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 클로비스, 잔다르크 : 프랑스는 자신에 어울리는 역사를 발명해야 합니다.
빌리에(Phillippe de Villiers, 우파 프랑스를 위한 운동 Mouvement pour France 소속)는 지난 봄,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잔다르크의 반지를 재구매하였고, 피용(François Fillion, 전 총리, 공화당 소속)은 지난 8월, 사블레-쉬르-사르트(Sablé-sur-Sarthe) 담화에서 클로비스(Clovis)의 세례를 언급하며, 이 사건이 1500년의 프랑스 역사의 시작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갈리아인의 500년은 어디로 갔느냐며 사르코지(Nicolas Sarkozy)가 항의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미래를 그리기 위한 아이디어로 우파 지도자들은 과거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우리의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원불변”의 역사
물론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역사인가요? “신-정체성 연합(néo-identitaires, 반이슬람 극우주의 정치세력)”의 이들이 던지지 않는 모든 질문이, 그리고 모든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불변설(fixisme)”이라 부를 수 있을 병에서 비롯된 우파의 드라마입니다.
공화당 예비 후보들은 신성한 영웅들과, 훌륭한 왕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며 정착된 프랑스의 국경과 함께 “영원불변”의 프랑스 역사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오늘날의 가치를 담고 있는 단편적인 역사가 아니라 진정한 역사학 저서들을 읽는다면, 반대로 역사만큼 변동이 심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각각의 시대는 자신의 과거를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를 이해하기 위한 단순한 방법으로 사르코지가 인용했던 구절을 살펴보겠습니다. 프랑스의 조상은 골루아(les Gaulois, 갈리아 골족)입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오래 전부터 그랬을까요? 가령 루이 14세는 과연 자신이 콧수염을 기른 이 야만인들의 후손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절대 아닙니다. 아마도 그는 갈리아인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왕들의 시대에 의미가 있던 유일한 계보는 클로비스에게서 시작된 계보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는 프랑스 왕조를 렝스의 세례와 연결짓고, 그래서 국왕에 부여되던 신성한 권위와 관련된 분명한 정치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혁명은 이 체계를 뒤집어버렸습니다. 그 후로 권력은 더 이상 위에서 내려오지 않으며, 민중으로부터 나오게 되었습니다. 즉 비로소 ‘국가’, ‘민족’을 이야기하게 되었으며, 이들 새로운 주권자들 역시 왕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조상을 원했습니다. 프랑스 국왕들에게는 프랑크족의 왕 클로비스가 있었습니다. 프랑스 민중은 프랑크족이 등장하기 이전부터 이 땅에 살았던 갈리아인들을 찾아내어 조상으로 삼았습니다.
역사를 다시 쓰기
같은 과정을 거쳐 역사학자들이 “국가적 소설”이라 부르는 개념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는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따라 과거를 다시 쓰는 작업이었습니다. 19세기는 민족을 긍정하는 시기였습니다. 프랑스 민족이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벨기에에서 태어난 게르만 전사 클로비스가 프랑스의 왕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에브레강에서 엘베강까지의 광활한 영역을 통치하고, 오늘날의 독일 아헨에서 살았으며, 로마에서 로마인의 황제로 즉위했던 샤를마뉴도 프랑스의 왕이 되었습니다. 또한 봉건 전쟁, 즉 모두 친척지간이던 영주들 사이의 싸움이었던 백년전쟁도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의 민족적 투쟁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화는 제3공화정(1871~1940) 초기에 절정에 이르러, 국민 교육을 통해 교묘하게 확산되어 정권이 안착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역사는 권위가 있었고, 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이 역사를 배우지 않았던 세대까지도 이 내용을 떠올릴 수 있었고, 국가의 결합을 공고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면도 있었습니다. 이는 지방 특수주의의 붕괴 위에서 형성되었으며, 당시의 다양한 선입관이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 예를 들어 여성은, 잔다르크는 예외이지만, 카트린느 드 메디시스(Catherine de Médicis)에서 마담 퐁파두르(la Pompadour)까지, 대부분의 무능력한 괴물들로 묘사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역사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의 기반을 형성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프랑스를 1870년 독일에 대한 패배의 복수를 위한 문명의 유일한 등대가 되도록 하였으며, 식민주의를 정당화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오늘날에도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우파의 역사에 대한 집착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는 중요합니다. 어떤 공동체도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한다면, 또 자신의 역사가 자신을 세계에 대해 위치시키는지 알지 못한다면 미래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왜 하필 이 역사일까요? 우파 일부에서 나왔던 “옛날이 좋았어.”와 같은 입장이 아니라면, 19세기 제3공화정의 이데올로기가 지금 시대를 헤쳐 나가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프랑스 국민은 다양하고, 혼합된 집단으로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세계도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프랑스는 유럽연합의 일원이며, 지난날의 적들과 연합하여 있습니다. 이제는 프랑스에 1914년의 역사를 떠밀어주기보다는 오늘날에 어울리는 역사를 찾아줘야 할 때입니다.
프랑수와 레이네르(François Reynaert) (L’O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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