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이라는 수수께끼(2/3)
2020년 5월 8일  |  By:   |  과학  |  No Comment

평등의 이러한 모호한 특징은 평등주의자들이 가진 딜레마의 해결을 어렵게 만듭니다. 문제가 생길때마다 우리는 각자가 가진, 서로 충돌하는 “평등”에 대한 생각을 조정하며 이를 해결해야 합니다. 심오한 평등은 충분히 중요한 개념이며, 적어도 우리에게 차별과 편견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자원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가와 같은 까다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보다 정교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잘 운영되는 공동체에서는 명확하게 정의된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들은 모두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훈련 조건 또한 다릅니다. 어떤 면에서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불공평한 일입니다. (타고난 유전자를 가진 사람과 경쟁이 가능할까요?) 하지만 평등주의 사회의 달리기 선수들은 누가 더 빨리 달리는지를 겨루자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적어도 총이 울린 뒤에 달리기만 한다면 누구나 공정한 대결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주는, 약물 금지와 같은 규칙, 그리고 예선과 결선을 나누는 것과 같은 과정을 만들었습니다. 무엇이 공평한 것인지에 미리 동의했기 때문에 선수들은 경기 이후의 보상에 불평등이 있더라도 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어떤 환자를 먼저 치료할 것인가의 문제에서도 이와 비슷한 평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차이, 곧 누가 부유하고 누가 가난한가와 같은 차이는 무시하지만 다른 종류의 차이, 곧 누가 위급한 상황이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와 같은 차이는 고려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원칙에 모두가 합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합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며, 때문에 평등주의에 기반한 공동체는 언제나 붕괴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어떤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평등의 정의에 합의한 생활 공동체, 협동조합, 잘 운영되고 있는 대회 등의 평등주의 공동체들이 존재합니다. 가정에서도 화장실 청소처럼 빨리 끝나지만 불쾌한 일과 개 산책시키기와 같이 오래 걸리지만 즐거운 일을 나누는 식의 평등 원리에 합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적인 평등주의는 상대적으로 쉽게 이룰 수 있는 편입니다. 하지만 참가자가 많아질수록 이는 어려운 일이 됩니다. 모든 사회 구성원이 한 방에 모여 합의를 이루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때문에 사회적 합의는 보다 일반적인 평등주의 원칙에 바탕해 서서히 통합되어야 합니다.

어떤 원칙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각각의 원칙에는 위험이 숨겨져 있으며 통합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재화를 나누는 문제에서 많은 이들은 필요의 원칙, 곧 인간의 근본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원칙을 이야기합니다. 이 원칙이 가진 위험은 어디까지가 근본적인 필요인지를 다시 합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가 군사 학교에 진학했을때, 그는 지주였지만 현금은 충분치 않았던 아버지 미하일 안드레예비치에게 새 구두와 가구를 살 돈을 부탁하며, 이들이 없으면 자신이 따돌림을 당하게 될 것이라 썼습니다. 미하일 안드레예비치는 아들의 필요를 인정하고 그에게 돈을 보내주었습니다. 얼마 후 아버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세상을 떠났고, 도스토옙스키는 아버지가 자신의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루다 죽음을 맞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쓰는데 영감을 주었고, 철학자들이 “값비싼 취향의 문제”라 부르는 평등주의의 숨은 문제를 작품 속에 묘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문제는 바로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치품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며, 아마 미식가 배우자를 둔 이들에게는 익숙한 문제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물질적 재화 뿐 아니라 사회적 주제도 해당됩니다. 환경주의자에게 점박이 올빼미를 보호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지만, 자신의 직업을 위협받는 벌목꾼에게 이는 사치일 뿐입니다. 이 문제는 어느 곳에서나 등장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필요와 욕구를 나누기 위해 “우선주의(prioritarianism)”라는 철학의 한 분야가 발달했을 정도입니다. 이 문제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시대와 함께 그 경계가 바뀐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선택에 불과한 치료행위가 미래에는 필수적인 처치가 될 수 있습니다. 대학 학위처럼 한 때 흔치 않았던 조건이 점점 더 필수적인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에 실린 한 연구에서 네 명의 경제학자는 린든 존슨 대통령이 추진한 가난과의 전쟁이 성공했는지를 조사했습니다. 그들은 존슨이 사용한 현대적 의미의 “빈곤층”의 정의를 사용할 경우 미국인의 빈곤율이 1963년 19.5% 에서 2017년 2.3%로 떨어졌음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또한 “최소 생활 수준에 대한 기대는 변하고 있다”고 썼습니다. 오늘날, 가난과의 전쟁에서 사용된 사회안전망인 무료 식권과 메디케이드 보험 등은 이를 받는 것이 다시 빈곤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제 어떤 이들은 대학 무상교육이나 전국민 의료보험과 같은 보다 강력한 안전망을 평등주의적 필요로 이야기합니다.

