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기후변화를 향한 미국 대법원의 ‘눈 가리고 아웅’
2022년 9월 5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팟캐스트 아메리카노 이번 시즌에서 두 번째로 읽은 책이 기후변화 소송을 다룬 “지구를 살린 위대한 판결”이었던 만큼 올해 대법원 판결 가운데 기후변화와 관련된 판결 이야기도 여러 차례 소개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 지난 7월 6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소개한 글을 올립니다.

 

6:3의 압도적인 보수 우위의 미국 대법원이 7월 휴지기를 앞두고 기존 판례와 상당히 동떨어진 판결을 잇달아 내렸습니다.

수정헌법 2조를 맹신하는 대법관들은 공공의 안전을 위해 개인의 총기 소지를 제한하고 규제하던 법률을 위헌으로 규정했고, 반세기 동안 헌법이 보장해 온 여성의 임신중절권을 박탈했으며, 미식축구 경기가 끝난 뒤 선수들을 모아놓고 기도했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미식축구부 코치를 해고한 워싱턴주 교육 당국의 결정이 수정헌법 1조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판결했습니다. 그동안 오히려 종교와 국가의 분리를 더 우선으로 두던 판례를 뒤집은 또 하나의 중요한 판결로 기록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가운데 지난주 목요일 대법원은 웨스트버지니아 대 환경보호청(West Virginia v. EPA) 판결도 내렸습니다. 다른 판결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기후 재해가 이미 낯설지 않은 상황에서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미국이 이를 외면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거나 다름없는 판결이며, 마침 팟캐스트 아메리카노 세 번째 시즌에서 2007년 대법원의 기후변화 소송을 다룬 책 “지구를 살린 위대한 판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오늘은 이번 대법원판결에 관한 쟁점을 짚어보겠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이어진 판례를 뒤집은 판결은 아니므로, 법리적인 해석에 관해서는 깊이 들여다볼 부분이 많지 않습니다. 요약하자면, 기후변화가 심각한 문제이므로 온실가스 배출을 환경보호청이 규제해야 하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대법원은 환경보호청이 향후 지금보다 더 적극적이고 급진적으로 온실가스 배출 규제에 나설 권한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선을 그었습니다.

지금 규제가 잘 이뤄지고 있어 미국의 기후변화 대책이 다른 나라에 모범이 된다면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문제는 지금 미국의 기후변화 대책은 형편없는 수준으로 전 세계 많은 나라의 원성을 사고 있다는 점이죠. 데이비드 월러스 웰스가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서 낙제나 다름없는 미국의 기후변화 대책 성적표에 관해 언급한 수치들을 정리했습니다.

사진=Unsplash

“공멸하는 길(suicidal path)”

UN 기후변화 대책위원장을 지낸 크리스티나 피게레스가 지금처럼 손을 놓고 있다가는 기후 재해를 막을 수 없다고 경고하며 한 말입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선거를 치르면서 기후변화 대책을 강화하겠다는 공약을 수없이 내걸었지만, 의회가 법을 통과시켜주지 않는 한 기후 공약의 9%밖에 지키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 트럼프 행정부를 거치며 보수 우위로 재편된 대법원마저 환경보호청의 권한을 제약하는 판결을 했습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 나라입니다. 이 세상 어느 나라도 지금껏 배출한 온실가스가 미국이 배출한 온실가스의 절반이 넘지 않으며, 인구 1명당 온실가스 배출량으로 따지면 두 번째로 책임이 큰 중국보다 미국이 5~6배 더 온실가스를 내뿜었습니다.

상황이 이런 만큼 천천히 상황을 개선해나가서는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인데, 지난주 대법원은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기후변화 자체를 부정한 건 아니지만, 지난 오바마 행정부 때 세워만 놓고 이행되지 못했던 ‘급진적인’ 청정에너지 계획(CPP, Clean Power Plan) 같은 걸 강제할 권한은 환경보호청(연방 정부)에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최근 예일 기후 소통이 진행한 여론조사를 보면, 미국인 다수가 누구든 나서서 기후변화 대책을 실행에 옮겨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의회가 해야 한다는 이들이 61%,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는 의견이 52%, 기업이 해야 한다는 의견이 70%) 이런 여론과 동떨어진 지난주 대법원의 판결이 앞으로 영향을 미칠수록 미국은 기후변화에 관한 한 전 세계에서 리더십은커녕 가장 심각한 문제아이자 위선자로 남게 될 겁니다. 미국 대법원에서 소송 결과가 나오기까지는 길게는 10년이 걸리는데, 환경보호론자들이 유의미한 규제를 판례로 세울 수 있기를 기대하게 한 소송들도 대법원 상고 청구 목록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6명의 보수적인 대법관은 규제를 강화하기보다는 완화하는 쪽으로 관심이 있었고, 이번 웨스트 버지니아주 대 환경보호청 소송의 상고가 받아들여졌을 때부터 이런 판결이 날 거란 우려 섞인 예상이 많았습니다.

교토 의정서를 비준하지 않았고, 코펜하겐 기후 회의에서 어깃장만 놓았으며, 트럼프 행정부 때는 파리 기후협약에서도 멋대로 탈퇴했던 미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시선은 곱지 않습니다. 온실가스 배출 규제에 손을 떼면 미국은 지구적인 기후변화 대책에 찬물을 끼얹을 뿐 아니라 신재생 에너지 개발 등 기후 관련 사업 기회에서도 자연스럽게 뒤처질 수밖에 없습니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서방 선진국 가운데 기후변화 대책에 필요한 자금을 개발도상국에 지원하기로 한 약속을 가장 안 지킨 것도 미국이었습니다. 지난 2020년 기준으로 미국은 약속한 지원금 가운데 무려 400억 달러를 주지 않았는데, 50억 달러 이상 약속한 금액을 지급하지 않은 나라는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국내적으로는 오바마 행정부 초기 상원 의석이 60석이 넘어 필리버스터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을 때 기후 입법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이제 대법원판결로 인해 한 번도 실현한 적도 없던, 하지만 기후변화 대책 가운데 그나마 가장 나은 대책으로 여겨지는 청정에너지 계획도 집행하기 어려워졌으니, 미래는 무척 암담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