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세계 1차대전의 유산 (2)
2014년 7월 4일  |  By:   |  세계  |  1 comment

옮긴이: 올해는 세계 1차대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이 아직 우리의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 세계 1차대전의 유산을 꼽아 정리했습니다. 무기나 전쟁사에 관련된 유산뿐 아니라 세계 질서와 경제 동향, 그리고 우리 삶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들로 20세기 세계사를 관통하는 인물, 사건들이 망라돼 있습니다. 원문의 인포그래픽은 월스트리트저널이 매긴 중요한 순서에 따라 정리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 히틀러(Adolf Hitler)

“1차대전이 히틀러라는 인물을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죠. 전쟁의 경험, 패전의 굴욕, 소련을 비롯해 유럽 전역을 휩쓸었던 (공산주의) 혁명의 소용돌이는 히틀러라는 희대의 선동가를 선전, 선동으로 점철된 당시의 정치에 뛰어들게 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환경을 제공했습니다.”

히틀러 전기를 쓴 이안 커쇼(Ian Kershaw)의 말입니다. 히틀러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해 막대한 배상금의 부담을 안고 고통받게 된 이유를 유대인에게 뒤집어씌우며 극우정당 지도자로 자리를 잡습니다. 하지만 독일 경제가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면, 나치가 독일을 장악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1928년 선거에서 나치의 득표율은 2.6%에 그쳤지만, 이어 발생한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 경제가 파산 상태에 이르자, 국가사회주의자들의 선동은 빠르게 독일 국민들에게 먹혔고,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재앙으로 이어집니다.

* 오스만 제국(Ottoman Empire)

세계 1차대전에서 패전하며 공식적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나라 가운데 가장 큰 건 오스만 제국입니다. 1299년 세워졌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함락시키며 동로마제국을 멸망시켰으며 이후 이슬람의 최전선에서 오랫동안 유럽을 위협했던 오스만 제국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열강의 잇속에 맞춰 분해하는 데는 전쟁이 끝나고도 5년이 걸렸습니다. 1923년 스위스 로잔(Lausanne)에서 체결된 국제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종말을 고하는데, 오늘날의 터키가 가장 주요한 제국의 계승자로 인정을 받았고, 동쪽으로 아르메니아와 그루지야도 독립을 인정받습니다. 하지만 아르메니아인들은 독립에 앞서 1915년 튀르크 족들로부터 1백만 명 가까이 목숨을 잃는 대학살을 당해야 했습니다. 터키는 아직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국의 남쪽에는 레바논과 시리아가 건국됐고, 각각 1943년과 1946년까지 프랑스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 기간에 받은 프랑스로부터의 영향이 아직 남아 있어, 넓은 의미에서 프랑코포니(Francophonie,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프랑스 문화권)에 속하기도 합니다.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붙은 “동방의 파리”라는 별명도 이때 생겨난 겁니다. 키프러스, 이집트, 수단을 아우르는 나머지 넓은 영토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이라크와 팔레스타인도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 튀르크족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인정받는데, 그리스 민족과 튀르크 민족들 가운데 상대방 나라에 살고 있는 이들의 안전이 문제가 됩니다. 두 나라는 사람들이 원하는 곳의 국민이 될 수 있도록 국민을 교환하는 데 합의했는데, 특히 그리스인들은 독립한 나라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많이 희생됐습니다. 터키와 그리스가 오늘날까지도 사이가 안 좋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터키 남부에 많이 살고 있는 쿠르드족 문제도 이때 생겨난 것입니다. 로잔 조약에 앞서 열강들은 세브레(Sèvres) 조약에서는 쿠르드족의 나라 쿠르디스탄 건국을 약속했다가 이를 뒤집었는데, 자치와 독립을 원하는 쿠르드족은 터키와 오랫동안 대치해 왔습니다.

* 중동 분쟁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중동 지역의 분쟁의 씨앗은 1차대전 이후 전후 처리과정에서 열강들이 거짓 약속과 이중 계약, 말바꾸기 등을 통해 뿌려놓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전쟁 중이던 1917년 11월 영국의 발푸어(Arthur Balfour) 외무장관은 영국 유대인 협회 회장인 로스차일드(Walter Rothschild)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 민족의 나라를 세우기에 적합한 땅으로 보고 있으며 이를 위해 협력을 아끼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패전국인 오스만 제국을 독립을 위해 싸운 각 아랍 민족들의 손에 맡기는 대신 영국과 프랑스는 전리품 챙기듯 제국의 영토를 식민지로 만듭니다. 전쟁에 뒤늦게 참전했지만, 연합국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은 이를 탐탁치 않게 여겼지만, 영국은 미국에 있는 유대인들이 미국 정부에 압력을 가해 이를 용인하도록 유도하며 팔레스타인을 장악합니다. 수에즈 운하를 지키는 데 있어 팔레스타인은 전략적으로 꼭 필요한 땅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유대인들은 빠른 속도로 팔레스타인에 정착하기 시작합니다. 평생 모은 돈으로 팔레스타인에 땅을 사모으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의 땅 주인들은 전쟁으로 빚더미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땅을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 집을 마련하고 농사를 짓고 싶었던 유대인들과 그 땅에서 평생 농사를 짓고 살아오다가 하루 아침에 쫓겨날 신세가 된 아랍인들 사이에 충돌이 잦아졌습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충돌에서 그치지 않고 양측은 민병대를 조직해 싸웠습니다. 1930년에 와서야 영국은 발푸어 외무장관의 편지가 “중대 실수”였다는 것을 인정하고, 1935년부터는 유대인들의 팔레스타인 이주를 제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1948년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켜 이스라엘을 건국했고, 그 이후로도 아랍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땅을 되찾기 위해 지금까지 싸우고 있습니다. 중동을 20세기 지구에서 가장 심각한 화약고로 만든 씨앗은 세계 1차대전 당시 뿌려진 셈입니다. (WS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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