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런은 사퇴했지만, 워런의 정책은 남을 것
2020년 3월 9일  |  By:   |  세계, 정치, 칼럼  |  No Comment

엘리자베스 워런(Elizabeth Warren) 후보가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사퇴하면서 이제 트럼프에 맞설 후보를 고르는 경선은 버니 샌더스와 조 바이든 후보의 대결로 압축됐습니다. 지난해 한때 여론조사에서 1위를 달리며 상당히 진보적인 의제를 앞세운 첫 여성 대통령이 될 거라는 기대를 모으던 워런 후보는 어쩌다 제대로 된 힘 한 번 못 쓰고 경선 무대에서 퇴장하게 된 걸까요? 파이브서티에잇의 페리 베이컨 주니어 기자의 분석을 요약했습니다.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지난해 민주당 경선 후보 가운데 지지율 1위를 달렸습니다. 초반에 형성된 조 바이든 전 부통령의 대세론도, 단단한 지지층을 보유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의 꾸준함도 모두 넘어서서 경선이 처음 치러지는 아이오와, 뉴햄프셔를 시작으로 전국 여론조사에서도 높은 지지율을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경선이 시작되고 뚜껑을 열어보니 워런 후보의 득표율은 실망스러웠고,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라 할 수 있는 매사추세츠주에서마저 3위에 그치면서 어쩔 수 없이 경선에서 사퇴를 발표했습니다. 워런 의원 본인의 표현을 빌리면, “진보적인 유권자는 샌더스, 중도 성향 유권자는 바이든이라는 이분법을 깨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요? 다음 네 가지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네 가지 원인은 모두 서로 연결돼있기도 합니다.

 

1. 민주당은 “너무 진보적인” 후보를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다 

2% 부유세, 전국민 의료보험 등 워런 후보가 내세운 정책은 색깔이 분명했습니다. 소득 불평등을 비롯해 자본주의의 잘못된 분배 구조를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인 개혁을 공약으로 내세웠죠. 그런데 바로 이런 정책이 민주당 안에서도 상대적으로 보수적이거나 중도 성향인 유권자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겁니다. 전국민 의료보험이 무리하게 추진돼 의료 시스템이 붕괴해버리는 건 아닐지 우려한 이들도 워런 후보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워런이 여론조사에서 1위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아마도 민주당 지도부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을 겁니다. “너무나 진보적인 의제를 앞세워서는 트럼프에게 이길 수 없다”는 우려섞인 목소리도 자연히 커졌습니다. 마이클 블룸버그와 드발 패트릭이 경선에 참여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도 중도 후보로 단일화해야 트럼프에게 이길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민주당을 기준으로 보면 워런보다 더 ‘아웃사이더’인 샌더스 후보를 향해 민주당 지도부와 중도 성향 유권자들이 보낸 시그널이 훨씬 더 강력하긴 했지만, 어쨌든 워런도 트럼프와 맞서야 하는 본선 경쟁력에서 신뢰를 주지 못했습니다.

 

2. 샌더스와 ‘누가 더 진보적인가’를 두고 벌인 경쟁은 패착

4년 전 샌더스 의원은 민주당 지도부, 전통적인 당 엘리트 그룹을 대변하는 힐러리 클린턴에 맞서 진보적 의제를 내세워 당원들을 결집할 후보가 대통령 자리에 도전해야 한다며 당시 워런 의원에게 출마를 권유했었습니다. 워런 의원은 출마를 고사했고, 결국 샌더스가 직접 민주당 경선에 뛰어들어 오늘날에 이르렀죠. 경선에서 클린턴에게 패하긴 했지만, 샌더스는 민주당 안팎의 진보 성향 유권자들을 두루 아우르는 확실한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했습니다. 이번 경선에서는 둘 다 출마한 상황에서 예상대로 두 후보는 진보적인 의제와 진보 성향 유권자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무상 교육, 부자 증세 등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공약의 수위도 높아진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특히 전국민 의료보험(Medicare for All)은 워런이 처음에는 크게 강조하지 않다가 어느 순간부터 샌더스 지지자들의 표를 의식하며 앞세운 정책으로 봉비니다. 지난해 샌더스 후보가 심장마비 발작을 일으켜 치료를 받은 적이 있는데, 이때 건강 때문에 샌더스는 경선을 완주하기 어려울 거라는 전망이 나왔고, 워런 캠프는 이를 기회로 샌더스 지지층을 흡수하고자 했던 겁니다.

그러나 샌더스는 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했고, 동시에 여론조사에서 지지율도 다시 올랐습니다. 경선이 시작되자 워런은 다시 수세에 몰렸고, 진보 성향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샌더스 만큼 표를 받지 못했으며, 중도 성향 유권자들에게는 이미 ‘너무 멀리 가버린’ 후보가 되고 말았습니다.

