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더 많은 이야기꾼이 필요합니다”
2019년 11월 7일  |  By:   |  교육, 세계  |  No Comment

미국 대학교 캠퍼스에서 지난 10년간 일어난 가장 극적인 변화를 꼽으라면 학생들이 선호하는 전공이 눈에 띄게 바뀐 겁니다. 점점 더 많은 학생이 인문계열 전공 대신 이공계열 전공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하는 학생 수는 지난 2008년 경제 위기 이후 25.5%나 줄었습니다. 국립교육통계센터가 매년 데이터를 집계한 이래 특정 전공 선택자가 이렇게 빠르게 줄어든 적은 없습니다. 지난 10년간 전체 대학생의 숫자는 꾸준히 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이런 시류는 왜 생겨났을까요? 학생들이나 교수들에게 물어보면 대개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해야 해서”라는 답이 돌아올 겁니다. 초서의 시를 읽는 것보다 코딩을 배우는 게 취업 전선에서 경쟁력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된다는 거죠. (돈을 잘 벌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찾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면서 학생(과 학부모)들은 점점 대학 교육을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는 수단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이들이 찾은 답은 STEM이었죠.

* STEM=Science(과학), Technology(기술), Engineering(공학), Math(수학)

이공계 전공, 특히 컴퓨터과학이나 보건의료 분야의 전공을 택한 학생들은 지난 2009~2017년 사이 두 배 늘어났습니다. 공학, 수학 전공자도 급증했죠.

이런 가운데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실러(Robert Shiller) 교수가 인문학을 외면하는 시류에 따끔한 일침을 날렸습니다. 실러 교수는 자신이 미시간대학교 학부생 때 들었던 역사 수업의 영향력을 떠올렸습니다. 대공황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경제학 수업 시간에 배운 것보다 역사학 수업을 통해 배운 내용이 훨씬 더 도움이 됐다는 겁니다.

실러 교수는 최근 “이야기의 경제학(Narrative Economics)”이라는 책을 새로 펴냈습니다. 책은 제목에서, 또 실러 교수가 그동안 해온 연구 주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 이야기가 시장과 전체 경제에 미치는 엄청난 영향력을 다뤘습니다. 비트코인 광풍을 “옆집 누가 코인 사서 벼락부자가 됐다더라(get rich quick)”라는 이야기로, 주택시장에 거품이 끼게 된 계기를 “누구나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anyone can be a homeowner)”라던 선전 문구가 만들어낸 이야기로 풀어냅니다.

경제적으로 중요한 사건을 사람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생각하는지 이해하는 데 전통적인 경제학의 접근법은 실패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야기의 중요성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이 과학적인 연구방법론을 통해 분석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대중을 설득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접목해야 하는 또 하나의 방법론이 바로 ‘이야기의 경제학’이다.

실러 교수는 닷컴버블의 붕괴를 예측해 유명해졌고, 케이스-실러 집값지수(Case-Shiller Home Price Index)를 만들어냈습니다. 실러 교수는 연구 시간의 많은 부분을 오래된 옛날 신문을 샅샅이 훑는 데 씁니다. 언제 어떤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렸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무언가를 사는 데 (혹은 그만 사는 데) 영향을 미쳤는지 연구하는 거죠.

영어영문학이나 역사학을 공부하는 학생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냐는 질문에 실러 교수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우선 지적 생활을 칸칸이 나누어 구획하는 사고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이야기꾼 혹은 이야기를 쉽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실러 교수 말고도 많습니다.

매년 8월이면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는 전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들과 중앙은행 수장들이 모입니다. 전 세계 경제 상황과 과제를 논의하며 거시경제 모델을 바꿀 필요가 있을지 회의하는 자립니다. 올해 잭슨홀 회의 마지막 날 호주 중앙은행의 필립 로우 총재는 회의에 모인 중앙은행 총재와 경제학자들에게 숫자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좋은 이야기꾼이 되는 데 힘쓰자고 촉구했습니다.

