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월드컵을 즐겨도 되는 이유
2018년 6월 21일  |  By:   |  세계, 스포츠, 칼럼  |  No Comment

잉글랜드 대표팀의 레전드 공격수 출신 축구 해설자로 이번 러시아월드컵에서 BBC의 해설을 맡은 게리 리네커의 어록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을 꼽으면 다음 말일 겁니다.

“축구는 참으로 간단한 게임이다. 22명의 선수들이 그라운드 위에서 90분 내내 열심히 공을 쫓아다니다가 마지막에는 독일의 승리로 끝난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린 독일은

그러나 여전히 전 세계 수많은 축구팬들은 선수들의 동작 하나하나에 울고 웃으며 월드컵을 지켜볼 겁니다. 자기 나라가 본선에 오르지 못했더라도 축구를 사랑하는 팬이라면 손꼽아 기다려왔을 대회가 월드컵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피파 회원국 207개 나라 가운데 197위를 기록해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본 적 없는 방글라데시에서도 축구팬들이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국기를 걸어놓고 자기 팀인 것처럼 열정적인 응원을 펼치기도 합니다.

월드컵이 기다려지는 건 <이코노미스트>도 마찬가지입니다. 잉글랜드 대표팀이 모처럼 짜임새 있는 전력을 갖췄기 때문은 아닙니다. 잉글랜드를 우승 후보로 꼽을 만큼 <이코노미스트>가 무모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월드컵을 기다리는 이유는 조금 다른 데 있습니다. 극적인 이야기가 매일같이 쏟아지는 가운데 스포츠가 예술의 경지에 이르는 흔치 않은 일이 월드컵 가운데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월드컵은 <이코노미스트>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가 구현되는 장이기도 합니다.

사실 ‘월드컵’이라고 하면 불편한 것, 심지어 혐오스러운 것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밀실 행정과 부패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입니다. 블라드미르 푸틴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을 부패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데 십분 활용할 생각밖에 없을 겁니다.

개최국을 선정하는 과정도 끔찍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월드컵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습니다. 참가국들의 면면이 우선 그렇습니다. 경기력보다도 그 나라의 정치 체제를 기준으로 봤을 때 그렇습니다. 올림픽을 떠올려보면 중국이나 러시아처럼 선수들에게 비인간적인 훈련을 반강제로 시키는 독재국가들이 메달을 휩쓰는 현상이 점점 뚜렷해지며 마치 권위주의 정권의 가장 행렬을 보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독재국가는 축구를 잘 할 수 없습니다. 축구라는 운동이 창조성을 비롯한 여러 재능이 필요한 스포츠이기 때문입니다. 독일이 통일되기 전 동독과 서독 축구를 비교해보면 차이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그저 근육질의 힘 좋은 선수를 위주로 골을 우겨 넣던 동독에 비해 서독은 세계 축구사의 전술을 선도하며 ‘공을 찰 줄 아는’ 선수와 팀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이번 러시아 월드컵에 참가하는 32개 나라 가운데 프리덤하우스(Freedom House)의 분류상에 “자유롭지 못한(not free)”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는 네 나라밖에 없습니다. 역대 월드컵 우승국 가운데 우승 당시 독재 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것은 지난 1978년 아르헨티나의 사례가 마지막입니다. 여자월드컵의 경우 역대 우승팀 모두가 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미국, 독일, 일본, 노르웨이) 결승에 한 차례 오른 중국이 우승을 차지했다면 앞의 문장은 바꿔 써야 했겠지만요.

축구 행정부터 전술까지 폐쇄적으로 하는 나라는 국제 축구계에서 대접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열린 자세로 적극적으로 임하는 나라가 보상을 받죠. 대표팀 감독을 선임할 때도 자국 스타 출신 감독보다 경쟁이 가장 치열한 유럽 리그에서 성공을 거둔 명장을 뽑아 대표팀을 맡기는 나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우수한 선수를 발굴하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영입하는 데도 적극적인 나라들이 많습니다. 특히 축구 국가대표팀이 되는 건 실제 국적을 취득하는 일보다 쉽습니다. 부모 중 한 명의 국적만으로도 그 나라 성인 대표팀 선수가 될 수 있다 보니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이 유럽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 나라 대표팀에는 들지 못한 재능 있는 선수들에게 국적을 주고 대표팀에 뽑습니다. 부유한 나라들은 아예 많은 돈을 주고 귀화를 유도하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능력을 발굴하고 길러내는 법도 각국 축구협회의 책무입니다. 재능 있는 어린 선수를 찾아내 육성하고, 어릴 때는 빛나지 않는 대기만성형 선수에게도 빛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기다려주는 나라가 결국 좋은 대표팀을 꾸리기 마련입니다. 훌륭한 유소년 아카데미는 공이 발에 붙어다니는 드리블 머신을 배출하는 대신 경기를 읽을 줄 알고 팀플레이를 할 줄 아는 축구 선수를 배출합니다. 훌륭한 선수들은 치열한 경쟁을 뚫고 훌륭한 리그에서 뛰며 성공을 거두죠.

소위 한 나라의 부와 국력, 국민이 축구를 얼마나 좋아하느냐 등을 토대로 예측해보면 미국이 지금보다는 분명 축구를 잘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미국은 러시아 월드컵에 나오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미국에서 가장 공산주의적인 분야가 바로 프로스포츠인데, 미국 프로축구 MLS에도 엄연히 존재하는 카르텔이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MLS는 유럽 축구의 표준 대신 미국 프로스포츠의 전통과 정서를 반영해 샐러리캡을 시행하고 승강제를 도입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경쟁의 저하로 이어졌고, 국가대표팀 경쟁력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월드컵은 다같이 즐기자고 있는 행사입니다. 자유와 세계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래도 됩니다. 물론 푸틴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모습이 잊을 만하면 나오는 통에 거북할 수는 있겠지만요. 우리 인생이 그러하듯 축구도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습니다. <이코노미스트>가 예측한 이번 월드컵 챔피언은 독일이지만, 다른 결과도 얼마든지 나올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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