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셜네트웍이 가진 어둠의 심리학 – 조나단 하이트(1/2)
2020년 4월 3일  |  By:   |  과학  |  No Comment

성경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가정해봅시다. 신이 모든 물리 법칙과 우주의 물리 상수를 포함한 세상을 엿새 만에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지요. 21세기 초 어느날, 신은 그저 재미로 중력 상수를 2배로 높였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다녀야 할 겁니다. 건물들은 무너지고 새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겠지요. 지구와 태양은 가까워지고 지구의 온도는 훨씬 높아질겁니다. 이런 사고실험을 물리적 세계가 아닌 사회적, 정치적 세계로 가져와 봅시다. 미국의 헌법에는 많은 노력이 들어가 있습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앞서 존재했던 많은 민주주의 국가가 불안정했으며, 지속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인간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있었고,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인간의 본성에 저항할 수 있는 시스템과 절차를 만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임스 매디슨은 “연방주의자 논문(The Federalist Papers) 제10호”에서 “분노한 군중”으로 이루어진, 당파성과 집단이기주의로 가득한 “파벌(faction)”의 문제에 대해 썼습니다. 그는 미국이 충분히 큰 나라인 덕분에, 누군가가 자신의 분노를 그렇게 멀리 전달하기 힘들 것이며 따라서 파벌주의가 가진 파괴적 특성으로부터 미국이 어느 정도 보호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메디슨은 당파적인 정치인이 “자기 주 안에서는 불 같은 인기를 끌 수 있을지 몰라도 다른 주에서도 그러한 인기를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미국 헌법에는 이를 위해 반성과 숙고를 거듭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각자가 사태를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메커니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디슨의 시도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약 21세기 초의 어느날 – 정확히는 10년 정도의 시간에 걸쳐 – 사회적, 정치적 세계를 흔드는 새로운 기술이 등장한다면 미국의 민주주의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이 기술이 “상호 적개심”을 증가시키고 흥분이 전달되는 속도를 높이는 기술이라면 어떨까요? 건물이 무너지고, 새가 떨어지고, 지구가 태양에 더 가까워지는 그런 수준의 정치적 혼란이 오지 않을까요?

지금 미국이 바로 그런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소셜미디어는 무엇을 바꾸었나

페이스북의 초기 미션은 “더 열린 세상, 더 연결된 세상”이었고, 소셜미디어가 탄생한 초창기만 하더라도 사람들은 세상을 연결시키는 것이 민주주의에 더 이로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소셜미디어가 성장하면서 그런 낙관주의는 사라졌고, 다양한 악영향과 부작용이 차츰 드러났습니다. 예를 들어 서로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온라인 정치 토론은 실제 세상에서의 토론보다 상대를 더 자극하며 더 쉽게 비이성적인 형태로 바뀝니다. 당파성이 강한 이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며 점점 더 극단적인 세계관을 만들어갑니다. 가짜 정보가 난무하고, 폭력성을 띤 이데올로기가 지지자들을 꼬드기고 있습니다.

문제는 연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셜미디어로 인해 너무 많은 의사소통이 공개적인 공간에서 이루어지게 된 것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의사소통은 두 사람 사이의 작용으로만 생각합니다.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며 친밀감을 쌓고, 상대의 농담에는 웃음으로 답하며, 두 사람만의 대화를 만들어가는 거죠. 그러나 남들이 이를 모두 지켜보는 상황에서, 특히 친구, 지인, 적, 타인이 이 대화를 자기들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한 마디씩 보탠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사회심리학자 마크 리어리는 매순간 자신이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에 관한 내면의 수치를 일컫는 소시오미터(sociometer)라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리어리는 인간이 자존감보다도 타인이 자신을 바람직한 짝이나 동업자로 생각하는지를 진정 중요하게 여기도록 진화했다고 주장합니다. 좋아요, 친구, 팔로워, 리트윗을 표시해주는 소셜미디어는 이 소시오미터를 마음 속에서 꺼내 모두가 볼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과 같습니다.

만약 사적인 대화에서 끊임없이 분노를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친구들은 그를 피곤한 사람이라 여길 겁니다. 하지만 구경꾼이 있을 때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분노는 그 사람의 사화적 위치를 상승시킵니다. 2017년 NYU의 윌리엄 J. 브래디와 그의 동료들이 50만 개의 트윗을 분석한 결과 도덕적 또는 감정적 단어를 사용한 트윗이 평균적으로 20% 더 많이 펴졌음을 보였습니다. 퓨리서치 센터의 2017년 조사 결과, 페이스북에서 “분노 섞인 불만”을 포함한 포스팅은 다른 포스팅보다 좋아요와 공유를 포함한 반응을 두 배 가까이 얻었습니다.

철학자 저스틴 토시와 브랜든 웜케는 공개적인 토론장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 도덕적인 주장을 사용하는 이들을 도덕적 관종(moral grandstanding)이라 명했습니다. 회의적인 청중들을 대상으로 강연하는 발표자들이 앞 사람보다 점점 더 강한 발언을 하게 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도덕적 관종들은 “상대에게 도덕적 비난을 퍼붓고, 조리돌림(public shaming)을 하며, 자신의 감정을 과장하고, 자신에게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명백하게 틀렸다”고 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구경꾼의 마음을 얻으려는 이 경쟁의 희생자는 진실과 미묘한 의견의 차이입니다. 도덕적 관종은 청중의 분노를 일으키기 위해 상대가 말하는 모든 말을, 때로는 같은 편의 말까지도 비판합니다. 맥락은 사라지고, 발언의 의도도 무시됩니다.

