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글릭의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저: 마이클 셀렌버거)” 비판(2/2)
(피터 글릭, YaleClimateConnections)
근거들을 취사선택하거나 오해, 남용한 고전적인 오류들도 있습니다. 셀렌버거는 자기 자신을 감정적 논증이 난무하는 분야에서 과학과 사실을 전달하는 백기사로 그리고 있습니다. “이 책의 모든 사실, 주장, 논증은 최신 과학 연구 결과에 기반해 있다…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은 이를 무시하는 정치적 우파와 좌파로부터 주류 과학을 보호한다.” 하지만 그의 논증에는 근거의 부적절한 사용과 이제는 유효기간이 지난 연구 결과, 자신에게 유리한 연구 결과만의 선택적 사용, 오해, 명백한 실수 등이 가득합니다.
가장 흔히 나타나는 잘못된 용어 사용의 예 중에는 “할 수 있다(can)”, “할 수 있었다(could)”, “할 것이다(will)”, “하게 될 것이다(will likely)” 등이 있습니다. 그는 이를 통해 고전적인 기술만능주의의 낙관주의를 드러내며 진짜 근거에 의한 주장이 아닌 긍정적으로 윤색된 이야기를 독자에게 전달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아래와 같이 주장합니다.
“식량 생산의 경우, 국제연합식량농업기구(FAO)는 다양한 기후변화 시나리오 하에서도 식량 생산은 현격히 증가할(will)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모든 가능한 기후변화 시나리오 하에서 정말로 식량 생산이 확실히 늘어난다면 이는 참으로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다음의 2018년 FAO의 보고서를 잘못 옮긴 것입니다.
“기후변화는 이미 농축수산물의 생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으며, 그 영향은 저소득 및 중소득 국가에 더 심각하다. 이러한 효과는 21세기 내내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
“기후변화는 특히 지속가능하지 않는 농업 방식에 있어 더 많은 농지와 물을 사용하게 할 것이며, 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특히 불공평하게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는 식량 가용성과 접근성에 모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 책에는 그가 과학적 근거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단순히 “할 것이다(will)”를 이용해 자신의 낙관주의로 대체한 수많은 예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과학자의 말을 잘못 옮긴 예들
셀렌버거가 든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주장의 근거도 잘못 인용한 것입니다. 그는 “맬서스주의자들은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을 뒤섞는 전략을 애용한다”고 말하며,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으로 폴 에를리히와 앤 에를리히, 존 홀드런이 1977년 출판한 “에코사이언스(Ecoscience)”를 이야기합니다. 셀렌버거는 이 책에 서술된 다음과 같은 확실한 사실을 인용합니다. “대형 원자력 발전소의 장수명 방사능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의 1천 배에 달한다.” 하지만 이 문장이 발전소를 폭탄에 비유한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틀린 것입니다. “그 비유는 틀렸다. 발전소는 폭탄처럼 폭발하지 않는다.” 셀렌버거는 이를 통해 “맬서스주의 환경론자”들은 원자력 발전소와 원자폭탄의 차이를 알지 못한다는 허수아비를 세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가 인용한 문장의 바로 앞에는 이런 문장이 있습니다. “경수로나 열중성자로가 원자폭탄처럼 폭발하는 일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는 그가 에를리히와 홀드런의 저작을 오해한 예에 불과합니다. 예를 들어 그는 몇 문단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홀드런과 에를리히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비료 사용 확대와 공업화된 농업에 반대하기 위해, 그리고 기근의 위험을 경고하기 위해 화석 연료가 부족해질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는 이들이 오랫동안 주장해온 내용과 정확히 반대되는 것입니다. 홀드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경주의자들은 에너지가 바닥날 것이라 주장한 것이 아니라 환경이 바닥날 것이라 주장한 것이다. 이는, 사용 가능한 공기, 물, 흙, 그리고 이를 이용하는 생물군이” 화석 연료가 환경, 사회, 건강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바닥나리라는 뜻입니다.
