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대법관 배우자가 극우 음모론자라면 어떡하나
2022년 6월 28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지난주 뉴욕주의 총기 규제법안을 폐기하는 대법원 결정의 의견문을 쓴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의 부인 지니 토머스에 관해 4월 4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쓴 글입니다.

 

지난달 말, 워싱턴포스트와 CBS가 현직 대법관의 부인과 전 백악관 비서실장 사이의 문자메시지를 입수해 보도하면서 미국 정계가 떠들썩해졌습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인물은 클래런스 토머스(Clarence Thomas) 대법관의 부인이자 보수 성향 로비스트로 활동해온 지니 토머스(Ginni Thomas)입니다.

트럼프 정부에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부상한 지니 토머스는 지난 2020년 대선 결과에 불복하는 운동을 주도한 보수 인사 가운데 하나로 알려졌는데, 이번 보도를 통해 행정부 최고위층 인사인 그가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보도 이후 민주당 측에서는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이 물러나거나, 최소한 대선 관련 대법원 재판에서 자진 사퇴(recuse)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고, 대법관 윤리 문제 등 여러 이슈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지니 토머스(오른쪽)와 남편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 사진=Drew Angerer/게티이미지

뉴욕타임스에는 3월 29일, “지니 토머스는 아웃라이어(outlier)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현재 공화당을 이끌어가는 주류 엘리트와 큐아논(QAnon)을 비롯한 주변부의 음모론자, 극단주의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주장이 칼럼의 핵심입니다. “바이든 범죄 가족과 투표 사기단”을 관타나모 군사 법정에 세워야 한다거나, 트럼프가 “딥스테이트”를 상대로 성전을 벌이고 있다고 믿는 지니 토머스는 한때 극소수, 비주류로 치부했던 음모론자들과 다를 바가 없고, 지금의 공화당은 이런 인물들을 적극적으로 포용할 뿐 아니라 이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고 있다는 주장이죠.

문자메시지를 처음 보도한 워싱턴포스트는 미국 정치에서 종교가 지나치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현실을 우려하는 칼럼을 실었습니다. 지니 토머스와 트럼프 백악관의 비서실장이던 마크 메도우 간에 “선과 악의 싸움”, “왕중왕의 승리” 등 종교색이 뚜렷한 언어가 오갔기 때문입니다. 사설의 필자는 자기 자신도 종교인이고, 종교의 순기능도 분명히 존재하지만, 절대적인 명분을 제시하는 종교는 민주적인 토론과 설득에 걸림돌이 되고 종교적 확신은 맹목성과 무지를 부추길 뿐 아니라, 지도자에게 책임을 묻기도 어려워지기 때문에 권위주의적 지도자가 득세할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편, 월스트리트저널은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이 자진 사퇴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사설을 실었습니다. 칼럼은 대법관 사퇴와 관련한 규정을 나열하면서 “아내의 개인적인 정치적 의견”이 대법관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고 판단할 근거는 전혀 없고, 특정 사안에 대한 대법관 배우자의 관점을 문제 삼기 시작한다면 대법관 전원이 참여할 수 있는 재판이 아예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민주당 일부 의원들의 사퇴 요구는 대법원에서 민주당이 선호하는 정책적 판결이 나오도록 하려는 책략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월스트리트저널 사설의 지적대로, 의회가 대법관 탄핵이라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현재로서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의 거취는 본인의 판단에 달려있습니다.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한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의 신뢰와 존경으로부터 비롯되는 권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대법원이라는 기관이 본연의 역할을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 이번 사태를 하나의 분기점으로 주시해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