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러의 시대
2016년 12월 23일  |  By:   |  세계  |  3 Comments

단정한 용모에 검은 정장을 말쑥하게 차려입고 반짝반짝 빛나는 배지까지 찬 남자가 사진전이라는 고상한 행사가 열리는 장소에서 권총을 꺼내 다른 나라의 대사를 쐈습니다. 터키 수도 앙카라에서 주 터키 러시아 대사는 그렇게 피살됐습니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독일 수도 베를린 중심가에 열린 크리스마스 시장에 한 남자가 트럭을 몰고 돌진해 수십 명이 숨지거나 다쳤습니다.

유럽의 심장부와 주변부에서 일어난 두 차례 테러 공격은 중동에서 계속되는 전쟁이 지역을 넘어 유럽과 다른 나라로까지 번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시사합니다. 테러 공격이 늘어나고 평범한 시민들의 일상은 송두리째 뒤바뀌었으며, 곳곳에서 우파와 극우 정치세력이 득세하고 있습니다.

국제 사회는 시리아 내전을 비롯한 중동에서의 전쟁을 종식하거나 최소한 억제하고자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 여파가 고스란히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로 나타난 셈입니다. 이는 2016년의 테러를 관통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

터키는 현대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한 해를 보냈습니다. 실패로 돌아간 쿠데타 시도, 일상이 되어버린 테러 공격에 대한 두려움, 여기에 쿠르드족 분리주의자들과의 갈등이 점점 고조되는 가운데 러시아 대사가 수도 한복판에서 현직 터키 경찰관이 쏜 총에 맞아 숨졌습니다. 방송 카메라가 모여 있던 현장에서 생생하게 담긴 살해 장면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연극처럼 보일 정도로 어떤 의미에서는 비현실적이었습니다. 범인이 미국에 망명해 있는 이슬람학자 페툴라 귈렌의 사주를 받았다는 보도가 나왔지만, 그는 시리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와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혼자서 범행을 저지른 외로운 늑대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프랑스나 벨기에에서 끔찍한 테러 공격이 일어난 뒤 ‘다음번은 독일’이라는 우려 섞인 목소리가 늘 있었습니다. 이번 공격으로 우려가 현실이 됐습니다. 독일은 꾸준히 중동 지역 난민들을 받아들이며 유럽연합 내에서도 난민 포용 정책을 이끌어 왔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독일 국민의 정서가 어떻게 변할지, 독일에서도 다른 나라처럼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득세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합니다.

터키의 유명 언론인 잔 듄다르는 월요일 밤 베를린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자신의 고국과 현재 자신이 사는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난 테러 관련 뉴스를 봤습니다. 듄다르는 터키가 시리아 반군을 지원하는 문제에 관한 칼럼을 실었다가 터키 법원에서 반역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뒤 수감되지 않으려고 독일로 피신했습니다.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어요. (이 문제를 피해 여기까지 왔지만) 여기서도 제가 만나는 사람마다 항상 언젠가 공격이 일어날 거라는 말만 했어요. 베를린은 지금까지 일어난 테러 공격의 목표가 되지 않았지만, 시민들은 항상 불안해하고 있었죠. 하지만 제가 보기에 독일 경찰들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경비 병력은 거의 보이지 않았으니까요. 터키와 독일에서 일어난 두 사건 모두 시리아와 중동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관하다고 보기 어렵겠죠.”

터키에서는 축구장에서 폭탄 테러가 발생하는 등 최근 들어 특히 테러 공격이 잦았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상대적으로 테러 공격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던 나라라 이번 사건은 독일 국민의 여론과 생각에 특히 지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주 터키 EU 대사를 지냈던 프랑스 국적의 마르크 피에리니는 독일에서 일어난 테러를 보고 지난여름 80명 이상 숨진 니스 테러를 떠올렸다고 말했습니다.

“서유럽은 이스라엘과 다릅니다. 이스라엘은 당신이 다니는 모든 곳이 철저히 보호되어 있죠. 하지만 서유럽은 열린 사회에요. 테러리스트가 약점으로 삼고 공략할 만한 곳이 많죠. 유럽인들은 조금씩 테러가 일상화된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마주하고 있어요. 분명 우리에게 익숙지 않은 일이죠.”

난민 처리 문제, 터키에서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세력을 찾아내 축출하는 문제 등에 있어 터키와 독일은 자주 이견을 보이고 갈등과 긴장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가 무난히 보조를 맞춰 온 사안도 있습니다. 지난 수십 년간 독일에 온 파견 노동자 가운데 상당수가 터키인이었고, 최근 들어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한 에르도안 정부의 탄압을 피해 언론인과 학자들이 독일로 잇따라 망명하기도 했습니다.

터키계 독일인 학자 튤린 야지치도 쿠데타 시도 이후 학자들을 표적 수사하는 터키 정부의 압제를 피해 자신이 태어난 프랑크푸르트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이스탄불 사람으로 살았어요. 제 일을 시작한 곳,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 곳,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 곳이 이스탄불이니까요. 하지만 쿠데타 시도 이후 나라는 점점 폭주하기 시작했어요. 하루가 다르게 저를 옥죄어 오는 위협을 느낄 수 있었죠.”

베를린에서 테러가 일어났음에도 야지치는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테러는 전 세계 어디를 가나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되어버린 것 같아요. 유럽 곳곳에서, 그리고 이제는 이곳 베를린에서도 일어났죠. 그렇지만 저는 여기가 (터키보다) 훨씬 더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 베를린에서의 삶, 독일 시민의 일상도 조금 더 터키 시민의 일상과 비슷해질 겁니다. 사람들은 자연히 군중이 모여있는 곳을 피하려 할 것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특히 누군가 짊어지고 있는 물건이 무언지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듄다르는 자신의 아파트 창문 너머로 (테러가 일어난 곳과는 다른) 크리스마스 시장을 바라보며 말했습니다.

“저기 보이는 곳도 크리스마스 시장이거든요. 집 바로 앞에 있죠. 지금 경찰관 단 한 명이 보이네요. 그게 다예요. 어제는 정말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테러가 난 뒤라) 아무도 없네요.”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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