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쓰 E. 스타노비치의 새 책”우리를 분열시키는 편견 (The Bias That Divides Us)”중에서(3/3)
2020년 10월 30일  |  By:   |  과학  |  No Comment

(Quillette, Keith E. Stanovi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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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편 편향’과 정체성 정치

‘우리편 편향’이 우리 사회의 소통에 불을 지른 불씨라면,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관리 가능한 불씨를 대화재로 만든 휘발유입니다. 정체성 정치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이슈를 정체성이라는 렌즈를 통해 보게 만들었고, 이는 단순히 검증가능한 명제에 대한 믿음을 만고불변의 신념으로 바꾸었고 이를 새로운 근거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자신의 생각에 매우 중요한 것은 사실이며, 또 각자가 가진 신념이 그 정체성을 중심으로 생성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이슈가 정체성과 관련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대부분은 이 사실을 알고 있으며, 단순한 검증가능한 주장을 신념으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정체성 정치는 그 추종자들로 하여금 모든 문제를 권력 관계로 보게 만들었고, 이와 관련된 단순한 의견을 신념으로 받들게 만들었습니다.

정체성 정치의 추종자들은 대학 내에서 특정한 결론을 금지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어떤 대학 교수도, 특히 테뉴어를 받지 않은 젊은 교수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혐오하는 결론을 발표하지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도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교수들은 다양한 주제에 대해 스스로를 검열하게 되었습니다. 정체성 정치는 캠퍼스 내의 전투에서 이겼고, 자신들이 싫어하는 관점을 억압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정치적 입장을 가진 교수와 학생들 (그리고 흥미롭게도 대학 행정가들)은 그 승리의 댓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듯 보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 바깥 사회가 민감한 주제에 대한 대학 내의 연구를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곧,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적 승리를 구가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과거 대학이 가졌던, 사회적 문제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의 제공자라는 지위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정체성 정치는 모든 민감한 주제 – 이민, 인종, 동성 결혼, 소득 불평등, 대입 결과의 편향, 성차, 지능의 차이 등등 그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 에 대한 연구의 결론을 정해놓았고, 이제 이러한 대학의 분위기를 아는 누구도 이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일된 대학에서 만들어지는 연구 결과를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화에 따라 인류의 번영 정도는 달라질 수 있는지, 남자와 여자는 서로 다른 취향과 기질을 가지고 있는지, 문화가 빈곤률에 영향을 미치는지, 지능이 부분적으로 유전되는지, 성별 소득 격차의 상당 부분이 차별이 아닌 다른 이유 때문인지, 인종 별로 대학 입학 기준을 다르게 하는 것이 의도치 않는 결과를 낳는지, 전통적인 남성성이 사회에 유익한 면이 있는지, 인종별로 범죄율이 다른지 등의 모든 문제에 대해 오늘날의 대학은 연구를 하기도 전에 이미 결론을 정해 놓았습니다.

사람들이 대학이 어떤 주제에 대해 이미 입장을 정해놓았다는 사실을 알게될수록 대학에서 나오는 연구결과의 신뢰는 떨어지게 됩니다. 모두가 아는 것처럼, 우리는 포퍼의 가르침을 따라 과학적 진술은 “반증가능성”을 가져야 한다고 배웁니다. 이는, 틀렸음을 증명하는 방법이 존재하는 명제만이 과학적 명제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점점 더 대학에서 나오는 정체성 정치와 관련된 분야의 연구 결과가 정해져 있으며 여기에 의문을 표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제 대학에는 심지어 의문을 표하기 보다는 오직 추종만을 위해서 학과 하나가 (소위 “불만 연구(grievance studies)” 학과) 개설될 정도입니다. “반증가능성 마인드셋”을 가진 이가 그 학과에 들어갈 경우 큰 충격을 받게될 겁니다. 그 학과에서 나온 연구 결과가 과학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으리라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어떤 주장을 반대해서는 안되는 분위기에서, 혹은 그 주장에 반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명성을 송두리째 잃을 가능성이 있는 분위기에서 학자들은 그 주장에 반하는 데이터를 찾더라도 무시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연구가 언론을 통해 알려지는 과정에서도 신뢰의 실종은 계속 됩니다. 예를 들어, 뉴욕타임스에 어떤 대학 교수의 연구 결과 사람들은 “동성애자”의 결혼 생활과 더 비슷한 결혼 생활을 해야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두두두두) 바로 자신의 연구 결과 동성애자의 결혼 생활이 스트레스가 적고 긴장감 또한 적기 때문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떤 이성애자 남성 연구자의 연구 결과, 동성애자 커플은 이성애자에 비해 더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긴장감 또한 더 크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을 경우 그 연구자가 학계에서 매장되리라는 것을 이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어떤 기적에 의해 그런 연구 결과가 설사 사회과학 저널의 리뷰를 통과해 발표되었다 할지라도, 뉴욕타임스가 절대로 “동성애자 결혼 생활의 단점 – 스트레스와 긴장감”과 같은 기사를 쓰지 않으리라는 것도 사람들은 이제 알고 있습니다. (“동성애 배우자들의 만족감이 더 높다”와 같은 연구는 열렬하게 환영하면서 말이지요.) 이는 뉴욕타임스의 독자들이 바로 이런 내용의 기사를 읽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학계와 뉴욕타임스는 기꺼이 우리편 편향을 즐기고 싶어하는 자신들의 독자를 향해 봉사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런 특정한 주제에 대해 중립적인 관찰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점점 더 알아가고 있습니다.

