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뉴스 채널을 바꾸면 생각이 달라진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의 TV 뉴스는 무척 건조했습니다. 그날 하루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한 사람은 저녁 먹고 나서 TV를 켜보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중파 채널밖에 없던 TV 뉴스의 앵커나 기자가 오늘 일어난 일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사회적으로 논쟁이 펼쳐지는 사안에 관해 어느 편에 공감하는지는 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봐도 아마 알 수 없었을 겁니다. (특히 TV) 뉴스의 목적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라는 명제에 대부분 동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정파적 의견이 궁금한 사람들은 신문이나 잡지를 펼쳐야 했습니다.
공중파에 더해 케이블 채널이 생기고, 뉴스만 다루는 전문 채널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루퍼트 머독이 1990년대 후반에 세운 폭스(Fox) 뉴스는 위의 공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폭스 뉴스는 특히 정치적인 이슈, 정파적인 사안에 관해 명백하게 한쪽 편에 서서 방송을 내보냅니다. TV 뉴스의 성격을 폭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 방송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뉴스라는 타이틀을 버젓이 다는 순간 불편부당한, 사실을 전달할 거라는 시청자의 기대와 가정이 무너집니다. 한국에서도 이명박 정부 때 종편이 출범한 뒤 정파적인 주장이 뉴스 프로그램에서 보도되고 있죠. 지금 종편에서 방영되는 뉴스, 특히 뉴스 비평 프로그램들은 미국 케이블 뉴스 채널의 뉴스와 비슷해 보입니다.
폭스 뉴스의 보도가 전부 다 가짜뉴스는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다른 케이블 뉴스 채널과 비교했을 때 가짜뉴스를 훨씬 못 (혹은 안) 걸러내고 확대, 재생산하는 미디어는 단연 폭스입니다. 그러다 보니 폭스 뉴스와 관련해 많은 연구가 진행됐습니다.
폭스 뉴스가 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유명한 연구가 나온 지도 벌써 15년이 됐습니다. 1996년과 2000년 선거를 분석한 연구를 보면, 폭스 뉴스가 나오는 지역에서 공화당 후보의 득표율이 0.4~0.7%P 더 높게 나옵니다. 큰 차이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지난달 치른 우리 대선처럼 접전이 펼쳐지는 선거에서는 승패를 가를 수 있는 수치입니다.
특정 뉴스를 시청하는 게 유권자들의 표심에 영향을 미친다면, (정파적인) 뉴스가 시청자의 가치관, 세상을 보는 시각에도 영향을 미칠 거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폭스는 매우 보수적인 견해만 선별해 전하는 거대한 반향실이므로 처음부터 보수적인 시청자들만 폭스를 본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종편에서 내세우는 정파적인 주장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만 종편을 본다는 거죠. 저도 2년 전에 아메리카노 2020을 진행할 때 트럼프 지지자들의 논리를 이해하기 위해 폭스의 션 해니티 쇼를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봤는데, 팟캐스트를 끝내고 나서는 좀처럼 보지 않게 됐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거짓말을 아무 검증 없이 내보내거나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는 등 ‘전통적인 관점’에서 뉴스라고 부르기 어려운 수준의 내용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반대로 뉴스가 실제로 사람들의 생각, 시각을 바꿔놓는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UC 버클리의 데이비드 브룩만, 예일대학교의 조슈아 칼라 교수가 이 문제를 들여다봤고, 뉴스 블로그 슬로우 보링(Slow Boring)을 운영하는 언론인 매튜 이글레시아스가 블룸버그 칼럼에서 연구를 소개했습니다.
브룩만과 칼라 교수는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했습니다. 2020년 9월 한 달 동안 폭스 뉴스를 보는 시청자를 모집해 이들에게 돈을 주고 폭스 대신 CNN을 보게 했습니다. 돈만 받고 CNN을 안 볼 수도 있지만, 그러면 CNN에서 다룬 뉴스 내용을 묻는 퀴즈를 풀지 못하게 돼 추가 보상을 받지 못하고 실험에서 제외됩니다. 실험 결과 모두가 그러지는 않았지만,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꾼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CNN 시청자 중에는 롱 코비드(long Covid)로 고생하는 환자가 있다는 사실을 믿는 비율이 폭스 시청자들보다 5%P 높았고, 미국보다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한 나라가 많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도 6%P 더 많았습니다. 우편 투표는 민주당이 기획한 부정 선거의 핵심이라는 폭스 뉴스의 일방적인 주장만 접하다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CNN을 통해 알게 되자, 자연히 우편 투표를 지지하는 비율도 (7%P) 높아졌습니다.
가짜뉴스를 판별하는 능력도 나아졌습니다. 조 바이든 당시 민주당 후보가 경찰이 (시위대가 쏜) 총에 맞았다는 소식을 듣자 기뻐했다는 뉴스를 믿지 않는다고 답한 이들의 비중은 CNN 시청자들 사이에서 10%P 더 낮았으며, 바이든이 당선되면 미국 경찰이 “흑인의 목숨도 중요하다(BLM) 폭력 시위대”의 총격 위협에 노출될 거라는 주장을 일축한 사람의 비율도 13%P 더 높았습니다.
