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클리퍼스 구단주가 좋아하는 소수민족은 한국계?
LA 클리퍼스의 구단주 도널드 스털링의 아프리카계 비하 발언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졌고, 건물주인 그가 인종에 따라 세입자를 차별해 소송을 당했다는 사실도 더불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고 명백한 종류의 인종주의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세계관의 또 다른 일면을 살펴 보면, 인종주의의 내부적인 모순과 뒤틀림 역시도 잘 드러납니다. 스털링이 세입자로 “근면하고 믿을 수 있는” 한국계를 선호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죠.
스털링은 한국계 선호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건물에 “코리안 월드 타워스(Korean World Towers)”라는 이름을 붙이고 태극기로 건물을 장식하는가 하면, 입주 광고에도 한국계 선호를 당당하게 드러냈죠. 이후 다른 세입자들이 소송을 냈고, 지방법원은 건물 이름과 광고에 “Korean”을 명시하지 말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스털링이 한국인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다른 “비백인” 소수에 비해 똑똑하고 착실하다는 이른바 “타의 모범이 되는 소수(model minority)설”을 아무런 비판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털링은 한국계 세입자들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그들은 내가 어떤 조건을 내걸든 불평 없이 월세를 잘 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죠. 스털링의 한국계 선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003년 기준 스털링의 부동산 업체에는 백인 직원 74명과 아시아계 직원 30명이 있었는데, 라틴계는 4명, 아프리카계는 단 한 명도 없었죠. 아시아계 직원 30명 중 26명이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스털링이 갖고있던 오리엔탈리즘에 기댄 판타지도 잘 드러납니다. 이 회사에서 일했던 한 직원은 “스털링은 내게 젊은 여직원들이 자신을 기쁘게 하는 방법을 잘 안다며, 나에게도 ‘아시아식’을 배우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타고난 기질 때문에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은 근거 없는 가설입니다. 여러 사회학자와 역사학자들이 1960년대의 이민 경향이 동아시아의 전문직 종사자를 선호한 덕분에 이민 올 때부터 이미 높은 교육 수준과 부를 갖춘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많았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죠. 특정 소수민족을 게으르고 멍청한 족속으로 낙인찍는 인종주의적 세계관 속에는 정반대로 뭐든지 잘하는 민족이 존재합니다. 스털링의 인식 속에서는 그가 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불평 없이 잘해내는 한국계가 존재했던 것이죠. 어려움 속에서도 금욕적인 자세로 성공을 일궈내는 아시아계 미국인들! 극적인 스토리로 환영받을지 몰라도, 이런 신화의 궁극적인 수혜자는 다른 소수민족을 공격하는 데 이런 이야기들을 써먹는 사람들입니다. 사실 스털링의 건물에 입주한 세입자들은 결국 모두 똑같이 형편 없는 대우와 모욕을 당한 셈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한국계 미국인들은 이것을 참고 견디려 했다는 것 뿐이죠. 실제로 2003년 소송에 참여한 원고들 가운데 한국계 세입자는 없었습니다. 아시아계 개인이나 단체가 스털링을 상대로 비난 성명을 낸 사례도 드뭅니다. 오히려 스털링이 한 때 “비한국계에 적대적인 한국 태생의 보디가드들”로 경호팀을 꾸렸다는 불편한 이야기가 전해질 뿐이죠.
캘리포니아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수집단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 논란에서도 드러나듯, 미국의 인종주의 담론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은 종종 “중간자” 역할을 합니다. 미국 사회는 “흑인 대 백인”, “백인들이 갖고 있었던 악의적인 편견과 이에 대한 정의로운 비난”이라는 단순하고 명백한 구도의 인종주의 담론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스털링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인종에 대한 애정과 칭송은 비하, 증오와 다를 바 없는 인종차별이고 결국 착취에 활용된다는 점에서 똑같습니다. 모든 사람이 승자 아니면 패자로 나뉘는 스털링의 세계관 속에서 그는 한국계를 한 사람의 개인으로서 존중한 것이 아닙니다. 스털링이 사랑한 한국계는 “게으르고 더러운” 흑인 집단에 대비하기 위해 자신의 선입견으로 만들어낸, 얼굴 없는 집합일 뿐이었죠. 꼭대기에 있는 자들을 칭송하고 아래에 있는 자들을 비하하는 위계 질서는, 그 위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자들로부터 우리의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 우리가 스털링 사태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입니다. (Sl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