“그린피스가 아니라 탐욕이 고래를 구했다”는 셀렌버거의 주장에도 오류가 있습니다. 그는 펜실베니아에서 발견된 값싼 석유가 고래를 멸종으로부터 구했다고 주장합니다. “드레이크 웰의 석유 발견은 등유 생산으로 이어져… 고래를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 페이지 뒤, 그는 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하지만 고래 사냥은 다시 훨씬 더 큰 규모로 재개되었다. 1904년에서 1978년, 고래잡이들은 100만 마리의 고래를 사냥했고 이는 과거의 세 배에 달하는 수이다.” 그는 값싼 식용유(아이러니하게도 콩고의 삼림을 벌채하고 만들어지는 것도 같은 팜유입니다)가 고래를 구했다고 말하고서는, 이후에도 고래가 더 많이 사냥당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럼 고래사냥이 오늘날 거의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시장의 힘도, 에너지원의 발견도, 그가 주장한 것처럼 “탐욕”이나 경제 성장 때문도 아닙니다. 바로 환경 운동가들과 대중의 운동에 의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특이하게도 그는 마지막 장에서 이를 인정합니다. “더 나은 대안을 선택함으로써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 있어 대중의 태도와 정치적 행동은 의미가 있다.” 이는 정확히 그린피스와 같은 환경 운동 집단이 해온 일입니다.
과학적 불확실성과 “우리는 알지 못한다”는 다르다
셀렌버거는 과학에서 말하는 “불확실성” 개념 또한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 단어를 “우리는 모른다”가 아니라 “다양한 가능성”의 의미에서 사용합니다. 그는 빙상과 삼림의 손실, 아마존의 생물종 멸종, 해류의 변화와 같은 파국적인 재해의 임계값을 두고 이렇게 주장합니다.
“이들 재해가 가진 높은 불확실성과, 이들이 동시에 일어나므로 인해 생기는 복잡성은 이들 시나리오가 말하는 임계값에 대한 논의 자체를 비과학적으로 만든다. … 소행성의 충돌이나 초대형 화산의 폭발, 극도로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의한 팬데믹과 같은 여러 가능한 재해 중 어느 하나가 발생할 가능성이 다른 것보다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는 과학적 근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틀렸을 뿐 아니라 별로 위로도 되지 않는 말입니다. 첫째, 불확실성이 크다는 것은 “비과학적”인 것과 다릅니다. 둘째,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와 다른 이들은 이러한 전지구적 재해의 위험도를 평가하지 않으며, 그렇다고 이를 제외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대응이 너무 늦었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세상을 떠난 기후학자인 스티븐 슈나이더는 다른 기술만능주의자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두꺼운 꼬리”를 가진 확률분포에 존재하는 이런 극단적인 위기가 일어날 확률을 대비하는 일의 중요성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학계가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책을 강력하게 제안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높은 수준의 가능성을 가진 재해를 과학계가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 때문이다.”
즉 과학자들이 기후 위기와 같은 재해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들이 “종말론자”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책임감을 가지고 과학, 경제학, 공공정책, 공공보건의 맥락에서 논의돼야 하는 위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논리 오류 중에는 상대의 논증을 반박하기 위해 상대방 개인이나 그의 동기를 공격하는 인신공격의 오류가 있습니다. 이 책에 수없이 등장하는 인신공격의 오류는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신뢰를 떨어뜨릴 정도입니다. 셀렌버거는 “종말론적 환경주의자”들은 가난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심지어 아예 개의치 않는다”고 말하며 콩고강의 거대한 댐에 반대한다고 공격합니다. 그는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브라우어같은 환경주의 지도자나 주요 환경주의 단체의 재정을 공격하며, 이들이 화석연료 회사로부터 돈을 받아 “원자력 발전소의 폐쇄가 친환경적인 것처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또 자신의 주장에 반하는 주장을 하는 수많은 환경주의자와 지구물리학 과학자들의 동기와 평판을 공격합니다.
정말 언론과 환경 과학자들이 ‘인류애’에 반대할까?
셀렌버거의 언론에 대한 반감은 특별합니다.
