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1등 뉴스’ ‘시청률 1위’ 앵커 해고는 무엇을 위한 결정이었나
2023년 6월 30일  |  By:   |  SBS 프리미엄  |  No Comment

*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5월 3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오늘날 미국 정치의 특징을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말이 “정치적 양극화”입니다. 서로 도무지 공통 분모를 찾지 못하는 진보와 보수가 사사건건 의견이 부딪칠 때마다 서로 불편해하며, 끝내 상대방을 적대시하기에 이르는 현상은 사실 한국 정치에서도 생소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치적 양극화의 정도를 따지자면, 특히 트럼프 시대 이후의 미국은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수준입니다. 이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매일 밤 송출되는 케이블 뉴스입니다.

미국의 케이블TV 시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급속도로 성장했습니다. 케이블 뉴스 채널도 덩달아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오랫동안 방송 뉴스에서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앵커나 기자의 의견은 철저히 배제해야 했습니다. 케이블 뉴스는 공중파 TV 뉴스가 지켜온 철칙을 과감히 깼습니다. 결국, 케이블 뉴스에서는 기자가 취재한 사실, 팩트보다 앵커가 전하는 의견이 더 중요하게 다뤄지기 시작합니다.

사실을 빈틈없이 취재하는 일은 무척 어렵습니다. 반면에 단단한 근거가 필요 없는 의견은 말 잘하는 앵커 한 명만 있으면 얼마든지 방송에 내보낼 수 있죠. 시청자들이 복잡한 사실을 이해하기보다 감정적인 환호나 분노를 일으키는 의견에 더 많이 반응하면서 케이블 뉴스는 점점 사람들이 알아야 하는 사실보다 사람들이 듣고 싶은 이야기로 채워집니다. ‘고구마’보다 ‘사이다’가 난무하는 뉴스가 됐고, 의견이 비슷한 이들끼리만 모이는 거대한 반향실이 굳어졌죠. 복잡한 사건의 다양한 측면을 이해하고 이를 쉽게 풀어 전달하는 능력보다 시청자들이 듣고 싶은 말을 시원하게 해주는 능력이 케이블 뉴스 앵커에게 필요한 덕목이 됐습니다.

 

뉴스이길 포기하고 “1등 뉴스” 된 폭스의 간판 앵커 터커 칼슨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은 1996년 폭스 뉴스를 통해 케이블 뉴스 시장에 진출했고, 시청률과 수익 면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둡니다. 2016년, 폭스 뉴스의 CEO 로저 아일스가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해고된 뒤 임시 CEO와 폭스 뉴스 사장을 지내기도 했던 머독은 여전히 자신의 미디어 제국을 총괄하는 모기업 뉴스 코퍼레이션(News Corp)의 총수를 맡고 있습니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사이다 방송’은 폭스가 케이블 뉴스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큰 성공을 거둔 결정적인 비결이었습니다. 사실보다 의견을 더 비중 있게 다루는 뉴스 비평과 토론 프로그램을 잇따라 선보인 폭스는 전통적인 의미에선 뉴스라 부르기 어려운 뉴스로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케이블 뉴스 가운데 (시청률과 수익에서) “1등 뉴스”가 됩니다.

이후 다른 케이블 뉴스들도 정치 성향은 달랐지만, 앵커의 주장과 비평을 점점 더 많이 실으면서 폭스 뉴스를 따라 했습니다. MSNBC의 레이첼 메도우, CNN의 앤더슨 쿠퍼 등은 특종 보도로 유명한 기자가 아니라, 확고한 관점을 토대로 뉴스를 전달해 주는 유명 앵커입니다. 그리고 터커 칼슨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함께 폭스 뉴스 주변부에서 단숨에 메인 앵커로 발돋움한 인물입니다.