인간은 험담을 하고, 자신을 꾸미며, 타인을 조종하고 배척하도록 진화했습니다. 우리는 이 새로운 검투사들의 시대가 우리를 잔인하고 천박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기에 아주 쉽게 빠져듭니다. 예일대학교의 심리학자 몰리 크라켓은 분노한 군중의 일원이 되는 것을 막는 정상적인 힘, 곧 냉정함을 되찾고 자신을 반성하는 능력과 조롱거리가 된 이에게 공감을 느끼는 능력이 사라지는 상황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상황이란 바로 상대의 얼굴을 볼 수 없을 때, 그리고 하루에 몇 번씩 그 분노의 글에 공개적으로 “좋아요”를 눌러 자신의 편을 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입니다.

이는 바로 소셜미디어가 우리 대부분을, 매디슨이 끔찍이 피하고자 했던 분노한 정치적 시민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이제 사람들은 누가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글과 이미지를 만드는지를 두고 경쟁하면서, 그 작품이 미국 전역에 순식간에 배포되는 것과 자신들의 공개된 소시오미터를 통해 그 작품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지켜보게 되었습니다.

 

분노 생산 기계의 탄생

초기 소셜미디어는 오늘날의 모습과 전혀 달랐습니다. 2002~2004년에 등장한 프렌드스터, 마이스페이스, 페이스북은 사람들을 그들의 친구들과 연결해주는 도구였습니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삶을 꾸며서 보이게 했을 뿐, 분노를 전염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조금씩 찾아왔습니다. 사용자 경험을 바꾸는 과정에서 뉴스와 분노가 미국 사회 전역에 더 쉽게 퍼져가도록 바뀌었습니다. 소셜미디어를 개선하기 위해, 곧 이들이 민주주의에 끼치는 해악을 줄이기 위해서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2006년 등장한 트위터는 140자로 이루어진 트윗이 끝없이 이어지는 타임라인이라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콘텐츠가 끝이 없이 제공되는 타임라인은 정보를 소비하는 새로운 방식이었고, 이는 마치 소방 호스로 물을 마시는 것 같은 압도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해 말, 페이스북도 비슷한 시스템을 뉴스피드라는 이름으로 도입했습니다. 2009년 그들은 “좋아요” 버튼을 도입하며 처음으로 콘텐츠의 인기가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또한 사람들이 앞서 누른 “좋아요”를 기반으로 그들에게 어떤 포스팅을 보여줄지를 결정하는 알고리듬이라는 새로운 혁신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개인에게 맞는 연속된 포스팅을 보여주도록 소방 호스를 잘 정리해놓은 셈입니다.

문제는 뉴스피드의 알고리듬이 글의 신뢰도와 무관했다는 것입니다. 누가 만든 어떤 포스팅이든,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기만 한다면, 모든 이의 뉴스피드에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개인이 블로그에 쓴 글이 뉴욕타임스의 기사와 똑같은 디자인으로 제시되는 환경에서, “가짜 뉴스”가 인기를 끌게 된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트위터 또한 2009년 “리트윗” 버튼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도입했습니다. 이전에는 사용자들이 트윗을 공유하기 위해서는 이를 직접 복사해 자신의 트윗에 추가해야 했고, 적어도 몇 초 동안의 고민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리트윗 버튼이 등장한 덕분에 이제 콘텐츠는 아무런 고민과 망설임 없이 끝없이 퍼져나갈 수 있게 됐습니다. 한 번의 클릭 만으로 누군가의 트윗을 내 모든 팔로워들에게 전달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콘텐츠의 신뢰도에 대한 책임 또한 지게 되었습니다. 2012년, 페이스북은 리트윗과 똑같은 기능을 하는 “공유” 버튼을 만들었습니다. 타겟은 점점 증가하던 고객군인 스마트폰 사용자였습니다.

크리스 베데렐은 트위터에서 리트윗 버튼을 만든 기술자 중의 한 명입니다. 그는 2019년 초 버즈피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를 후회한다고 고백했습니다. 베데렐은 리트윗 기능을 사용한 첫 번째 트위터 이용자들을 보고는 “우리는 어쩌면 네 살 난 아이에게 장전된 총을 건네준 것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놨습니다.

2012~2013년 최후의 일격이 가해졌습니다. 업워시(Upworthy)와 몇몇 언론사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끌 수 있는 제목을 찾기 위한 방법을 테스트하며 이런 흐름에 편승했습니다. 이렇게 “당신이 믿지 못할…” 시리즈가 나타났고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사진을 이용해 사람들이 충동적으로 클릭을 하게 만드는 것과 같은 기술이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런 기술의 목적이 사람들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업워시를 만든 이들은 사람들을 더 성숙하게 만드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사 제목 바꾸기, 감정을 자극하는 이야기 포장하기 등의 기술이 기존 미디어와 뉴미디어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자 분노를 담은 기사 제목과 도덕적 충격을 주는 기사 제목들이 점차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크 오닐은 에스콰이어에 쓴 글에서 이러한 변화들이 주류미디어에 충격을 주었고, 2013년 그들로 하여금 “올해 우리는 인터넷을 점령한다”고 선언하게 만들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해, 러시아의 인터넷 조사 에이전시는 러시아의 목적을 달성하고 미국인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해 가짜 계정들을 가지고 모든 주요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이 새로운 분노 기계를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인터넷이 오늘날 정치적 분노의 유일한 원인은 아닙니다. 매디슨의 시대에도 언론은 분열을 조장했으며, 정치학자들은 오늘날 분노 문화의 일부가 1980년대와 90년대의 케이블 TV와 라디오 토크쇼에 그 뿌리를 둔다고 말합니다. 다양한 힘들이 미국을 거대한 양극화의 세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지만 2013년 이후 소셜미디어가 이미 불이 난 집에 매우 강력한 부채질을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Jonathan Haidt, 아틀란틱)

2부로

원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