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경쟁 금지를 금지”하려는 승부수, 통할까
* 지난해 11월부터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글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1월 26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연방거래위원회(FTC, Federal Trade Commission)는 우리나라의 공정거래위원회에 해당하는 미국 정부의 시장감시 기구입니다. 5명의 위원(commissioner)으로 구성된 위원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이고, 그중 한 명이 위원장(chair)을 맡습니다. 7년 임기의 위원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받아야 하며, 5명 가운데 같은 정당 소속 위원이 3명을 넘을 수 없습니다. 위원회의 정치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마련한 장치입니다.
“아마존 저격수” 칸 위원장의 2023년 출사표
바이든 대통령이 임명한 장관, 기관장 가운데 리나 칸(Lina Khan) 연방거래위원장은 아마도 가장 큰 주목을 받은 인물일 겁니다. 1989년생으로 취임 당시 32세였던 칸 위원장은 컬럼비아대학교 로스쿨 교수로 있었습니다. 시장 권력의 집중과 반독점 분야를 연구해 온 칸 교수는 예일대학교 로스쿨에 다닐 때부터 연방거래위원회, 하원 반독점 소위원회 등 시장경쟁을 관리하는 기관에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습니다.
2017년 로스쿨 3학년 학생 때 쓴 논문 아마존의 반독점 역설(Amazon’s Antitrust Paradox)은 지금의 칸 위원장을 만든 역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논문과 칸 위원장의 연방거래위원회가 플랫폼 경제 시대의 시장을 어떻게 감독하는지에 관해서는 제가 진행하는 팟캐스트 아메리카노에서 집중적으로 다뤘습니다.
그런 칸 위원장의 연방거래위원회가 지난 5일, 새해 초부터 아주 중요한 발표를 하나 했습니다. 경쟁업체 이직 금지, 줄여서 ‘경쟁금지 조항(noncompete clause)’이라 부르는 관행을 금지하겠다고 밝힌 겁니다. 연방거래위원회는 이 조항 때문에 노동자가 불합리하게 피해를 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경쟁을 저해하는 시장의 불공정 관행을 바로잡는 건 연방거래위원회가 의회로부터 부여받은 책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마존의 반독점 역설”은 가격 메커니즘만 봐서는 플랫폼 경제의 거인이자 시장을 지배하는 아마존 같은 빅테크 기업의 독점을 간파할 수 없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잘 풀어낸 글입니다. 칸 위원장의 통찰력도 훌륭하지만, 복잡한 사안을 간명하게 풀어 설명하는 글솜씨도 특히 돋보였는데요, 그런 칸 위원장이 경쟁금지 조항을 왜 금지해야 하는지 직접 뉴욕타임스에 칼럼을 썼습니다. 우선 칼럼을 번역했습니다.
전문번역: 리나 칸 “경쟁업체 이직 금지 조항은 당신의 월급 인상과 혁신을 가로막는 주범입니다.”
초심을 잃은 경쟁금지 조항
이 조항은 처음에는 경쟁 금지가 필요한 직종, 직급에만 적용됐습니다. 기업의 제품 판매를 총괄하거나 특허를 관리하는 일, 핵심 기술을 개발하는 과학자 등 기업에 중요한 자산 가치가 있는 기밀을 다른 회사로 가지고 가면 문제가 될 만한 이들에만 조항이 적용됐던 겁니다. 대표적인 예로 코카콜라 원액의 성분, 재료의 배합비를 들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 임직원 중에도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일 겁니다. 코카콜라는 당연히 이들이 나중에 펩시콜라로 이직하거나 회사를 나가서 스스로 음료 회사를 차리지 못하게 계약서에 명시해둘 테고요. 여기에는 문제를 제기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경쟁금지 조항이 취지에서 벗어나는 사례가 자꾸 생겨납니다.
정말 중요한 영업 기밀을 다루는 노동자뿐 아니라 너무 많은 사람이 이 조항의 적용을 받게 됐습니다. 해고와 이직, 재취업이 상대적으로 쉬운 미국에서는 고용 계약이 자주 일어납니다. 그런데 연방거래위원회가 예로 든 미시간주의 경비업체 직원을 비롯해 바리스타, 미용사, 정원사 등 경쟁금지 조항을 굳이 적용할 필요가 없는 직종에서도 계약서에 이 조항을 넣는 게 어느덧 관행이 돼 버렸습니다.