이처럼 특정한 정치적 영역에서 정치적으로 옳지 않은 결론이 대학에서 나오기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대학이 다른 정치적 영역에서도 이와 같은 편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의심하게 됩니다. 부르주아적 가치가 가난한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내용의 에세이를 쓴 동료에게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대학 교수들이 소리 높일때(에이미 왁스(Amy Wax) 사건), 사람들이 소득 불평등에 대해 대학에서 나오는 연구를 의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트랜스 인종주의와 트렌스젠더 주의를 비교한 논문에 대해 수십 명의 대학 교수들이 그 연구가 철회되어야 한다는 공개서한을 보냈을 때(레베카 투벨(Rebecca Tuvel) 사건), 사람들이 양육이나 결혼, 입양에 관한 대학의 연구 결과를 미심쩍게 바라보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대학 교수들이 남녀 간의 취향 차이에 관한 근거를 논한 이를 인터넷에서 집단적으로 공격할 때(제임스 다모어(James Damore) 사건), 사람들이 대학에서 나오는 이민에 관한 연구에 의혹을 던지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곧, 우리는 오늘날 민주당 지지자들만 대학에서 나오는 연구 결과를 신뢰할 뿐, 공화당 지지자들과 중립적인 사람들이 그만큼 대학을 신뢰하지 않게 된 것에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에서 대학의 역할은 학생들로 하여금 질문에 대해 근거와 논리를 찾게 하며, 그들로 하여금 검증가능한 질문의 근거를 평가하는데 있어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신념을 사용하지 않도록 훈련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는 검증이 필요한 수많은 진술들과 정체성 기반의 신념을 엮어, 정책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실에 대한 입장을 집단적 신념의 상징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정체성 정치의 부상을 대학 교수들은 맥락과 무관한 논증을 가르쳐야 하는 자신들의 임무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였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학의 교수들은 오히려 자신들이 지켜야할 지적 소명의 핵심을 공격하는 사상의 추종자가 되었고 이는 지난 수십년간 있었던 사회 변화 중 가장 우울한 종류의 것입니다.

나는 일반인들에게 인지적 사고의 종류를 강의할 때 브로콜리와 아이스크림의 예를 듭니다. 어떤 인지적 사고는 꼭 필요하지만 힘이 듭니다. 이를 브로콜리라 부릅니다. 다른 종류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며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이는 아이스크림에 해당합니다. 강연에서 나는 브로콜리를 먹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지만 아이스크림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곧, 교육은 브로콜리와 같은 힘든 인지적 사고를 함양하는 것이며, 사람들은 심리적으로 쉽지 않은 이 생각 방법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는 것은 대표적인 인지적 브로콜리의 하나입니다. 편안한 자신의 정체성을 떠나,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을 벗어나 다른 입장에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대학 교육의 핵심적 목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대학이 학생들을, 그들이 심지어 입학하기 전 부터 그들이 가진 정체성에 가둔다면 이 사회에 대학이 도대체 어떤 가치를 더하는지를 말할 수 없게 됩니다. 대학에서 정체성 정치를 강조하는 것은 그들에게 아이스크림을 먹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유지하던 입장이라는 안전망 속에서 생각하는 일은 따로 배우지 않아도 가능한 일입니다. 이는 모든 사람이 자연스럽게 하는 일입니다. 학생들이 진정 배워야 할 것은,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편 편향적 사고’로는 절대로 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그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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