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이 본 전시 배급제와 정의로운 세계 (2/2)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엄혹했던 1941년 겨울, 오웰은 BBC 동부지국에서 일하게 됩니다. 동부지국이 관할하는 지역은 인도였고, 오웰에게 주어진 일은 기사를 쓰고 지역 라디오 방송을 챙기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영국이 주도하던 나치 반대, 전쟁 반대 운동에 대한 지지를 영국이 식민지로 삼고 있던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끌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과제였습니다. 오웰 자신의 인도인 친구들 가운데도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투쟁을 벌이다 영국 감옥에 갇혀있는 이들도 여전히 있었습니다.
BBC의 마이크를 잡은 오웰은 쉽지 않은 과제를 해내고자 묘안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그가 내보내는 방송은 영국인뿐 아니라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인도인들도 듣게 될 터. 그는 배급제를 화두로 던졌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전시 배급제가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1942년 1월 20일, 그가 맡은 주간 시사 프로그램 <돈과 총(Money and Guns)>에서 오웰은 인도 청취자들에게 영국인들이 소비를 상당히 억제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뒤로 모든 국가는 한정된 자원으로 무기를 더 만드느냐 식량을 확보하느냐 가운데서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중략) 영국은 아시다시피 섬나라이기 때문에 물자를 나라 안팎으로 실어나르기 어렵습니다. 영국 노동자들은 그동안 즐겨왔던 것을 어느 정도 포기하고 특히 수입한 물자를 낭비하지 않는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만 했습니다. 전쟁 중에 포기해야 하는 사치품이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좀 더 좋은 음식과 마실거리, 멋진 옷, 화장품, 향수 따위입니다. 의식주를 해결만 하는 수준에서 간소화해야 하니까요. 만들어내기까지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거나 영국에 없는 원료를 수입해야만 만들 수 있는 제품들은 전쟁 중에는 사치품입니다.
3주 뒤에도 오웰은 여전히 비슷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 불평하는 이는 찾아볼 수 없다.’라며 오웰은 영국 전역에서 이런 분위기가 감지된다고 전했습니다. 3월 14일에는 한 술 더 떠 이렇게 썼습니다.
오히려 지금보다 더욱 엄격하게 소비를 억제하고 전시 체제를 지원하는 데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영국 국민들이 많다. 마치 영국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상황은 안중에도 없는 듯 행동하는 일부 몰지각하고 이기적인 소수의 영국인들이 최종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전시 배급제를 지시한 정부마저 오웰의 논조가 지나치다고 여겨 그에게 자제할 것을 요청하며 계속 그런 식으로 방송하면 해고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웰이 쓴 위의 글은 영국 정보부가 사전에 검열을 통해 걸러내 발행을 막았습니다.
그런데도 왜 오웰은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을까요? 그 이유는 아무도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인도인들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리라 확신하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식민지 인도 사람들이 세계의 자원을 지금보다 더 공정하게 나누어 갖는 방법이 있고, 그래서 세상의 불평등을 언젠가는 해결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 한 파시즘에 반대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결성한 연대는 절대 오래 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배급제가 인기를 끈다는 사실은 올바른 이유만 있다면 더 잘 사는 나라의 부유한 사람들도 지금보다 부족하게 사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했습니다. 전시에 일어났던 일이 평시라고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으니, 파이를 나누어갖는 방법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방법 말고도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는 겁니다. 영국 사람들이 인도 사람들보다 12배 더 잘 벌고 12배 더 풍족하게 소비하며 12배 더 잘 살아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 따위는 당연히 없습니다.
배급제 이야기를 BBC 방송에 내고자 오웰은 치밀한 논리를 준비했습니다. 오웰이 보기에 모두에게 공정한 세상을 인간의 합리성만으로 담보하기란 너무 어렵고 뜬구름 잡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 논리로는 전 세계적으로 정의를 쟁취하기 위해 중요한 정치적 흐름을 이끌어낼 수 없을 것 같았죠. 그런데 파시즘 세력과 벌이게 된 전쟁 중에 사람들은 기존과 다른 분배 방식(전시 배급제)을 아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는 맹목적 애국주의나 인간 본연의 성질에 무턱대고 기대는 오늘날의 포퓰리즘과 달리 사회적인 공정함을 이루고자 하는 목표 아래 합리성을 바탕으로 도출한 지지였습니다. 그렇다면 전 세계적인 수준에서 더 공정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일도 더는 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A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