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희귀하다는 사실만으로 특별합니다
(Alan Lightman, 노틸러스)
해당 지역의 역법으로 2009년 3월 6일 오후 10시 49분, 석유와 액화산소를 이용한 로켓이 우주망원경을 싣고 한 행성의 표면을 떠났습니다. 그 행성은 처녀자리 은하성단의 외곽에 위치한, 은하수라 불리는 은하의 중심에서 25,000광년 떨어진 G형 항성의 세 번째 행성입니다. 그날 밤 하늘은 맑았고, 비나 바람은 불지 않았으며, 기온은 절대온도로 292도였습니다. 그 행성의 지적 생명체들은 로켓 발사를 축하했습니다. NASA라 불리는, 로켓 발사를 책임진 기관은 발사 직후 그 행성 전체에 연결된 컴퓨터 네트워크에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 태양계 바깥의 지구형 행성을 찾는 목적을 가진 케플러 우주망원경이 발사된 이 아름다운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어쩌면 케플러 망원경이 찾아낼, 아주 먼 곳의 한 행성에서 탄생한 지적 생명체들도 같은 시도를 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의 이름을 딴 이 우주망원경은 태양계 바깥의 “거주 가능한”, 곧 물이 끓을 정도로 항성에 가깝지는 않지만 물이 얼 정도로 항성에서 멀지는 않은, 그런 행성을 찾을 목적으로 특별히 제작되었습니다. 대부분 생물학자들은 비록 지구와 전혀 다른 형태의 생명체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들도 액체 상태의 물이 있어야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케플러 우주망원경은 지금까지 15만 개의 태양계를 조사했고 1,000개 이상의 외계 행성을 발견했습니다. 지금도 이 자료들은 계속 분석되고 있습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인류는 외계 생명체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처음으로 그 질문에 좀 더 구체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지금까지의 결과로는 항성 중 약 10%는 거주 가능한 행성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매우 많은 수의 거주 가능한 행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은하에만 1천억 개의 항성이 있으며, 또 우리 우주에 있는 은하의 수도 매우 많기 때문에 우주에 다른 생명체가 있을 가능성은 매우 높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우주에서 생명은 매우 흔한 것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여전히 생명은 매우 희귀한 것입니다. 곧, 모든 물질을 통틀어서 생명체를 구성하는 물질의 비율을 본다면 그렇습니다. 케플러가 발견한 모든 “거주 가능한” 행성에 생명체가 존재하며, 그 행성에 지구와 비슷한 생태계가 만들어져 있다 하더라도, 이 우주에서 생명체의 비율은 극히 적습니다. 곧, 이 우주의 물질 중 생명체의 비율은 10억 분의 10억 분의 1 정도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숫자는 이렇게 바꿔 말할 수 있습니다. 고비 사막 전체가 우주의 모든 물질이라면, 생명체는 그 사막에 존재하는 모래 한 알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체는 도대체 왜 그렇게 희귀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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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대부분 사람들은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에는 무생물에는 없는 특별한 비물질적인 요소가 있으며, 또 물질에 적용되지 않는 특별한 법칙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생기론(vitalism)”이라고 하는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생기론자였습니다. 데카르트도 그랬습니다. 19세기, 근대 화학의 아버지인 옌스 야코브 베르셀리우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생명체가 가진 특별한 요소, 특히 인간이 가진 그것은 “영(spirit)” 혹은 “영혼(soul)”이라 불렸습니다. B.C. 8세기 이집트의 고관이었던 쿠타무와는 자신의 영혼이 거주할 800파운드(약 360kg)의 기념비를 세운 후 친구들에게 자신의 사후 그 기념비와 함께 잔치를 벌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10세기 페르시아의 학자였던 이븐 시나는 인간은 모든 외부 자극을 차단한 상태에서도 자신을 인식하고 사유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어떤 비물질적 영혼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이 모두 생기론입니다.
그러나 근대 생물학은 생기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1828년, 독일의 화학자 프리드리히 볼러는 비유기물을 가지고 유기물인 요소(urea)를 만들었습니다. 요소는 생명체의 신진대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었기에 볼러 이전에는 생명체의 증거로 간주되던 것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독일의 생리학자 막스 루브너는 인간이 움직이고, 숨 쉬는 등의 여러 활동을 하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바로 인간이 섭취한 음식에서 나온다는 것을 보였습니다. 이는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어떤 숨겨진 비물질적 근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단백질 조합, 호르몬, 뇌 세포, 유전자를 어떠한 비물질적 힘의 필요 없이 그저 개별 원자들의 결합만으로 설명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대부분의 인류는 자신이 인식하든 하지 못하든 여전히 생기론자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육통을 느끼거나 안정제를 먹고 기분이 나아질 때 등, 우리는 인간이 그저 물질로 이루어져 있음을 종종 경험함에도 여전히 우리의 정신은 비물질적인 어떤 신비한 힘에 의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각이나 자의식이 불러 일으키는 의식의 감각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이 그저 뇌세포의 전기화학적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뇌과학자들은 그렇다고 이야기합니다.
