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은 왜 전부 자신이 “중산층”이라고 생각할까?
대통령 선거가 있는 2016년이 밝기도 전에 미국 정계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중산층을 위한” 경제 정책 아젠다를 홍보하기 위한 순방에 나서자, 공화당은 “중산층 쥐어짜기”라며 공격에 나섰습니다. 이렇게 “중산층”이라는 말은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지만, 이 단어의 뜻을 정확히 아는 이는 없는 듯합니다.
“중산층의 이익에 부합하는”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우리 아이들을 위해”와 비슷한 수준의 정치적 클리셰가 되었습니다. 이상한 점은 소득 기준 중산층에 해당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이 왜 자신을 중산층으로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모든 사람이 “중산층의 국가”를 좋은 것이라 여길까요?
사람들의 무의식적 전제가 경제 이슈를 바라보는 시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기 위해, 나는 “중산층”이라는 단어의 언어학적 역학을 살펴보았습니다. 생활, 미디어, 문학, 학계에서 사용되는 단어 4억5천만 개를 포함하고 있는 데이터베이스 <현대 미국 영어 코퍼스(Corpus of Contemporary American English)>에 따르면, “중산층”과 가장 흔히 함께 오는 단어들은 “부상하는”, “급증하는”, “부담을 떠안은”, “쥐어짜낸” 등이었습니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표현하는 단어이지,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사는지, 돈은 얼마나 버는지를 양적으로 묘사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반대로 “부유층”과 자주 함께 쓰이는 단어에는 “투자자”, “사업가”, “후원자”, “소유주”, “기부자” 등이 있습니다. 이 집단에 속한 사람들이 어디서 얼마나 돈을 버는지 짐작케하는 단어들입니다. 한편 “가난한”이라는 단어는 “남자”, “여자”, “집이 없는”, “몸이 아픈”, “고난”, “궁핍한”, “고생”과 같은 단어와 자주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이 단어들을 통해서는 가난한 사람의 삶이 하루하루 어떤 모습일지를 그려볼 수 있습니다.
함께 쓰이는 단어 분석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한가지 사실은 미국인들이 계급을 논하는 것을 불편해한다는 것입니다. 영국인들은 “상류층”, “하류층”과 같은 단어를 흔히 사용하는 것과 달리, 미국인은 “부유한”, “가난한”이라고 돌려 말하는 것을 선호합니다. 그런데 “중산층”이라는 단어만은 예외입니다. 이는 미국에서 이 단어가 더 이상 두 개의 계급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계급이 아닌,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지과학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을 분류함으로써 세상을 배우고 받아들입니다. “먹는 것/못 먹는 것”처럼 단순한 분류부터 “배우자감/하룻밤 상대”처럼 복잡한 종류까지 다양한 분류법이 존재하죠. 때로는 어떤 것이 가진 성질 대신에 가지지 않은 성질을 분류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또,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카테고리는 시대의 흐름이나 해석에 따라 변화합니다. 예전에는 “성격이 활발한 남자애”였던 것이, 이제는 “주의력 결핍 행동장애 아동”으로 구분되는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지 못한 부나 가난을 제외한 모든 것에 손쉽게 “중산층”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계급을 구분짓는 요소는 “어떤 사람이 벌어들이는 돈”보다 “그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휴대폰, TV와 같이 한때는 사치품이었던 것이 오늘날에는 필수품으로 여겨집니다. 실질 임금이 70년대 수준에 머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은 여성 인력을 활용하고 근무시간을 늘이고 새로운 대출 상품을 활용해 물건을 사들이고 행복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구매력”을 기준으로 삼는 바람에, 우리는 우리의 임금과 기업 복지, 라이프 스타일이 실은 중산층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게 되었습니다.
앞마당에 하얀 나무 울타리를 두른 집은 “중산층”이 의미했던 바를 의미하는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 그림 속에서 주택 담보 대출은 거의 갚은 상태이고, 자동차를 구입하기 위해 받은 대출은 모두 정리된 상태죠. 의료 보험과 연금은 당연한 것이었으며, 국내에서 보내는 휴가와 자녀들의 대학 교육까지 가장 한 사람이 벌어오는 돈으로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중산층”이라는 이름표는 그대로 남아있지만, 그 의미는 아주 흐려졌습니다. 한때 중산층에게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 끝장이라는 공포 없이 살아가는 것이 보장되었습니다. 당적 불문 수많은 정치인이 자신은 중산층의 편임을 내세우지만, 실은 유권자들이 “중산층”이란 실체없는 딱지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라고 있을 겁니다. (아틀란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