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성범죄 혐의를 받았다가 오명을 벗은 사람에게 경찰이 사과해야 할까?
2016년 1월 28일  |  By:   |  세계, 칼럼  |  5 Comments

최근 영국에서는 고위 장교 출신이자 전쟁 영웅인 에드윈 브라말(Edwin Bramall) 경이 아동을 성추행해왔다는 혐의를 받아 대대적인 조사를 받았습니다. 경찰은 그를 아동 성추행범으로 볼만한 증거가 불충분하다고 결론을 내렸죠. 하지만 수사가 종료된 후에도 이번 일을 둘러싼 소란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각계각층에서 경찰이 브라말 경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브라말 경은 이번 일로 큰 고통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고, 그가 불행한 일을 겪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경찰의 수사에 협조하는 것은 모든 시민의 의무입니다. 아무리 모범적인 시민이라도 때로는 자신의 잘잘못 여부와 관계없이 불쾌하고 번거로운 경찰 수사에 휘말릴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나는 경찰이 브라말 경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경찰이 수사에 협조했던 다른 모든 사람과 브라말을 달리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백번 양보해, 수사에 협조해 준 점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면 될 일이죠. 혐의를 받는 사람이 아무리 지위가 높고, 나이가 많고, 사회적으로 칭송을 받는 인사라 할지라도 경찰 수사는 언제나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수사도 사람이 하는 일인 만큼, 때로는 죄 없는 사람이 혐의를 받고 조사를 받게 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최근 들어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높아지면서, 과거에 그냥 묻고 넘어갔던 일들이 뒤늦게 터져 나오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하지만 오래된 사건을 수사하고 범죄 여부를 밝혀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브라말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남성의 경우도, 사건 발생 당시에 신고했더라면 수사가 좀 더 용이했을지 모릅니다. 문제는 성범죄를 신고하는 일이 피해자에게 너무나도 큰 부담이라는 점입니다. 성범죄의 피해자라는 사실 자체도 큰 낙인인 데다, 혹시나 가해자가 무죄 판결을 받으면 엄청난 비난을 받게 되니까요.

성범죄 피해자들이 당당하게 사건을 신고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성범죄에 대한 태도를 바꾸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성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인 마냥 떠들어대는 태도는 성범죄 억제와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런 분위기는 피해자에게 큰 부담을 주고, 결과적으로는 신고를 주저하게 할 뿐입니다.

언론의 보도 행태도 문제입니다. 누명을 썼던 억울한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언론 보도입니다. “혐의가 없음이 밝혀졌다”는 사실을 언론이 집중적으로 보도하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언론은 혐의가 제기되기 무섭게 선정적인 보도에만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왔고, 뒷수습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아이러닉하게도 BBC의 간판 진행자였던 지미 새빌이 상습 성추행범이었던 사실이 알려진 후, BBC가 내부의 성범죄 고발에 더욱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거라는 연구 결과가 있었습니다. 선정적인 보도와 폭발적인 여론이 얼마나 큰 부담인지를 경험했으니 앞으로는 이런 사건을 덮으려 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이런 방향의 변화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성범죄를 신고하는 것, 그리고 성범죄 혐의를 받는 것만으로 엄청난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사회 분위기는 성범죄 예방과 처벌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혐의를 받았지만 성실하게 경찰의 수사를 받고 오명을 벗은 브라말 경은 시민의 의무를 다했다는 점에서 이번 사태의 영웅이지, 사과를 받아야 할 피해자가 아닙니다. (가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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