터커 칼슨은 사실 여러 방송사를 떠돌던 변변치 못한 방송인, 진행자였습니다. 2009년, 폭스로 적을 옮긴 뒤에도 주력 방송이라고 하기 어려운 주말 아침 방송 앵커를 전전하는 등 그저 그런 커리어를 이어가던 그에게 2016년은 말 그대로 운수대통의 해였습니다. 도널드 트럼프 덕분이었습니다.

미국에는 언론이 선거에서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가 없습니다. 신문사들도 사실과 의견을 구분한다는 자체 선거 보도 원칙을 세워두고 따르는 동시에 사설을 통해 특정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곤 하죠. 애초에 사실보다 의견을 더 비중 있게 다루던 케이블 뉴스 폭스 내부에선 2016년 공화당 경선 초반, 어떤 후보를 밀어줄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집니다. 시청자 대부분이 보수 성향이고, 공화당 지지자가 많은 폭스 뉴스가 어떤 공화당 후보를 밀어주느냐는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런데 경선 초반만 해도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사람이 폭스 안의 그 많은 앵커, 방송인 중에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때 터커 칼슨이 손을 듭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당시만 해도 트럼프를 진지한 후보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터커 칼슨은 그렇게 폭스 안에서 트럼프 대변인이 됐습니다. 그간의 경력을 거치며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가 공화당 안에서 먹힐 수 있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칼슨도 트럼프의 돌풍을 확신하거나 정확히 예측했던 건 아닙니다. 운이 좋았던 거죠. 그것도 보통 운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아시다시피 공화당 후보가 된 트럼프는 본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꺾고 대통령에 당선됩니다. 폭스로서는 하마터면 미국 대통령이 될 위인을 일찌감치 못 알아본 무능한 방송사로 낙인찍힐 뻔했던 걸 칼슨이 구해준 셈입니다. 루퍼트 머독은 칼슨에게 큰 상을 줍니다. 폭스 뉴스의 주중 프라임타임 8시 뉴스 앵커를 칼슨에게 맡긴 겁니다. 트럼프가 당선된 지 엿새 뒤인 11월 14일, “터커 칼슨 투나잇”이 첫 방송됐습니다.

 

정치적 중립은커녕…

폭스 뉴스가 정치적인 중립을 지키면 그게 뉴스거리일 겁니다. 비단 폭스뿐 아니라 다른 케이블 뉴스 채널도 마찬가지입니다. 케이블 뉴스의 보도는 사실보다 논평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러니까 터커 칼슨이 자신의 뉴스를 트럼프를 옹호하고 찬미하는 이야기로 도배하는 건 전혀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오히려 폭스 뉴스가 메인 뉴스 앵커를 맡긴 건 정확히 그거 하라고 시킨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야 트럼프 지지자들을 폭스의 충성스러운 시청자로 묶어둘 수 있고, 시청률은 곧 광고비 수익과 직결되니까요.

칼슨은 일찌감치 폭스 안에서 트럼프를 대변하기도 했지만, 트럼프 지지자들의 심리를 정확히 읽고, 그들이 분노할 만한 대상을 기막히게 골라내 좌표를 찍어줬으며, 동시에 그들이 걱정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어내기도 했습니다. 트럼프 지지자에 한해서라면 시청자를 울리고 웃기며, 능수능란하게 들었다 놨다 하는 데 칼슨만 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칼슨이 폭스의 대표 트럼프 치어리더 역할을 너무 잘하다 보니 자연히 문제가 생깁니다. 칼슨이 폭스 뉴스 앵커를 넘어 점점 더 공화당의 중요한 의사 결정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겁니다. 이는 정치 경력이 짧았던 트럼프 주변에 전략가가 없고, 모든 걸 혼자서 즉흥적으로 결정하던 트럼프의 속성 탓에 불거진 문제이기도 합니다. 트럼프 지지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건 아주 큰 힘이었습니다.

