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리학이 밝힌 질량의 정체(2/2)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이 에너지는 너무 큰 탓에 가상의 입자(배경 잡음에 해당하는)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본 입자 또한 만들어냅니다. 드러난 색전하를 감추려는 난리 통 속에 드러난 쿼크와 짝을 이루는 반-쿼크들이 만들어져 중간자(meson)가 형성됩니다. 즉, 쿼크는 보호자 없이는 절대 다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직도 더 남아 있습니다. 색전하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서는 반-쿼크가 원래 쿼크가 있던 정확한 장소, 정확한 시간에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정성 원리는 자연이 반-쿼크를 그렇게 만들어내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불확정성 원리에서 정확한 위치는 무한대의 운동량을 필요로 하며 에너지를 정확한 시간에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무한대여야 합니다. 자연은 이렇게 정확한 선택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타협을 하게 됩니다. 곧, 색전하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반-쿼크와 가상의 글루온으로 적당히 감추게 되며, 에너지는 비로소 현실적인 수준으로 내려옵니다.
양성자와 중성자 내부에서 이런 종류의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양성자 내부에서 세 쿼크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색은 언제나 감추어져야 하며, 혹은 드러난 쿼크의 에너지는 낮추어져야 합니다. 세 쿼크는 수많은 가상의 글루온과 쿼크-반쿼크 쌍을 만들어냅니다. 물리학자들은 내부 에너지가 충분히 높아 쿼크-반쿼크 쌍을 만들어내면서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세 쿼크가 외부에서 보일 때 이를 “드러난 쿼크(valence quark)”라 부릅니다. 게다가 이들 입자 내부에는 드러난 쿼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에는 수많은 종류의 색력장(color-field)이 만들어내는 쿼크-반쿼크 쌍과 글루온의 에너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양자색역학을 이용해 이를 계산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색력의 크기는 매우 크고, 색력의 상호작용에 해당하는 에너지 역시 매우 높습니다. 글루온 역시 색전하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양성자와 중성자 안의 모든 소립자는 상호작용을 하게 됩니다.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이 모든 가상 입자와 기본 입자의 조합을 다 계산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입니다.
이는 양자색역학의 수식들이 상대적으로 직관적인 형태로 쓰인다 하더라도, 이를 손으로 써서 완벽하게 푸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또한, 양자색역학에서는 상호작용 에너지의 범위가 너무 높아 재규격화 같은 테크닉을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물리학자들은 이 때문에 컴퓨터를 이용하는 것을 택했습니다.
양자색역학을 단순화한 “양자경량색역학(QCD-lite)”를 이용해 상당한 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말 그대로 단순화를 위해 경량화, 곧 질량이 없는 글루온에 더해 쿼크 또한 질량이 없다는 가정을 추가한 이론입니다.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양성자의 질량을 계산하자, 실제 양성자보다 겨우 10% 적은 계산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봅시다. 모든 입자가 질량이 없다고 가정한 양자경량색역학으로 양성자 질량의 90%를 설명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놀라운 결론입니다. 곧, 양성자의 질량 중 대부분이 쿼크와 글루온의 상호작용에 의한 에너지에서 나온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존 휠러는 블랙홀을 만들어낼 정도로 에너지를 집중시킬 수 있는 중력파의 중첩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질량이 없는 질량”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는 질량이 극도로 밀도가 높아져야 발생할 수 있는 블랙홀이 질량이 아니라 시공간의 요동 때문에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휠러는 중력 에너지에 의해 극도의 질량인 블랙홀이 만들어지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하지만 휠러의 표현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예에 더 맞는 말로 보입니다. 양자색역학의 발전에 기여한 이 중 한 명인 프랭크 윌첵은 양자경량색역학 계산 결과를 이야기하며 이를 인용했습니다. 만약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 중 대부분이 이 입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의 에너지에 의한 것이라면, 이는 진정 “질량이 없는 질량”일 것이며, 우리는 질량을 어떤 고유의 특성으로 설명하기보다는 현상으로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말 같지 않습니까? 1905년 아인슈타인의 기념비적인 일반상대론 논문에서 그가 유도한 식은 m=E/c^2입니다. 그가 E=mc^2이라 쓰지 않은 것은 놀라운 통찰력의 결과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를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대상의 질량은 그 대상이 가진 에너지의 양이다.” 우리가 본 것처럼 바로 그렇습니다. 윌첵은 자신의 책 “존재의 가벼움(The Lightness of Being)”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그 대상이 양성자와 중성자로 가득 찬 인간이라 하더라도, 이 말은 매우 정확하다. 인간의 질량은, 95%의 정확도로, 에너지에 의한 것이다.”
우라늄 분열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양성자와 중성자가 가진 색력에 의한 것입니다. 양성자-양성자 반응은 네 개의 양성자가 결합하며 두 업 쿼크가 두 다운 쿼크로 바뀌면서 두 개의 중성자를 만들어냅니다. 이 과정에서 색력장에 의해 약간의 에너지가 나오게 됩니다. 핵에너지는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한 종류의 양자장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바뀌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는 25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원자론자들이 생각했던 자연의 본질에 대한 논의에서 참으로 긴 여정을 걸어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물질은 이 우주의 가장 근본적인 구성요소였습니다. 우리는 물질이 에너지를 가진다고 생각해왔습니다. 또한, 물질을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갠다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 요소가 질량을 가진 물질일 것이라 생각해왔습니다.
그러나 현대 물리학은 우리가 가진 그러한 직관에 반하는 결론을 내립니다. 물질을 원자로 나누고, 원자를 소립자로, 소립자를 양자장과 힘으로 나누게 되면 물질은 사라집니다. 물질은 더 이상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질량은 무형의 양자장이 상호작용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파생적인 양에 불과하게 됩니다. 우리가 질량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양자장이 만들어내는 현상일 뿐이며, 대상이 가진 고유의 성질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우리의 세상은 딱딱하고 무거운 대상으로 가득 차 있지만, 실은 이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양자장의 에너지입니다. 질량은 에너지와 동등한 존재가 아니라, 에너지가 물리적으로 드러난 결과일 뿐입니다.
이는 상당히 놀라운 이야기지만, 또한 매우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주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쪼갤 수 없는 원자가 아니라 양자장의 에너지입니다. 이것이 철학자들의 꿈은 아니었겠지만, 나쁘지는 않은 듯합니다.
(노틸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