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라는 수수께끼(1/3)
2020년 5월 8일  |  By:   |  과학  |  No Comment

마이클과 안젤라 부부는 이제 쉰다섯 살이 되었습니다. 지난 몇 년 사이 지인 중 두 명이 암과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고, 이를 지켜본 부부는 아이들에게 유산을 어떻게 나누어 주어야 할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은행에는 약간의 돈이 있었고, 혹시 두 사람이 비행기 사고로 동시에 세상을 떠난다면 이를 어떻게 나눌지를 정해 놓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마이클과 안젤라 부부의 자녀는 총 네 명. 자녀의 나이는 10대에서 20대 후반입니다. 큰 딸인 클로에는 수학에 재능이 있어 구글에서 개발자로 일하고 있으며, 창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복지를 전공한 빌은 학자금을 갚기 위해 중독자를 위한 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쌍둥이인 제임스와 알렉시스는 대학생으로, 항상 문제아였던 제임스는 자신이 유튜버로 성공할 것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제임스는 대학에서 사고를 쳐 벌써 두 번이나 정학을 당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어하는 알렉시스는 지병 때문에 중년이 되면 시력을 잃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마이클과 안젤라는 원래 재산을 똑같이 4등분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곧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클로에는 실리콘 밸리에서 성공을 앞둔 반면, 빌은 빚 때문에 고생하고 있다는 것이죠. 또 제임스는 돈이 생기는대로 흥청망청 써버리겠지만, 알렉시스는 나중에 돈이 필요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입니다. 마이클과 안젤라 부부는 유산을 똑같이 나누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좀 더 정교한 기준이 필요했습니다. 그들은 아이들이 공평하게 행복하기를 바랬고, 이는 아이들에게 유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철학자 로널드 드워킨은 1981년 “평등이란 무엇인가”라는 에세이에서 부모가 처한 이런 문제를 다루었습니다. 그는 위의 예에서 부모는 두 가지 가치있는 평등의 기준 사이에서 고민한다고 말했습니다. 한가지는 “자원의 평등”이며, 이는 유산을 공평하게 나눔으로써 달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참여자의 조건이 모두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다른 기준은 “행복의 평등”으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계산이 필요합니다. 만약 첫 번째 기준을 따른다면, 이는 아이들이 처한 상황을 무시하는 셈입니다. 두 번째 기준을 따른다면, 유산을 골고루 나누지도 못하면서 동시에 두 번째 기준을 정확하게 따르지도 못할 위험이 있습니다.

2014년, 퓨 리서치 센터는 미국인들에게 “세계가 처한 가장 큰 어려움”을 물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민족적 증오”, 핵무기, 환경 파괴 보다도 불평등을 첫 번째로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평등”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의견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예를 들어 몇 년 전, 뉴욕시 주민들은 스튀브상이나 브롱스 사이언스와 같은 명문 공립고등학교를 두고 논쟁을 벌였습니다. 인종에 따라 이들 학교의 입학생 비율이 크게 달랐던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떤 이들은 과정의 평등, 곧 모든 학생들이 이 학교의 입학 시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만들고 입학 시험에 참여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평등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루는 방법으로, 입학생의 비율이 전체 인구의 인종 비율과 일치하도록 시험을 없애고 새로운 입학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들은 모두 평등이라는 동일한 목표를 이야기했지만, 그 방법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드워킨은 사람들의 차이와 그 환경의 차이 때문에, 사람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것과 그들을 “평등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평등주의가 가진 어려움은 불평등이 너무나 명백할 때 더 분명해집니다. 기업 CEO는 직원들보다 평균적으로 300배의 연봉을 받습니다. 억만장자들은 정치 지형을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 기부합니다. 부자들은 가장 뛰어난 의료 시스템의 혜택을 받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과 무관하게 우리는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 말한 미국 사회가 가진 “광범위한 조건의 평등”이 이제 사라졌음을 아쉬워 합니다. 이는 단순히 부의 문제가 아닙니다. 토크빌은 1835년, 미국인의 “평범한 일상”이 평등주의적이라 말했습니다. 곧, 일상에서 사람들은 서로를 같은 신분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은 영화관에서 팝콘을 살 때도 줄을 설 필요가 없는 더 비싼 티켓이 있습니다. 우버는 차와 가격에 따라 요금을 무려 다섯 등급으로 나눕니다. 또한, 인종과 성, 성적 지향,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에 기반한 모든 종류의 편견을 두고 우리는 아직도 싸우는 중입니다. 불평등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곳곳에서 두드러집니다. 우리는 이것이 문제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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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뉴욕 법대의 제레미 월드론은 에딘버러 대학에서 인간 평등의 근본적인 특성이라는 주제로 강의했습니다. 그는 청중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주위를 둘러 보세요. 그리고 그 사람들과 당신의 차이를 보세요.” 청중 중에는 남녀노소가 고루 있었고, 미모가 뛰어난 이와 그렇지 않은 이, 부자와 가난한 이, 건강한 이와 그렇지 못한 이, 지위가 높은 이와 그렇지 못한 이가 고루 있었습니다. 월드론은 어쩌면 청중들 중에 “군인과 시민, 범법자와 모범시민, 거지와 건물주” 심지어 “파산자, 유아, 광인” 등 법적 권리가 전혀 다른 이들도 섞여 있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강의를 기반으로 한 “또다른 평등: 인간 평등의 기초”라는 책에서 월드론은 사람마다 능력, 경험, 창의력, 인성이 다르다고 지적했습니다. 이러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그는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것이 어떤 뜻인지 물었습니다. 월드론은 자신은 인류의 평등을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학자로서 왜 자신이 이를 믿는지를 알고 싶어 했습니다.