트럼프에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 터커 칼슨 투나잇에 출연하려고 줄을 섰습니다. 거물급 정치인을 불러다 놓고 칼슨은 거침없이 자기 의견을 말합니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자기 목소리를 대변하는 터커 칼슨에게 열광합니다. 예를 들어 텍사스주의 그렉 애봇 주지사가 출연했을 때 칼슨은 불법 이민자 문제에 관해 목소리를 높이며, 애봇 주지사에게 왜 주 방위군을 동원해 국경 지역의 치안을 강화하지 않느냐고 따져 물었습니다. 주 방위군의 통수권은 주지사에게 있습니다. 방송이 나가고 며칠 뒤 텍사스주 방위군은 국경 지역에 급파됐습니다.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지난해 라티노 이민자들을 비행기에 태워 마사스비냐드(Martha’s Vineyard)에 떨구고 돌아와 버린 일로 화제의 중심에 섰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민주당을 지지하는 북동부 부자 동네에 불법 이민자를 보내 ‘너희도 남부 주들이 겪는 어려움을 한번 겪어 보라’는 메시지를 던진 겁니다. 예상대로 보수 진영은 환호했고, 진보 진영은 전형적인 포퓰리즘이자 이민자들의 인권을 무시한 처사라며 격분했습니다. 그런데 드산티스 주지사는 이 모든 아이디어를 다름 아닌 터커 칼슨에게서 얻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공화당은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하원 다수당이 되고도 올해 초 하원의장을 뽑는 과정에서 엄청난 진통을 겪습니다. 단독 후보로 나선 케빈 매카시 의원이 트럼프 지지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위선적인 진보 엘리트’들과 너무 사이가 좋다는 점을 극우 성향 의원들이 문제 삼으며 끝까지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매카시 의원에게 분명히 요구할 건 요구해야 한다며 매일 방송에서 이들을 공개적으로 사주한 것도 터커 칼슨이었습니다. 권력을 다른 이에게 의사와 관계없이 내가 원하는 행동을 시킬 수 있는 힘으로 정의한다면, 터커 칼슨은 공화당 안에서 손꼽는 권력자로 군림해 온 셈입니다.

 

표리부동, 거짓말 방송은 괜찮지만…

2020년 대선에서 트럼프는 패배했지만, 터커 칼슨은 폭스 뉴스의 메인 앵커이자 아이콘으로 남습니다. “터커 칼슨 투나잇”은 자연히 야인이 된 트럼프와 공화당 안에서도 트럼프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의 창구가 되어 2020년 대선 부정 선거나 1월 6일 의사당 테러를 둘러싼 각종 음모론,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 워싱턴의 기득권 엘리트, 외국인을 향한 혐오와 공격의 온상이 됩니다. 그러다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즈(Dominion Voting Systems)와 폭스 뉴스 사이의 소송이 벌어지면서 터커 칼슨은 순식간에 궁지에 몰립니다.

도미니언은 미국 선거에 사용하는 투표 기계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폭스 뉴스를 비롯한 친트럼프, 극우 언론들은 2020년 선거에서 트럼프가 패한 뒤 개표, 검표 과정에서 대대적인 부정행위가 있었으며, 투표 기계에도 결함이 있어 결과가 날조됐다는 근거 없는 음모론을 마구 퍼뜨렸습니다. 터커 칼슨도 당연히 여기에 목소리를 보탠 이 중 하나였죠.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즈는 명예훼손 혐의로 폭스 뉴스를 고소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를 대단히 중요시하는 미국에서 명예훼손 소송은 대개 원고가 승소하기 어려운데,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법정에서 채택한 근거들이 확실해서 폭스 뉴스의 패소를 점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양측은 결국 7억 8,750만 달러, 약 1조 원의 손해배상에 합의합니다. 폭스 뉴스가 가짜뉴스를 퍼뜨리며 도미니언 보팅 시스템즈의 명예를 훼손한 잘못을 인정한 겁니다.