 

3. ‘과연 여성 후보가 트럼프를 꺾을 수 있을까?’ 끝내 떨쳐내지 못한 의구심

크리스틴 질리브란드, 카말라 해리스, 그리고 에이미 클로부차르까지 이번 민주당 경선에 뛰어든 후보들은 민주당 유권자들에게 ‘본선 경쟁력’에 관한 질문, 특히 “여성으로 트럼프를 과연 이길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끊임없이 받았습니다. 특히 4년 전에 한 번 여성(힐러리 클린턴)을 후보로 추대해 본선에 내보냈다가 너무나 뼈아프게 패했기 때문에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민주당 유권자들 사이에서 생각보다 강하게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바이든과 샌더스라는 정치인이 자신의 장점을 잘 살려 여기까지 온 것도 있고, 반대로 여성 후보들은 특히 유색인종 유권자들에게 약세를 보인다는 통계도 있지만, 어쨌든 민주당 경선은 끝내 여든을 바라보는 두 백인 남성의 대결로 좁혀졌습니다. 이는 트럼프에 맞설 경쟁력을 민주당 유권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상징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워런이 끝내 넘지 못한 ‘유리천장’도 바로 이 지점입니다. 민주당 지도부가 ‘워런은 트럼프에게 필승 카드가 아니’라는 평가를 내놓았을 때 워런이 여성이라는 요인이 판단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 영향을 미치긴 했을 겁니다. 여론조사 결과에도 이러한 ‘유리천장’ 정서가 반영됐을 수 있지만, 어쨌든 트럼프와 1:1 가상 대결 결과를 예측한 여론조사에서 워런은 샌더스나 바이든만큼 강력한 숫자를 만들어내지 못했습니다. 2012년, 2018년 두 차례 연속 선거에서 낙승하며 상원의원이 됐지만, 진보 성향 유권자가 많고, 워런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한 매사추세츠주에서 거둔 승리라는 점 때문에 승리의 의미가 평가절하되기도 했습니다. 민주당 지도부는 대체로 “하버드대학교 법대 교수 출신의 엘리트 여성이 너무 선명한 진보적 의제를 밀어붙인다면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중서부 스윙스테이트에 있는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런 설명의 기저에 ‘여성이라서 좀 주저하게 된다’는 요인이 몇 퍼센트나 작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4. 와인이냐 맥주냐, 대중성 문제

사실 민주당 경선에서 진보적인 의제를 내세우거나 유럽식으로 말하면 좌파로 분류할 만한 후보가 나온 적은 전에도 많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개 늘 경선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 중 하나를 대변하다가 끝내 후보로 지명받기에는 역부족으로 판명되는, 즉 중도 성향 후보의 들러리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2000년 경선의 빌 브래들리 상원의원, 2004년 경선의 하워드 딘 주지사가 그랬죠. 이들에게 붙었던 별명이 “wine track candidate”, 그러니까 와인잔 같이 기울이기에 어울리는 후보라는 뜻 정도가 됩니다. 이러한 ‘와인파’ 후보들은 교육 수준이 높은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지만, 대중성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반대로 노동자, 서민 계급과 훨씬 더 잘 섞일 수 있는 중도 성향 후보들은 “beer track candidate”, 즉 맥주잔 같이 부딪칠 수 있는 후보로 묘사되곤 하죠.

워런 후보 본인이 원했던 것은 아니었겠지만, 워런은 끝내 ‘맥주파’에 들지 못하고 ‘와인파’로 분류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워런 후보는 백인이 아닌 유색인종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특히 흑인의 목숨은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사법 절차에서 인종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중요 공약 가운데 하나로 내세우며 많은 지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실제 투표에서 유의미한 득표를 하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뉴욕타임스는 풀뿌리운동 조직에 공을 들여 이들의 지지를 받아낸 워런이지만, 워런의 약점이 풀뿌리(grassroots) 조직원들의 지지는 받지 못하고 풀의 윗부분(grass tops, 조직의 지도자를 뜻함)에서만 지지를 받는 데 있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워런은 지난해 1위를 달리던 여론조사 결과가 무색할 만큼 무기력하게 패하고 후보직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사퇴한 다른 후보들과 달리 워런의 흔적은 남은 경선 일정, 아니 미국 대선까지 내내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샌더스와 벌인 ‘선명성 경쟁’이 표를 얻는 데는 자충수가 됐을지 몰라도 그 덕분에 아직 경선에 남아있는 샌더스 후보의 정책은 진보적인 의제를 훨씬 더 뚜렷하게 담아냈습니다. 민주당 주류에서 논의 주제가 되지 못하던 것들이 공공연하게 논의되는 것도 워런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페이스북과 같은 대기업을 반독점법을 적용해 분할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부유세도 중도 성향 유권자를 고려하면 쉽사리 전면에 내세우기 어려운 정책이지만, 민주당 대통령이 탄생한다면 진지하게 정책으로 입안할 만한 아이디어로 보입니다.

샌더스와 바이든 가운데 누가 민주당 후보가 되든 “워런이 제기한 의제”는 민주당 경선의 또 다른 승자로 기록될 겁니다.

파이브서티에잇 원문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