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면?
2016년 12월 15일  |  By:   |  세계, 칼럼  |  No Comment

워싱턴포스트가 먼저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미국 중앙정보부 CIA는 러시아 정부가 고용한 해커들이 지난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사실 지난 몇 달 동안 러시아 해커의 선거 개입에 관한 의혹은 끊임없이 불거졌고 수사에 착수해 사실관계를 밝혀야 한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됐지만, CIA는 중요한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수사는 물론이고 관련 문제에 대한 언급 자체에 소극적이었다.

반면 미국 연방수사국 FBI는 대선을 열흘 앞두고 CIA와 정반대의 행보를 밟았다.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은 선거를 열흘 앞둔 시점에 공개서한을 보내 힐러리 클린턴 후보의 이메일 스캔들에 관한 수사를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마치 결정적인 단서를 찾아 그간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내용이 밝혀질 것처럼 보였다. 언론은 FBI와 이메일 스캔들로 도배됐다. 수사 결과 새로 밝혀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허탈한 사실이 알려진 건 선거가 끝난 뒤였다.

러시아 해커와 FBI가 실제 대선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까? 그렇다고 볼 수밖에 없다. 클린턴 후보는 미시간, 위스콘신, 펜실베니아 3개 주에서 1%도 안 되는 간발의 차로 트럼프에게 패했다. 선거인단이 더 많은 플로리다에서 트럼프에게 뒤진 득표율도 1% 정도다. 근소한 차이로 승부가 갈린 네 개 주 가운데 세 곳에서 클린턴이 이겼다면 당선인은 트럼프가 아닌 클린턴이 되었을 것이다. 푸틴과 코미가 결과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혹은 합리적인 의혹 제기라고 볼 수 있을까?

접전이 펼쳐진 주에서 클린턴이 끝내 이겼더라도 선거인단에서는 클린턴이 근소한 차이로 트럼프를 이겼을 것이다. 하지만 전체 득표에서 클린턴은 트럼프보다 3백만 표 가까운 표를 더 받았다. 2004년 조지 부시 대통령이 존 케리 민주당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했을 때의 압도적인 표 차에 맞먹는 수준으로, 클린턴의 완승으로 끝날 수도 있던 선거였다는 말이다.

결국, 이번 선거는 미국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두 세력의 명백한 개입이 완전히 망쳐놓은 선거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만 놓고 보면, 부정 선거라고 해서 투표함 바꿔치기나 개표를 조작하는 등의 방법은 아니다. 정치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선거 자체를 번복할 만한 사안이 되기도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두 차례 선거 개입으로 인해 대통령 트럼프가 갖는 정당성과 권위는 심하게 훼손됐다. 유권자들과 국민은 트럼프의 승리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것이고, (전체 투표에선 꽤 많은 표 차로 진 후보가) 선거인단 투표에서 앞섰다지만, 그 또한 다른 나라의 선거 개입, 사정 기관의 믿기 힘들 정도로 부적절하고 편파적인 선거 개입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는 기록은 영원히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최근에 밝혀진 이 끔찍한 두 건의 선거 개입 사건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일 것이다.

먼저 우리가 트럼프 당선인에게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 총 득표로만 보면) 과반의 민심을 부디 외면하지 말고 선거인단제도라는 완벽하지 않은 제도 덕분에 당선됐다는 사실도 잊지 않고, 대통령 당선인으로서 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갈등과 반목을 치유하는 데 필요한 통합의 구심점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열심히 전하는 방법이 있다. 물론 선거 전후로 트럼프 당선인은 여전히 투표권도 없는 사람 수백만 명이 표를 행사했다고 말하고, 자신이 압승을 거뒀다고 자랑하고, (러시아 정부의 선거 개입에 대한) 정보 당국의 우려를 일축하고 있다.

