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즈] 세월호 1주기, 여전히 고통 받는 희생자 가족과 한국 사회
2015년 4월 17일  |  By:   |  한국  |  1 comment

안산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공부하던 교실은 여전히 텅 비어있습니다. 교실에는 여전히 2014년 4월 급식 메뉴가 붙어있고, 주인을 잃은 책상 위에는 희생자 부모와 친구들이 놓아둔 꽃다발, 학생들이 평소 좋아하던 간식, 손편지들이 수북이 쌓였습니다. “사랑하는 딸에게, 아빠는 영원히 너를 잊을 수가 없구나. 그날 그때 곁에 있어주지 못해서 너무나 미안하다.”

안산(安山)이라는 도시 이름은 평화로운 산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세월호 1주기를 맞은 공업도시 안산에서 안식과 평안은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여전히 시간은 1년 전 그날, 학생 250명과 선생님 11명을 떠나보냈던 날에 멈춰있습니다.

희생자 부모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과 함께 답답함과 분노로 지난 1년을 보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이윤에 눈이 먼 자본의 탐욕과 정부의 느슨한 규제 탓에 벌어졌던 인재라는 사실이 점점 더 명확해졌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의 휴대폰에 찍힌 침몰 직전 동영상을 보면 학생들은 선실에 가만히 있으라는 선장의 지시가 자신들에게 어떤 운명으로 다가올지를 알게 되면서 겁에 질려 있습니다.

사고 이후 한국 사회는 한동안 극도로 안전 사고에 민감해졌습니다. 이웃 학교들은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떠났던 것과 비슷한 수학여행을 잇따라 취소했습니다. 제종길 안산시장은 “아직 (세월호로부터) 현실로 돌아가기엔 갈 길이 멀다”고 말했습니다. 사고로 16살 딸을 잃은 엄지영 씨는 아직도 맨정신으로 밤에 잠을 청하지 못하는 날이 많습니다. 다니던 직장에 1년 휴직계를 내고 사고 진상규명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 엄 씨는 일 때문에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 못했던 것이 두고두고 한이 맺혀 남은 아들과는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11살 난 아들은 여전히 누나를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아빠는 틈만 나면 딸과 친구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 추모 장소를 찾습니다. 거기서 만나게 되는 다른 아빠들과 함께 슬픔을 삭이려고 애를 씁니다.

휴직 기간이 끝나 일터로 돌아간 엄 씨는 출근길에도 딸 생각이 나면 억장이 무너져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한참을 웁니다. 엄 씨는 여전히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에 꾸준히 참석하고 있습니다. 구조 작업에 최선을 다하지 못한 해경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부와 기업의 구조적인 유착 관계를 철저히 조사하고 안전 점검을 게을리하고 안전 수칙을 지키지 못해 사고를 부른 책임이 밝혀지면 마땅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희생자 가족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지켜줘야 할 어른들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씻으려면 이렇게라도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희생자 가족들은 믿고 있습니다. 엄 씨를 비롯한 희생자 가족들은 아직도 이 끔찍한 사고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어떤 학부모들은 밤에 자다가도 악몽을 꾸고 벌떡 일어나 한걸음에 학교까지 달려가요. 우리 딸, 우리 아들 찾아야 한다고 울먹이면서요.”

세월호는 안산시에도 슬픔의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단원고등학교는 조금씩 남은 학생들과 함께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지만, 학교 근처 곳곳에는 세월호와 함께 떠나보낸 아이들을 기리는 글귀를 담은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습니다. 한 현수막에는 이렇게 써 있습니다. “채 피우지 못한 꽃봉오리여, 우리는 영원히 너희를 잊지 않을 거야.” 안산시내 또다른 곳에는 세월호 희생자 학생들을 위한 “아이들의 방”이 마련됐습니다. 이곳에는 주인 잃은 아이들의 침대와 나눠주지 못한 교과서를 담은 사진들이 전시돼 있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김종천 씨는 세월호가 희생자 가족들 뿐 아니라 우리 공동체 모두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를 함께 되돌아보고 같이 치유해나갔으면 하는 마음에서 사진을 모았다고 말했습니다. (New York Tim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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