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구하는 재난 지역의 “위기 지도”
2010년 터프츠 대학의 국제관계학 박사 과정생이었던 패트릭 마이어(Patrick Meier) 씨는 TV에서 흘러나온 CNN 속보에 온몸이 마비되는 듯한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결혼을 약속한 여자친구이자 동료 박사 과정생이었던 크리스틴이 연구차 방문 중인 아이티에서 강진이 발생해 엄청난 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뉴스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즉시 전화, 문자, 이메일, 스카이프, 소셜미디어 등 떠오르는 수단을 총동원해 여자친구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그녀의 생사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그에게 앞으로의 인생을 결정지을 일생일대의 순간이었고, 그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그는 온라인 재난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재난 지역에서 어디가 어떤 피해를 보았고 어디에 어떤 구호가 필요한지를 알 수 있도록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지도였습니다.
1,500마일 떨어진 곳에 지진이 났는데 지도를 만들고 있는 것은 얼핏 한가한 일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오랫동안 이런 지도를 구상해 왔던 마이어 씨에게는 자연스러운 순서였습니다. “지도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을 보호할 수는 없는 법이거든요.” 사업가인 아버지를 따라 케냐와 코트디부아르, 오스트리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마이어는 늘 지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13세 때 이미 “위기 지도”의 원형을 만들었죠. 1991년 걸프 전쟁을 TV로 보면서 중동 지도에 분쟁 지역을 표시해나갔던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아이티 지진을 계기로 마이어 씨는 오랫동안 구상해온 것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우선 친구들과 소셜미디어에서 최대한 정보를 모아 지도에 표시해나갔죠. 의약품을 보유하고 있는 약국의 위치는 어디인지, 길이 봉쇄된 곳은 어디인지, 사람들이 건물 잔해에 깔려있는 곳은 어디인지를 지도에 붉은색 점으로 표시했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지도 업데이트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원봉사자는 40개국 수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아이티 주민들이 현지 상황을 지도 제작자들에게 알릴 수 있는 무료 문자 서비스도 설치했습니다. 아이티 출신의 이민자들을 포함한 마이어 씨의 팀은 24시간 교대로 근무하며 들어오는 정보들을 지도에 업데이트했습니다. 마이어 씨는 몰려드는 정보를 모두 지도에 표시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였다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는 구호 전문가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UN에서 아이티 지진 관련 구호 업무를 담당했던 안드레이 베리티는 이 지도를 이메일로 받아 처음 본 순간, 몇 가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지도에 숨어있는 정보는 금광 수준임을 알아봤다고 말합니다. 마이어 씨는 급박한 상황에 대처하면서 실시간으로 지도를 만들어갔기 때문에 완벽한 지도를 만들 수 없었다고 털어놓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는 미 해병대와 연방 재난관리청의 구조팀이 실제로 활용하게 됩니다. 당시 아이티 구조 활동에 참여했던 한 해병은 후일 마이어 씨에게 “당신의 지도가 매일매일 사람 목숨을 살렸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마이어 씨의 “위기 지도”는 네팔 지진을 비롯한 대형 재난 사태에 계속해서 투입되었습니다. 작년에는 디지털 기술로 인도주의 활동을 개선하는 “디지털 인도주의”에 대한 책을 쓰기도 했죠. 로봇과 드론을 활용한 3D 위기 지도도 개발하는 중입니다. 드론과 로봇을 활용하면 아이티 지진 당시에는 수집할 수 없었던 정보까지 모아 지도에 반영할 수 있으니까요. 네팔 지진 당시에도 구름 낀 날씨 때문에 깨끗한 위성 사진을 얻을 수 없었던 곳에서 드론이 활약한 바 있습니다.
나아가 마이어 씨는 직접 설립한 비영리단체 “위로보틱스(WeRobotics)”를 통해 네팔에서도 지역 사회의 전문가들의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돕고 있습니다. 재난에 일차적으로 대응하고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지역 전문가들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일입니다. 물론 드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나라마다 다른 항공 관련 규제 등은 차차 해결해야 할 걸림돌입니다. 이처럼 재난 상황 대처를 위해 개발한 기술이 농업이나 야생 동식물 보호, 빙하 관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입니다.
이 모든 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마이어 씨는 요즘 집에서도 정신이 없습니다. 당시 아이티 지진에서 살아남은 여자친구와 2013년에 결혼식을 올렸고, 얼마 전에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NP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