아니면 많은 언론 보도처럼 트럼프 정권을 어떻게든 정상적인 정권으로 그려내고 그렇게 인식하도록 노력해보는 방법도 있다. 트럼프가 좀 유별난 인물이긴 해도 결국 다 괜찮을 거라고 믿어보는 것이다. 이는 트럼프 당선인이 취임 후에 책임 있는 자세로 선을 넘지 않으며 차분하고 진중하게 국정을 수행할 경우 나중에 선견지명이었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러 가지 상황에서 드러났듯 트럼프가 그럴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문제다. 트럼프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자신의 사적 이익과 대통령으로 복무해야 하는 공적 이익이 충돌하는 지점이 많은 인물이다. 이 가운데 헌법에 어긋나는 행동으로 보일 소지가 있는 사안도 있다. 트럼프는 대다수 미국인의 이익에 반하는 정책이라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기꺼이 밀어붙일 것이다. 이미 사실상 공언한 대로 전례 없는 친러시아 정책을 펴게 된 건 엄청난 혼란의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이번 대선은 지금까지 벌어지고 있는 양상을 포함해 모두 어느 하나 정상적인 부분을 찾아보기 힘들다. 민주주의 규범이라 할 만한 기준은 끊임없이 부정되고 묵살당했다. 이런 엄중한 현실을 외면하고 대수롭지 않게 치부하려는 모든 이들은 사실상 공화정의 가치와 미국의 국격을 떨어뜨리는 파괴적인 행보에 동참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대통령은 수많은 법적 권위를 부여받는다. 이는 누군가 임의로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존중받을 자격이 알아서 생기거나 밑도 끝도 없는 의혹을 제기한 다음 그로 인해 발생하는 반사이익을 쉽게 누려서는 안 된다.

트럼프 정권은 자신을 향한 비판을 매국으로 몰아세울 것이 자명하다. 과연 트럼프가 애국과 매국을 말할 자격이나 있는 사람인가. 지금까지 드러난 정황으로만 보더라도 트럼프를 ‘시베리아산 미국 대통령’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미국과 분명 여러모로 적대적인 경쟁 관계에 있는 나라의 도움으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트럼프는 벌써 은혜를 갚으려 하고 있다. 그런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더러 애국심이 부족하다거나 매국이라는 말을 하다니 기가 찰 노릇이다.

트럼프가 부정한 방법으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받아들인다면 뭐가 달라질까? 공화당 의원 가운데 몇 명이 이를 인정하고 의식할지 모른다.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은 대통령과 상하 양원을 모두 승리했지만, 상원에서의 의석 차이는 크지 않다. 사안에 따라 공화당 상원의원 세 명만 트럼프 대통령의 정책에 등을 돌리면 잘못된 정책을 강행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선거가 정치의 전부도 아니다. 트럼프 정권이 실정을 거듭하고 도덕적 결함을 드러내 많은 사람이 특히 이 점에 분노하기 시작하면 의회도 유권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 선거 제도에 따라 2년만 지나면 하원의원 전원과 상원의원 1/3, 그리고 여러 주지사와 주 의회 선거를 치른다. 유권자가 목소리를 낼 기회는 머지않아 또 찾아온다.

야권과 민주당의 전략적 초점도 부정선거 규탄에만 맞춰서는 안 된다. 그보다 실제 트럼프의 정책이 트럼프를 손수 뽑은 유권자들의 등에 비수를 꽂으리라는 점을 구체적으로, 적극적으로 부각하며 싸워야 한다. 지금까지 나타난 내용을 보면 트럼프는 자신의 대통령 당선에 가장 큰 공을 세운 백인 저소득층 노동자들에게 최악의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트럼프 정권은 이들을 의료보험 없는 사각지대로 내몰 것이며, 위태롭게 남아있던 이들의 얼마 안 되는 연금마저 없앨지 모른다. 이런 사실을 꾸준히 논쟁거리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균형을 잃지 않고 상황을 살피고 판단해야 한다. 트럼프가 어떻게 당선됐는지, 대통령으로서의 권력을 어떻게 행사할지를 똑똑히 지켜보며 감시하되 감정적인 비난이나 비방으로 일관하지 않도록 자신을 다잡아야 한다. 사실 나 자신부터 지금의 화, 분노를 어떻게 하면 폭발시키지 않으면서 동시에 식지 않게 관리할지 방법을 찾으려 한다. 확실한 건 이번 선거가 정말 끔찍한 결과를 낳았고, 우리 모두 이번 참사에서 얻은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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