회사들이 “복붙”해 쓰는 고용 계약서 견본에 경쟁금지 조항이 들어있다 보니 이렇게 됐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계약서를 미리 받아서 꼼꼼히 읽어보고, 세부적인 조항을 두고 협상할 여유와 권한이 있는 노동자가 많지 않기도 합니다. 일을 시작할 때는 계약서에 든 줄도 몰랐던 조항이 회사를 나오거나 이직하려 할 때 갑자기 발목을 잡는 겁니다. 회사들은 이 조항을 들어 노동자의 이직을 막거나 정 이직하고 싶으면 회사에 위약금을 내라고 위협할 수 있습니다. 이를 무릅쓰고 직장을 옮겼던 노동자와 소송을 벌인 사례도 있습니다. 어쨌든 실제로 영업 기밀을 취급한 적도 없는데 이 조항의 적용을 받아 이직이 제한되거나 월급을 덜 받게 되는 노동자가 3천만 명에 이르자, 시장을 감독하는 당국으로서는 이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연방거래위원회는 불필요한 경쟁금지 조항이 남용된 탓에 발생하는 경제적인 피해가 매년 3천억 달러, 367조 원에 이른다고 지적했습니다. 경쟁금지 조항 때문에 노동자가 다른 회사로 옮기기 어렵다는 걸 약점으로 잡고 기업이 올려주지 않은 급여만 더해도 이렇게 액수가 큽니다. 그런데 여기에 노동자들이 다른 일을 하며 기술을 배우고 경력을 쌓아 몸값을 올릴 기회를 얻지 못한 것, 또 경제 전반에 혁신을 위해 필요한 인재의 자유로운 이동이 막힘으로써 발생한 기회비용 등을 더하면 피해 규모는 더 커질 겁니다.
경쟁력 있는 기업은 오히려 좋은 기회
연방거래위원회의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물론 아닙니다. 당장 기업을 대변하는 단체들이 연방거래위원회의 결정을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 상공회의소는 곧바로 성명을 내고, “연방거래위원회의 이번 제안은 명백한 월권이자 위법”이라고 못 박았습니다. 설사 연방거래위원회가 이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해도, 경쟁금지 조항은 오랫동안 큰 문제 없이 유지된 관행으로 오히려 안정적인 기업 경영과 혁신의 주춧돌이 된 규정이라고 밝혔습니다. 심지어 연방거래위원 중에도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크리스틴 윌슨(Christine S. Wilson) 위원은 개인적으로 이번 위원회의 결정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습니다.
연방거래위원회는 입법부가 아니므로, 법을 만드는 궁극적인 권한은 없습니다. 그러나 1914년에 의회가 연방거래위원회법을 제정하고 그에 따라 위원회가 출범한 때부터 시장의 공정한 경쟁을 촉진하고 독점 행위자를 처벌하는 등 위임받은 업무에 관한 법률의 세칙을 개정하거나 제정할 수 있습니다. 위원들이 합의한다고 곧바로 법이 되는 건 아니고, 먼저 위원회 명의로 규정을 제안하고, 시장과 대중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간을 거쳐 최종안을 확정합니다. 경쟁금지 조항의 경우 지난 5일 연방거래위원회가 초안을 제안했고, 지금은 여론을 수렴하는 중입니다.
연방거래위원회가 공표한 대로 경쟁금지 조항이 불법이 된다면, 기업에는 인건비 부담이 늘고 영업 기밀을 지키기 어려워지므로, 악재이기만 할까요? 월스트리트저널 팟캐스트는 다른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즉, 경쟁금지 조항을 이용해 노동자를 적정 가격보다 싼값에 보유할 수 있는 지금 상황은 곧 다른 회사에 있는 우수한 인재를 우리 회사로 데려오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른 기업도 경쟁금지 조항을 악용하고 있을 테니까요. 경쟁금지 조항이 금지돼 노동자들의 이직이 쉬워지고, 경쟁이 치열해지면 경쟁력 있는 회사, 매력적인 일자리로 인재가 모이게 될 겁니다.
월스트리트저널도 캘리포니아주의 사례를 언급합니다. 노동시장에서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에 권력이 비교적 균등하게 배분돼 있으면, 노동자가 협상력을 발휘해 더 나은 처우를 받게 되므로 자연히 우수한 인재가 모이기 마련입니다. 실리콘밸리로 모인 수많은 인재와 그들이 이룩한 혁신이 곧 생생한 증거가 될 텐데, 여기에는 처음부터 경쟁금지 조항을 불법으로 못 박아둔 캘리포니아 시장의 규칙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물론 경쟁금지 조항의 유무가 단 하나의 원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경쟁력 있는 기업이라면 경쟁금지를 금지하려는 연방거래위원회 방침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