중앙은행과 경제학자들은 각종 숫자, 지표, 지수를 늘 입에 올립니다. 어떤 정책을 쓰는 근거나 정책을 썼을 때 기대되는 효과도 항상 숫자와 지표, 지수로 표현되죠. 그런데 사람들이 경제 정책을 이해하는 데 더 효과적인 건 훌륭한 이야기일 때가 많습니다. 경제학자에게는 숫자가 중요할지 몰라도 사람들에겐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게 훨씬 많으니까요. 어떤 정책이 어떻게 경제적인 후생(welfare)을 늘려줄지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 사람들의 공감과 지지를 얻어내려면 이야기의 힘에 기대야 할 때가 많습니다.

로우 총재의 말은 정곡을 찌릅니다. 실제로 호주는 지난 25년 동안 경기 침체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 원동력 가운데는 중앙은행의 경제학자들이 내부적으로는 물론 대외적으로도 더 효과적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소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는 사실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자메이카 중앙은행이 “너무 높은 인플레이션은 사악한 것”이라는 내용을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해 자메이카 국민에겐 특히 친숙한 레게 뮤지션을 고용해 이야기로 풀어낸 것도 좋은 사례입니다. 미국 연준은 레게 뮤지션을 부를 정도로 참신하지는 않지만, 연준 고위 관계자가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이나 발언을 사전에 효과적으로 다듬어줄 원고 작성자(이야기 전문가)를 찾고 있습니다.

스웨덴 중앙은행의 스테판 잉베스 총재도 이야기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게 기대하는 것도 아마 그럴 테고, 저는 실제로 중앙은행 총재가 이야기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앞으로 올 미래를 이야기해주는 사람이죠. 원래 인간은 미래를 내다보고 싶어 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부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잖아요. 그래서 이야기꾼은 제 직업에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잉베스 총재는 어떤 의미에서 시장이 중앙은행과 정책 결정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평가해주는 하나의 거대한 무대와도 같다고 말합니다. 중앙은행은 기업가와 대중을 상대로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앞으로의 경제 전망을 합니다.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풀어내면 사람들은 그 말을 믿어주고, 그 신뢰가 높아야만 기업은 계속 일자리를 만들고 소비자들은 소비에 나섭니다.

실려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이 집권한 뒤 미국 경제가 역사상 그 어떤 시기보다도 가장 잘나가며 전 세계 상황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호황이라고 말하는 것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건네 사람들의 소비 심리를 유지하려는 아주 훌륭한 전략이라고 평가합니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이 사실을 이해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 하는 말 가운데 상당 부분이 거짓말인 점은 문제지만, 이는 이야기의 힘을 적절히 활용한 것과는 다른 문제이긴 합니다.

아무리 명망 있는 경제학자가 이야기꾼이 필요하다고 주장해도 인문학 강의실을 지나쳐 코딩을 배우러 가는 학생(과 그러라고 시키는 학부모)들을 설득하기에는 큰 효과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전공별로 졸업 후 취업률과 급여를 비교해봤습니다.

컴퓨터과학을 전공한 학생은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학생보다 평균적으로 졸업 후 첫 직장에서 급여를 더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25~29세 사이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학생이 컴퓨터과학이나 수학을 전공한 학생보다 취업한 상태일 확률이 높았습니다.

STEM 전공자들은 졸업 후에는 분명 높은 연봉을 받으면서 경력을 시작하지만, 급여 격차는 비교적 금방 줄어들었습니다. 또 STEM 전공자들은 졸업 후 10년 정도가 지나면 기존의 전공지식과 기술만으로는 구인 시장에서 충분한 매력을 지니지 못해 새로운 학위를 받거나 직종을 바꾸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반대로 인문계열 전공자들은 10년 정도가 지나면 처음 일을 시작했던 분야에 남아 매니저급으로 승진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년이 되면 전공에 따른 급여 격차는 사실상 사라집니다.

급여 격차를 연구한 하버드대학교의 데이비드 드밍은 뉴욕타임스에 쓴 외고 칼럼을 통해 “40살이 되면 사회과학이나 역사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연봉이 좀 더 높은 급여를 받고 일을 시작한 다른 전공자들의 연봉을 따라잡는다”고 썼습니다.

매니저급, 나아가 더 높은 곳에서 조직을 이끄는 자리에 오르면 소통 능력과 이야기를 풀어낼 줄 아는 자질이 더욱더 필요합니다. 최고의 경제학자들과 여러 중앙은행 수장이 말한, 세계 경제가 성장과 정체의 중대한 갈림길에 선 지금 요구되는 바로 그 능력입니다.

(워싱턴포스트, Heather L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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