔형 테러리스트, 사이코패스라고 여겼죠. 그러나 감옥에 갇힌 지 20년이 더 지난 2010년대 들어 카진스키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들은 맥락을 거세한 주장의 조각들을 모아 카진스키를 대단한 선각자로 떠받들었습니다.

실상은 망상에 사로잡혀 수십 년간 벌인 테러 공격으로 무고한 사람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수십 명에게 평생 가는 상처와 고통을 안겼으며, 수천만 명을 공포에 떨게 한 테러리스트일 뿐입니다. 카진스키는 감옥에서 오클라호마시티 정부 청사를 폭파하고 사형수로 살던 테러리스트 티모시 맥베이와 교류했고, 노르웨이의 한 섬에서 청년 수십 명을 살해한 테러리스트 아네르스 브레이빅은 자신의 범행 동기를 밝힌 성명서의 일부 구절을 우나바머의 성명서에서 빌려오기도 했습니다.

 

‘광대’ 베를루스코니

1990년대 이후 이탈리아 정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이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입니다. 그의 영향력은 단지 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 (9년) 총리직을 수행한 인물이라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성공한 언론 재벌 베를루스코니는 어마어마한 자신의 부를 이용해 이탈리아의 많은 것을 바꿔 놓았는데, 중도 우파 깃발을 달고 정치에 뛰어들고 나서는 정치 제도도 자기 멋대로 주물렀습니다. 부고 기사 가운데 그의 삶을 요약한 문단을 옮기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베를루스코니는 질릴 틈을 주지 않는 오락거리였다. 종종 색다른 소재를 가미한 베를루스코니의 오락은 때로는 희극이고 때로는 비극이었는데, 사람들은 끝내 그를 무대에서 끌어내렸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때마다 끈질기게 돌아오곤 했다. 경제학자들은 그가 이탈리아 경제를 바닥으로 내리꽂은 장본인으로 꼽는다. 정치학자들은 자신의 미디어 제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특히 TV로 유권자들의 눈과 귀를 가로막은 베를루스코니의 ‘반칙’에 주목한다. 타블로이드 신문 기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그는 늘 온갖 스캔들, 말실수, 속물근성으로 가득한 욕설, 야유, 성추행을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이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됐을 때 그를 베를루스코니에 비유했는데, 정작 그는 사석에서 자신을 도널드 트럼프와 비교하는 걸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금수저로 태어나 자기가 이룬 것은 사실상 없는 트럼프와 달리 베를루스코니는 실제로 자수성가한 인물이긴 합니다. 베를루스코니를 싫어하고 욕하던 사람들도 베를루스코니의 사업 수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죠. 특히 2021년 1월 6일 의사당 테러가 일어나자, 그는 “트럼프 대통령의 집권 4년의 기억을 더욱 암흑으로 몰아갈 사건”이라고 이를 정면으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폭력과 파괴로 가득한 세상을 그린 거장 매카시

현대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 코맥 매카시의 소설은 한결같이 폭력적이고 어둡습니다. 살인, 참수, 방화, 강간, 근친상간, 식인 풍습을 비롯해 현대사회에서 범죄가 되거나 문화적으로 금기시하는 것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소재로 쓰이는 작품이 많죠.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여러 차례 “원래 삶이란 유혈이 낭자하는 법이다. 모두가 조화롭게 어울려 사는 세상이 가능하다고 믿는 건 어리석고, 때론 위험하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1933년생인 매카시는 32살에 “과수원지기”로 등단합니다. 평단에서도 괜찮은 평을 받았고, 그의 글을 눈여겨 본 사람이 없지 않았지만,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기까지는 20년 가까운 세월이 걸립니다.  1985년 발표한 “피의 자오선(Blood Meridian)”으로 문학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매카시는 1992년 “모두 다 예쁜 말들(All the Pretty horses)”로 전미 도서상을 받습니다. 그리고 2007년에는 대재앙 이후의 지구를 배경으로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생존 서사를 그린 “로드(The Road)”로 퓰리처상을 받죠. “모두 다 예쁜 말들”과 “로드”는 모두 영화로 제작됐는데, 영화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건 (소설로는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No Country for Old Men)”입니다. 영화는 2008년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부고 기사와 함께 매카시의 죽음 이후 그의 팬들이 보내 온 편지, 일화들을 소개했습니다. 그의 소설을 감명깊게 읽고, 그의 문장을 좋아한 사람들이니 열정적으로 편지를 썼겠지만, “처음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 잊을 수 없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평생 여운을 남긴 명문” 등 칭찬 일색의 글을 보면 매카시는 평단은 물론이고 대중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소설가가 분명해 보입니다.

영세한 소규모, 독립출판사들이 경쟁하던 출판 시장이 대형 출판사들의 과점 체제로 재편되면서 매카시가 운 좋게 빛을 보게 됐다는 흥미로운 분석도 있습니다. 아무리 운이 좋아 더 많은 주목을 받았더라도 이렇게 많은 명작을 써낸 걸 보면 소설가 매카시는 분명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사라져가는 남성성에 대해 부고를 쓴다면

부고 기사가 난 인물 세 명에 관한 간략한 소개만 하려 했는데, 글을 다 쓰고 보니 부고 세 편을 읽고 남성성이라는 관통하는 주제를 읽어낸 로스 두댓의 통찰력이 인상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카진스키의 행동은 영웅은커녕 의적이 할 만한 일도 아닌, 할 줄 아는 거라고는 폭력에 기대는 것밖에 없는 히키코모리가 벌인 끔찍한 테러일 뿐입니다. 베를루스코니는 그런 범죄를 저지르진 않았지만, 사회적으로 점점 더 용인되지 않는 행동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지켜내려 애씀으로써 세상의 흐름에 역행한 인물로 기억될 겁니다.

매카시 본인의 삶은 범죄는커녕 스캔들과도 거리가 멀었지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 건 개인 매카시가 아니라 소설가 매카시이므로, 폭력과 파괴로 가득한 그의 소설 속 세계를 짚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문장과 서사 자체를 좋아하는 팬과 독자도 많겠지만, 어쨌든 그의 소설 속 세계관을 지탱하는 폭력과 파괴로 얼룩진 남성성의 사회는 카진스키가 이상적으로 그리던 “원시 자연(WILD nature)”과 닮은 점이 있습니다.

보통 부고 기사는 중요한 인물이 죽었을 때 쓰지만, 만약 남성성이라는 가치의 위축, 소멸에 관한 부고 기사를 쓴다면 오늘 소개한 세 명의 이름은 꼭 등장해야 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