독립선언문에 따르면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은 자명(self-evident)합니다. 하지만 관점을 바꾸어보면, 인간의 불평등이야말로 자명한 것입니다. 10년 전, 작가인 데보라 솔로몬은 도널드 트럼프에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트럼프는 이렇게 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어떤 이는 매우 영특하게 태어납니다.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죠. 어떤 이들은 미모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이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트럼프는 법 앞에서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말은 “많은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말”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2015년 이루어진 설문조사에서 미국인의 20% 이상이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월드론은 둘 중 하나를 반드시 골라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곧, 인간은 평등한 동시에 불평등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범법 여부나 능력의 정도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기준이 다르지만, 그러한 차이를 무시하는 근본적인 평등을 말할 수 있다고 월드론은 말합니다. 드워킨이나 월드론과 같은 평등주의자들은 이를 “심오한 평등(deep equality)”이라 부릅니다. 이 심오한 평등의 기준에서는 자신의 행위를 통해 어떤 가치를 획득한 영웅이나 국회의원, 팝스타와 같은 이들도 근본적으로는 다른 모든 이와 동등하다고, 곧 평등하다고 여겨집니다. 월드론은 같은 논리를 통해 심오한 평등은 가장 사악한 범죄자라 할지라도 “이 원칙이 의미하는 모든 가치와 지위를 보장받는” 인류의 일원이라고 말합니다. 심오한 평등 원칙에 의해 우리는 이민자의 어린 아이들을 그들의 법적 지위가 어떻든 간에 누추한 감옥에 가두어서는 안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월드론은 우리가 가진 이러한 판단의 근거를 찾기 원합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지난 수백 년 동안의 지성사를 탐험합니다. 키케로에서 로크에 이르는 많은 철학자들은 이성으로 사고하는 능력이 우리를 평등하게 만든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고능력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게 분명하지 않은가요?) 이마뉴엘 칸트와 몇몇 철학자들은 우리의 도덕적 감정을 그 이유로 말했습니다. (그럼 도덕적 감정이 없는 이들은 어떻게 할까요?) 제레미 벤담과 몇몇 철학자들은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우리를 평등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많은 동물도 고통을 느낍니다.) 인간이 가진 타인에 대한 사랑을 언급한 이도 있습니다. (이기적이거나 냉담한 이는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가진 이 심오한 평등 감각을 뒷받침하는 잘 정의된 정의가 있다면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이 심오한 평등의 근원이라면, 서두의 마이클과 안젤라 부부는 시력을 잃을지 모르는 알렉시스에게 더 많은 유산을 남겨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월드론은 위의 주장 중 어떤 것도 완벽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월드론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우리를 평등하게 만드는 “작고 빛나는 고유한 영혼과 같은 특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우리가 가진 심오한 평등 감각에 대한 여러 주장들이 있으며, 하나하나의 주장은 부족하지만, 다 합쳐놓고 보면 의미가 있습니다. 평등은 상호보완적이면서 동시에 경쟁적인 여러 직관들의 총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뉴요커, Joshua Roth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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