어떤 이들은 갑비싼 취향의 문제를 “평균적인” 또는 “전형적인” 사람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통해 해결하려 합니다. 하지만 “전형적인”을 너무 좁게 정의할 경우 또다른 불공평한 상황이 벌어지게 됩니다. 철학자 엘리자베스 앤더슨은 1999년 “평등의 기준점은 어디인가?(What Is the Point of Equility?)”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오늘날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합니다. 직장에서 해고된 이는 실업수당을 받을 수 있는 반면, 아이를 낳기 위해 일을 그만둔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이 모순이 “아이를 또다른 값비싼 취향”으로 보는 시선을 드러내며, “개인적 이기주의와 자족”을 인간의 전형으로 보는 성차별적 가정을 반영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원래 “필수품”이란 단어는 최소한의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포함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할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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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품을 정의하는 것이 까다로운 까닭에, 평등주의자들은 또다른 개념에 관심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운(luck)입니다. 철학자 리처드 아네슨이 이를 제시한 것은 수십년 전입니다. “어떤 이들은 운이 좋게 태어나고, 다른 이들은 운 나쁘게 태어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온갖 사건에서 나타나는 선과 악의 분포를 조정하는 것이 사회, 곧 우리 모두의 책임이 될 것이다.” 앤더슨은 이 주장을 말하며 “운 평등주의”라는 유명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파악해 재화를 나누는 일 대신, 운 평등주의는 불운의 분포를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거나, 아니면 예측불가능한 자연 재해 때문에 집이 부서졌을때 운평등주의자들은 사회가 이를 도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반면, 저축을 다 써버리거나 사업에 실패하는 등 자신이 개입한 불운은 스스로 책임져야 합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이나 “사회 안전망”은 이 운 평등주의자들이 만든 개념입니다. 전자는 타고난 불운을 공평하게 바꾸려는 시도이며, 후자는 성인이 된 이후의 불운을 공평하게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미국인들은 늘 두 가지 충돌하는 가치를 보고 있습니다. 바로 개인주의와 평등주의입니다. 사회가 불운한 사람은 돕지만,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에 대해서는 도와주지 않는 운 평등주의는 이 개인주의와 평등주의를 동시에 만족시킵니다. 하지만 앤더슨과 다른 이들이 주장하듯이, 이 운 평등주의를 실제로 구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앤더슨이 쓴 것처럼, 운 평등주의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민주정의 시민으로 “동등한 존중”을 받아야할 이들이 아닌 불운한 피해자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부의 지원을 필요로 하는 계층에서 종종 자기들에게 불리한 정치세력에게 투표하는 이유가 어쩌면 이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또다른 문제는, 정치학자 야샤 뭉크가 “책임의 시대:행운, 선택 그리고 복지국가(The Age of Responsibility: Luck, Choice, and the Welfare State)”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선택과 운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매일 지각한 결과로 해고당한다면, 이는 분명 그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빈곤층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중퇴한 결과로 막노동을 하게 된 이는 어떨까요? 우리는 불운을 겪으면서 동시에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주립대 입학을 거부하고 부모님이 일하는 자동차 공장에 취직했지만 공장이 문을 닫는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공장의 폐쇄는 명백히 내 소관이 아니지만, 대학을 가는 대신 공장에서 일하기로 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습니다. 만약 대학에 진학했으면 직장을 더 쉽게 구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세계화의 흐름은 나의 선택과 무관하게 취업을 어렵게 만들었을까요? 어쩌면 매일 밤, 이 답이 없는 질문을 생각하며 잠에서 깰지 모릅니다. 뭉크는 “수많은 이들이 처한 이런 각각 다른 미묘한 문제에 대해 정부가 답을 찾아낼 것”이라 기대하는 그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선택과 운을 구분하는 것은 어떤 사실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 그저 관점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행동에 대한 설명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한 인간이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게 만드는 힘에 주목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이 어떻게 그 힘에 저항하는가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소위 구조-행위자 구분을 통해 똑같은 현상을 두 가지 다른 관점으로 볼 수 있습니다. 몽크는 20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범죄학자들이 범죄를 구조적 관점에서 바라보았고, 정치인들로 하여금 범죄의 원인인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그들은 관점을 바꾸었고 각 범죄자의 동기를 조사하며 잠재적 범죄자들이 어떻게 “행위자”로써 범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만들 수 있을지를 연구했습니다. 뭉크는 그들이 범죄를 그저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경찰에게는, 그들이 빈곤을 해결할 수는 없지만 순찰을 도는 방법은 바꿀 수 있다는 점에서 행위자 중심의 관점이 더 유용했습니다.

뭉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관적으로 구조와 행위자의 차이를, 마치 “본성”과 “양육”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처럼 어떤 실제 현실로써가 아니라 하나의 설명 방법으로 이해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모든 설명에는 한계가 있으며, 그저 진짜 이야기의 일부만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이 점 때문에 우리가 운 평등주의에 대해,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인들에 대해 양가적 관점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보수주의자들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삶에 미칠 수 있는 힘을 강조하며 복지의 규모를 제한하려 합니다. 진보주의자들은 인간의 무력함을 강조하며 복지를 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두 주장에는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유권자들은 어떤 공립학교가 예산을 더 받는 것은 아주 불공평한 일이라 여기는 동시에 성적이 뛰어난 아이들이 그저 운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말에도 거부감을 느낍니다.” 뭉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또한, 사람들의 생활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것이 글로벌 경제의 거대한 구조적 변화 때문이라는 설명은 받아들이지만, 그렇다고 각 개인의 다양한 선택이 각자의 경제적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뉴요커, Joshua Roth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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