“뉴스 미디어, 편집장, 언론인은 자신들의 일상적인 환경 문제에 대한 공포감 조성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자신의 신념과 정의, 진실에 대한 직업적 책임감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환경운동가들이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언론인으로 위장해 이러한 보도 방식을 유지하려 노력하고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한다. 나는 소셜미디어와 같은 전통적 언론의 외부에서 이런 환경 문제를 보도하는 방식에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이들에 대항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인류에 혐오감을 가진 이들이라 공격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에너지 사용량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것과 같은 즉각적이고 급진적인 기후변화 대책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인류의 종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기후변화 활동가, 언론인, IPCC 과학자 등의 주장을 접하면 그들이 진정한 인류애를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되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문명과 인류 그 자체를 위해 맬서스주의자와 종말론적 환경주의자와 싸워야 한다.”
그는 결론에서 환경적 재해를 걱정하는 이들은 “인간의 문명을 싫어하는 이들이 가지는 일종의 잠재의식이 낳은 판타지” 놀이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선호하는 대안에 반대하는 이들 또한 문명의 파괴를 바란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이는 이 분야에서 일하는 이들의 동기를 공격하는 매우 고약한 수법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는 단순한 오류들이 매우 많습니다. 물론 숫자와 인용, 주장이 많은 책은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도를 넘어섭니다. 모든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이 글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일 것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에너지 생산에 필요한 물의 양을 나타낸 숫자가 틀렸습니다. “천연가스는 석탄보다 25~50배 가까이 물을 적게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인용한 문서에 나오듯, 그 숫자는 25~50이 아니라 2보다 좀 작은 값입니다. 게다가 그는 풍력이나 태양광에 모든 화석연료나 원자력보다 물이 덜 든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습니다. 기후변화와 극단적인 기상 사건에 대한 논의에서는 지구의 기온 상승과 강우량 변화가 산불이 나는 기간을 늘리는 데 영향을 미쳤다는 수많은 근거들을 무시합니다. 그는 이어 원자력 발전은 “공해가 전혀 없다(zero pollution)”는 사실도 아니고 필요하지도 않은 과장된 주장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더 나은 미래”라는 공동의 목표
셀렌버거가 더 나은 미래를 목표로 한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이는 환경과학자나 환경주의 운동가뿐 아니라 제대로된 인간이라면 모두 마찬가지일 겁니다. 의견의 차이는 현재 위기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이 세상을 더 나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의 차이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데올로기적 사고, 과학에 대한 오해, 그리고 전문가들을 향한 분노에 찬 인신공격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물론 최선의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지금 이상태로는 지구가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버릴 수 있으며 어쩌면 심각한 환경적, 사회적 붕괴가 올지 모른다는 근거들을 믿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종말론적 미래가 반드시 예정되어 있다는 점을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저 이를 피할 수 있는 행동을 우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는 기술만능주의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또한, 무제한적인 경제 발전과 기술의 혁신이 비극적인 미래를 반드시 피할 수 있게 만들어주리라는 점을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두 관점이 가진 불균형에 문제의 답이 있습니다. 만약 맬서스주의자가 틀렸다 하더라도 이들의 시도는 어쨌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하지만 기술만능주의자가 틀렸다면 미래는 거의 분명하게 종말론적 세상이 될 겁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미래의 환경적, 사회적 재해를 파악하고, 알리고, 이를 피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기후변화, 담수 자원, 환경 분쟁과 같은 과학과 정책이 교차되는 분야에 40년 이상을 종사했고, 여기에 효과적이고 바람직한 해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깨끗한 물과 공중 위생 설비가 없는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를 공급할지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후변화를 늦추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을 낮추는 동시에 기후변화의 영향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도 배를 곯지 않고 모두에게 충분한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어떻게 농업의 효율을 높일 수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어떤 해결책을 우선시할 것인지, 정부와 각종 기구의 실패를 어떻게 고칠 것인지, 정책결정자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그리고 안타깝게도, 더 효과적으로 빠르게 세상을 변화시킬 것인지를 두고 어떻게 서로 이성적으로 대화할 것인지를 위한 적절한 노력입니다. 이 책은 이런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