미국인 4명 중 3명은 사후의 삶을 믿습니다. 이 믿음 또한 생기론의 또다른 형태입니다. 루크레티우스가 2천 년 전 이미 말한 것처럼 우리의 몸과 뇌가 그저 원자들의 결합이라면, 우리가 죽고 나서 이 원자들이 분해될 때 우리는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것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우리가 우리의 몸과 뇌가 어떤 초월적이고 비물질적인 무언가라는 생각을 버릴 때, 곧 우리 인간은 순전히 물질적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생기론”이 제시하는 특별함이 아닌, 새로운 종류의 특별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아주 특별한 물질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작은 행성에서, 짧고 유한한 삶이라는 조건 아래서 아등바등 살아가지만,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드물고 특별한 일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이 우주에 존재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원자와 분자들 중 우리는 생명체를 구성하는 특별한 결합 방식을 가진 극히 드문 원자들로 만들어지는 행운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10억 분의 10억 분의 1의 확률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막 전체에서 단 하나의 모래알입니다.
그럼 어떤 특별한 결합이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일까요? 자신을 외부와 분리하는 막을 형성하는 능력입니다. 내부에서 물질을 처리하고 생성하는 능력입니다. 외부의 에너지를 얻어내는 능력입니다.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능력입니다. 내부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능력입니다. 성장하는 능력입니다. 번식하는 능력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 능력들 외에도 더 특별한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서로 소통하고 자극을 주는 수십억 개의 연결된 뇌세포입니다. 우리는 의식과 자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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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 베켓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시공간이 없는 무대에서 미지의 인물인 고도를 끝없이 기다리는 내용으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당혹감을 표현합니다.
에스트라겐: “어제 우리는 뭘 했죠?”
블라디미르: “어제 우리는 뭘 했죠?”
에스트라겐: “그렇죠”
블라디미르: “왜… (화가 나서) 아무 것도 모릅니까”
물론 답이 없는 질문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기존의 생각을 벗어던지고 이 광대한 우주를 우리의 생각에 포함시킬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존재가 가진 새로운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희귀한 생명을 가진 물질일 뿐 아니라 더 희귀한 의식을 가진 물질이며, 곧 우리는 우주의 “관찰자”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우주를 인식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관찰하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이 우주가 스스로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특별한 존재인 셈입니다. 나머지 모든 물질들, 사막의 모래 한 알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모래알은 생명이 없는 물질일 뿐입니다.
물론 우주가 스스로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어떠한 생명체도 없는 우주라도 아무런 문제 없이, 그저 에너지 보존과 인과론 등의 물리 법칙을 지켜가며 잘 존재할 수 있습니다. 우주에는 의식이 없어도 되고, 사실 생명체도 우주를 구성하는 필수 요소가 아닙니다. (실제로 최근 많은 물리학자들이 지지하는 “다중우주” 가설에서 대부분 우주에는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나는 설명이 존재하지 않는 우주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라고 생각합니다. 폭포나 산이 아름답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아름다움이라는 개념은, 아니 모든 가치와 의미의 개념은 관찰자가 있어야 합니다. 관찰자가 없다면 폭포는 그저 폭포일 뿐이고 산은 그저 산일 뿐입니다. 가장 드문 물질의 결합 방식인, 의식을 가진 물질에 의해 이 우주적 전경은 비로소 저장되고 기록되고 알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이런 설명에 어떤 순환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곧, 의미는 마음과 지성의 존재에 의해 비로소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의미 또한 무의미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수없이 많은 다른 우주에는 행성이나 별, 생명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 우리 우주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를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나의 몸과 뇌가 그저 원자와 분자의 결합 뿐이라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우리 우주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가치를 만들었습니다.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과학과 예술을 만들었습니다. 역사 시대 이후 우리는 이 일을 계속 해왔습니다.
영국의 철학자 콜린 맥긴은 저서 “신비한 불꽃(The Mysterious Flame)”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 바깥에서 마음을 논의할 수 없기 때문에 의식 현상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분석하고자 하는 신비한 경험인 뇌신경의 네트워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바로 우리는 우리 우주의 의미 안에 갇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 우주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어떤 거대한 우주적 의미나, 신이 부여한 신성, 아니면 영원히 지속될 의미를 생각해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저 일상의 작은 일들, 호숫가에 비치는 잔영처럼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사소한 사건들, 아니면 아기가 태어나는 일도 좋습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의미는 그 자체로 우리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 우주는 크고 작은 여러 의미를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아직 외계의 어떤 생명체도 만나보지 못했지만, 만약 그들이 지성이 없다면 크게 놀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성이 우리와 달리 과학이나 예술을, 이 우주의 전경을 저장하고 기록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면 더욱 크게 놀랄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나누어야 할 것은 어떤 신비한, 초현실적인 생기론이 아닌, 우리가 서로 살아 있다는, 그 극히 희귀한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