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1차 세계대전의 유산 (4)
2014년 7월 11일  |  By:   |  세계  |  No Comment

옮긴이: 올해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아직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1차 세계대전의 유산을 꼽아 정리했습니다. 무기나 전쟁사에 관련된 유산뿐 아니라 세계 질서와 경제 동향, 그리고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들로 20세기 세계사를 관통하는 인물, 사건들이 망라돼 있습니다. 원문의 인포그래픽은 월스트리트저널이 매긴 중요한 순서에 따라 정리돼 있습니다. 오늘은 이 가운데 무기와 관련된 유산을 정리해 소개해 드립니다.

* 탱크(Tanks)

오늘날 육군 전력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탱크가 처음 실전에 투입된 건 1916년 9월, 1차대전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터 가운데 하나인 솜(Somme)강 유역의 플레어쿠르슬렛(Flers-Courcelette)에서였습니다. 영국군이 비밀리에 개발한 이 신무기는 마크 1(Mark 1)이라는 이름을 달고 전투에 나섰지만, 첫 전과는 기대만큼 대단하진 않았습니다. 잦은 기계 고장으로 멈춰 서기 일쑤였고, 진창에 빠지면 오도 가도 못하고 무용지물이 되기도 했죠. 하지만 성공적으로 독일군 참호를 뚫고 진영에 도착한 탱크는 말 그대로 압도적인 위력을 발휘하며 독일군을 공포에 몰아넣습니다. 이듬해 봄 프랑스군도 슈나이더 CA(Schneider CA)라는 이름의 탱크를 개발해 실전에 투입했고, 르노(Renault) 사는 이내 훨씬 무게가 가볍고 대량 생산이 쉬운 탱크를 개발해 보급하는 데 성공합니다. 르노 사가 개발한 FT의 포는 360도 회전할 수 있었습니다. 강철로 둘러싼 탱크의 장갑 부분은 초기 모델부터 단단했지만, 운전병과 지휘병이 타고 있는 차량 내부는 지형의 충격으로부터 탑승한 병사들을 보호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내부의 운전병들은 넘어지고 구르기 일쑤였고, 다치지 않도록 얼굴을 보호하는 마스크를 썼습니다. 영국군은 1919년 독일군 진영 후방을 탱크 부대로 급습하는 작전을 계획했지만, 휴전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탱크가 적의 후방을 초토화하고 전세를 유리하게 가져오는 데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건 20년 뒤 2차대전 초기 독일군이 연합군을 상대로 직접 증명했습니다. 탱크라는 이름이 붙은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 처음에 비밀리에 탱크를 제조하던 공장 노동자들이 이를 지칭하는 암호가 탱크였다는 설도 있고, 생긴 외형이 물이나 액체를 보관하고 옮기는 수조 같아서 탱크라고 이름이 붙여졌다는 설도 있습니다.

* 기관총(Machine Guns)

1916년 7월 1일, 솜강 유역의 영국군 참호에서 호루라기가 울립니다. 이 호루라기 소리는 포병대가 독일군 참호에 충분한 포격을 가했으니 독일군이 반격할 여력이 없다는 판단하에 참호 안에 있던 보병들이 위로 올라와 휴식을 취해도 좋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기관총을 장전해놓고 숨죽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영국군을 향한 기관총 사격이 시작됐고, 불과 하루 사이에 영국군 병사 2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날의 전투는 20세기 현대전에서의 전투 양상을 크게 바꿔놓았습니다. 이제껏 어떠한 무기도 많은 수의 상대방 병력을 이렇게 단번에 몰살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죠. 1차대전이 끝나는 시점에 기관총은 개량을 거듭하여, 자동으로 1분에 총알 450 ~ 600발을 쏠 수 있게 됐습니다. 총알이 자동 발사되며, 병사 한 명이 들고 다닐 수 있는 형태의 기관총을 처음 개발한 건 막심(Hiram Maxim)이라는 미국인이었는데, 그는 처음 자신이 개발한 기관총을 영국군에 보급하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기관총의 가능성을 알아본 독일군이 기술을 받아들여 개발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차대전이 발발한 시점에 기관총 수를 비교해보면 독일군이 12,000정이었던 데 반해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합해봐야 수백 정밖에 없었습니다.

* 수류탄(Grenades)

손으로 던질 수 있는 소형 폭탄을 이용한 작전은 중세 이전부터 전투에 종종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참호전으로 대표되는 1차대전에서 적군이 빽빽히 들어차있는 참호 안에 소형 폭탄을 떨어트릴 수만 있다면, 적을 몰살할 수 있었기에 손으로 던질 수 있는 소형 폭탄의 수요는 크게 높아졌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양측 어디도 성능이 입증된 수류탄을 보급하지 못했습니다. 영국군들은 통조림 통에 못이나 쇳조각, 그리고 폭발물을 함께 넣어 만든 일종의 사제 수류탄을 쓰기도 했죠. 1915년 독일군이 먼저 막대기 모양의 수류탄을 대량 생산해 전장에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속칭 “감자 으깨는 기계(potato masher)”로도 불렸던 이 수류탄에 맞서 영국군도 안전핀을 뽑고 던지면 뇌관이 터져 폭발하는 파인애플 모양의 수류탄을 개발해 보급하기 시작했죠. 약 30미터 앞으로 던질 수 있는 소형 폭탄은 이내 전술적으로 꼭 필요한 무기가 되었고, 1917년에는 이미 매주 1백만 개의 수류탄이 생산돼 전장으로 보급됐습니다. 수류탄의 성능과 위력은 전쟁 중에도 빠른 속도로 높아졌고, 폭발하면서 불을 지르거나 독가스를 살포하는 등 기능도 다양해졌습니다. (W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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