소송 과정에서 밝혀진 터커 칼슨과 동료들의 이메일, 문자 메시지를 보면, 터커 칼슨은 음모론을 대부분 믿지 않았습니다. 터무니없는 중상모략이라는 걸 알면서도 방송에서는 버젓이 음모론을 확대, 재생산했으니, 시청자를 기만한 셈입니다. 전형적인 표리부동이자 위선이지만, 사실 폭스 뉴스와 머독은 칼슨이 방송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데는 크게 개의치 않는 듯합니다. 중요한 건 시청자들을 계속 붙잡아 두는 것이고, 그러려면 시청자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누군가는 계속 해야 광고비도, 구독료도 받을 수 있으니까요.

어쩌면 칼슨이 루퍼트 머독을 비롯한 폭스 뉴스 경영진을 싸잡아 욕하거나,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난하고 욕한 내용이 소송 과정에서 함께 공개됐는데, 이것이 루퍼트 머독의 역린을 건드렸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칼슨이 갑작스레 해고된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여기에 폭스 뉴스 안에서 칼슨의 동료였던 PD, 스태프, 기자 중에 칼슨으로부터 성적 모욕, 성추행당했다는 이들이 나와 칼슨을 고소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평소에 사석은 말할 것도 없고, 방송에서도 버젓이 성범죄 혐의를 받고도 남을 발언을 해온 칼슨이므로, 이런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놀랍지는 않지만, 어쨌든 폭스 측에는 칼슨을 해고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긴 셈입니다.

정치적인 선동이든 거짓말이든 시청률만 잘 나오면 뉴스에서 무슨 말을 해도 되지만, 온 일터를 일하기 끔찍한 곳으로 만드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으므로 해고를 결정했을 수 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터커 칼슨은 그렇게 시청자들과 작별 인사도 못 하고, 앵커 자리에서 쫓겨났습니다.

전문번역: 부동의 시청률 1위 앵커를 하루아침에 해고한 미국 방송사

 

공교롭게도 칼슨의 해고 사실이 알려진 이튿날, CNN의 간판 앵커 중 한 명인 돈 레몬도 해고됐습니다. CNN은 정확한 사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터커 칼슨과 마찬가지로 여성을 향한 성차별, 성추행 발언이 문제가 됐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여전한 권력인 케이블 뉴스

칼슨과 레몬의 해고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스텔터가 칼럼에 썼듯 권력이 앵커가 아니라 방송사에 있다는 점입니다. 스타 앵커들은 세상이 자신의 말과 행동에 주목하다 보니, 자신에게 대단한 권세가 있는 것처럼 착각하곤 하지만, 사실 그 막강한 힘은 결국 그 자리에 자신을 앉힌 방송사에 있다는 거죠. 터커 칼슨 이전에 폭스에서 해고당한 빌 오라일리나 글렌 백, 폭스를 떠난 메건 켈리 등 폭스라는 플랫폼을 잃자 금방 사람들의 관심에서 사라져 버린 ‘전직 유명인’은 많습니다.

터커 칼슨은 다를까요? 소셜미디어에 인플루언서도 많고, 바야흐로 1인 미디어 시대이기도 하니, 전통적인 방송국 없어도 자기 브랜드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한 미션은 아닐 겁니다. 터커 칼슨 정도면 방송에 돈을 대겠다는 부자가 얼마든지 나올 수도 있고요.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폭스 뉴스와 머독은 이번에도 어느 정도 확신을 가지고 칼슨을 해고한 거로 보입니다.

지금까지 앵커를 바꿀 때마다 폭스 뉴스 시청자들은 결국, 자기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다시 돌아왔습니다. 정치적인 선동과 선정적인 주장으로 먹고사는 폭스 뉴스에 앵커는 얼마든지 갈아 끼우면 그만인 부품이었을지 모릅니다.

어쩌면 힘들고 어렵게 취재한 사실과 팩트를 전하는 뉴스가 아니라, 아무 말이나 해도 상관없는 ‘예능 같은 뉴스’로 쌓은 명성과 인기라는 건 사상누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