CNN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고 해도 여전히 미국 전체에서 보면 대단히 보수적인 시각을 견지하던 이들입니다. CNN을 한 달 본 뒤에도 참가자의 46%는 바이든 지지자들은 경찰이 총에 맞으면 환호할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고, 우편 투표를 지지한다고 답한 이들은 (7%P 높아진 게) 여전히 24%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트럼프 대통령이 입만 열면 가짜뉴스라고 맹렬히 비난하던 대표적인 매체 CNN을 한 달 동안 봤을 뿐인데 이만큼 생각이 바뀌었다는 건 의미 있는 결과로 보입니다. 특히 폭스 뉴스 시청자들이 대체로 무척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을 비판하는 기사라도 덮어놓고 비난하지 않고 들어본 시청자들이 있고, 이들 중에 생각을 바꾼 이들도 나왔습니다.
실험이 진행된 2020년 9월에 나온 주요 뉴스,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트럼프 대통령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했던 인터뷰 내용을 공개한 것이 있었습니다. 핵심은 코로나19 초기에 특히 “감기나 다름없는, 별거 아닌 바이러스”라고 코로나19를 낮잡아봤던 트럼프가 실은 바이러스의 위험성에 대해 일찌감치 보고를 받았고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트럼프 말만 듣고 사회적 거리두기나 마스크 착용, 나중에는 백신 접종에도 저항하던 미국인의 다수가 폭스뉴스 시청자들입니다. 실험에 참가해 CNN을 보게 된 폭스뉴스 시청자 중 일부는 이 사실을 소화하고 난 뒤 세상을 보는 시각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을 싫어하게 된 건 아니더라도 최소한 폭스는 특히 트럼프의 잘못에 관해서는 (실제로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축소해 보도하거나 아예 보도하지 않을 수도 있는 매체라는 점을 깨달은 겁니다.
정파적인 매체가 사실이 아니라 특정 진영의 유불리를 고려해 뉴스를 선정하고 보도하는 건 민주주의에 중대한 위협입니다. 선거로 뽑힌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에게 책임을 집니다. 정치인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필요하면 비판해 유권자에게 진 책임을 다하게 하려고 민주주의 언론이 있는 거죠.
보수적인 성향으로 치우친 폭스나 한국의 종편만 비판받을 일이 아닙니다. 진영을 불문하고 사실을 왜곡해 보도한다면 이는 언론의 기본을 스스로 저버리는 셈입니다. 폭스와 반대편에 선 주류 매체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임기 내내 매섭게 비판하고 검증했지만, 민주당 대통령이 취임했다고 바이든의 허물이나 실수를 덮어주거나 코로나19 사망자 숫자를 줄이거나 물가가 치솟았다는 기사를 큐시트에서 빼지 않았습니다. (폭스는 그렇게 했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이고, 노골적이었습니다.)
실험 결과는 인상적이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폭스 뉴스 시청자들에게 돈을 쥐여주며 채널을 바꾸라고 권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또 가짜뉴스의 가장 큰 해악은 가짜뉴스를 믿는 사람들의 생각을 좀처럼 바꾸기 어렵다는 데 있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실험 결과 CNN을 한 달간 시청한 사람들 가운데 일부가 생각을 바꿨지만, 여전히 대다수는 폭스 뉴스가 만들어놓은 세상에서 나올 생각이 없어 보였습니다. 결국,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보이네요.
이글레시아스가 내놓은 대안은 시청자의 채널을 바꿀 수 없다면, 폭스 뉴스도 더 균형 잡힌 내용을 전할 수 있도록 진보 진영, 민주당 인사들이 폭스에 더 많이 출연하라는 겁니다. 특히 뉴스가 정견을 전하는 토론회처럼 돼 버린 미국 케이블 채널에선 사안마다 전문가, 기자들이 서너 명씩 나와서 의견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보수 인사들은 트럼프가 가짜뉴스라고 폄하한 주요 매체들에 열심히 출연하는데, 반대로 소위 진보 인사들은 폭스 뉴스에 나가는 걸 대놓고 싫어하고 피한다는 겁니다. “가짜뉴스는 (나랑) 급이 안 맞는다.”라고 생각하는 사이 그 가짜뉴스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퍼져 2016년 트럼프를 당선시키는 데 적잖은 역할을 했습니다.
이글레시아스의 대안에 온전히 동의하기 어렵지만, 그렇다고 제게 더 나은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가짜뉴스가 발을 못 붙이게 하기는 해야 할 텐데, 그렇다고 가짜뉴스를 걸러서 퇴출하자는 주장은 가짜뉴스인지 아닌지를 누가 판별하느냐에 따라 위험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 그런 힘을 주는 건 특히 위험하고, 미국이라면 어차피 수정헌법 1조 때문에 가능하지도 않을 겁니다. 결국, 시청자, 독자, 유권자, 시민이 뉴스 문해력을 높이고 가짜뉴스를 걸러내 폭스 뉴스 같은 미디어는 장사가 안돼서 망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지금 폭스 뉴스의 시청률은 미국 모든 언론을 통틀어 1위입니다. (CNN과 MSNBC의 시청자를 합쳐도 폭스 시청자에 미치지 못합니다.)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 목에 방울 달기처럼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