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버블을 넘어서 (5/7)
폐쇄적인 독점적 인터넷 서비스를 향해 반기를 든 사건이 일어난 것은 2008년의 일이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주커버그가 한창 성장 가도를 탄 페이스북의 전 세계 본사를 막 연 뒤였죠.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이름을 쓰는 베일에 싸인 프로그래머(혹은 프로그래머 집단)가 암호 관련 메일링 리스트에 있는 사람들에게 보고서를 한 편 보냅니다. 글의 제목은 “비트코인: 이용자들끼리 주고받는 전자 화폐 시스템(Bitcoin: A Peer-to-Peer Electronic Cash System)”이었습니다. 나카모토는 보고서에서 신용을 보증하는 중앙기관 없이 거래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디지털 화폐를 운영하는 기발한 시스템의 얼개를 소개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페이스북과 비트코인은 그야말로 지구 반대편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달라 보였습니다. 벤처캐피털의 막대한 투자를 등에 업고 창창한 미래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소셜미디어 스타트업 페이스북에서 당신은 친구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도 남기고 오래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다시 만날 수도 있었습니다. 반면 비트코인은 아직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이 그야말로 극소수의 괴짜 같은 사람들만 받아보는 메일링 명단에 갓 소개된 암호화폐 구상에 불과했습니다. 10년이 지난 지금 나카모토가 첫 보고서에서 운을 뗐던 그 아이디어는 인터넷 2층의 최대 걸작 가운데 하나인 페이스북의 아성에 당당히 도전장을 내밀 만큼 놀라운 성장을 이룩해냈습니다.
비트코인은 분명 그 자체로 혁명적일 만큼 대단한 기술 발전의 산물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화폐로써의 가치만 놓고 본다면 비트코인은 처참히 실패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는 분명 역설입니다. 지난 5년 사이 비트코인 가격은 1,000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초기에 비트코인을 사둔 사람은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됐지만, 가치가 극도로 불안정하기 때문에 결제 수단으로는 전혀 쓸모가 없었습니다. 새로운 비트코인을 만들어내는 채굴 과정에서 에너지가 너무 많이 쓰인다는 점도 심각한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어떤 기술이 선을 보인 시점에서의 쓰임새와 궁극적으로 뿌리를 내린 뒤의 쓰임새가 다른 경우는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비트코인을 결제 수단으로 사용하고 그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곧 의미 없다는 점이 분명해질 겁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사토시 나카모토도 비트코인을 가리켜 “이용자들끼리 주고받는 전자 화폐 시스템”으로 설명하긴 했지만, 그가 혹은 그녀가, 혹은 그들이 내놓은 제안이 정말로 혁신적이었던 이유는 다음 두 가지 특징 때문이었습니다.
먼저 비트코인의 등장으로 이제는 중앙 기관이 개입해 데이터가 사실임을 보증해주지 않아도 블록체인을 이용해 컴퓨터 수십, 수백 대에 거래 사실을 안전한 데이터로 보관하고 필요하면 데이터가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게 됐습니다.
둘째, 나카모토는 이렇게 수많은 컴퓨터에 나누어 저장된 분산원장을 유지하는 작업에도 작지만 보상을 지급하도록 비트코인을 설계했습니다. 갈수록 귀해지는 비트코인은 보상 수단으로도 쓰였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컴퓨터의 처리 용량 가운데 절반을 비트코인 네트워크가 수학 계산을 맞게 하는 데 쓰기로 했다고 가정합시다. 틀린 계산은 거부되고, 정확히 계산한 컴퓨터가 채택돼야 해커나 사기꾼들로부터 네트워크를 안전하게 운영할 수 있습니다. 계산을 지원하는 데 컴퓨터를 사용한 보상으로 당신은 소량의 암호화폐를 받습니다. 나카토모는 시간이 흐를수록 비트코인을 얻기 무척 어려워지도록 시스템을 설계했습니다. 계속해서 시스템 전체에 어느 정도 희귀성을 유지하려 한 겁니다. 비트코인이 유통되던 초반에 당신이 데이터베이스 보안에 이바지했다면 그때 받았을 비트코인은 지금 같은 작업을 하고 받을 수 있는 비트코인보다 훨씬 많았을 겁니다. 이 작업 과정을 “채굴”이라고 부릅니다.
자, 지금부터 폭주하는 비트코인 가격이나 비트코인에 열광하며 빚어진 현상 등은 잠깐 잊어도 좋습니다. 대신 나카모토가 이 세상에 소개한 이 기술의 핵심이 되는 두 가지 원칙, 혹은 철학만 염두에 두고 같이 생각해봅시다. 그 원칙이란 첫째, 모두가 데이터베이스의 기록을 공유하며 필요하면 확인하고 그 기록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주체가 따로 없는 것, 그리고 둘째는 데이터베이스의 가치를 높이는 데 이바지한 사람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지급하되, 전통적인 방식으로 임금을 주거나 회사의 주식을 보유해 그에 대한 보상을 받는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으로 지급할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데이터를 분산해 저장하고 기록하면서 (중앙의 관리자 없이)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는 생태계가 형성됩니다.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막 성공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하던 시점에 개방형 프로토콜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인터넷 세상에도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 겁니다.
비트코인에 영감을 받아 블록체인이 본격적으로 알려졌고, 이후 위의 두 가지 원칙을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시스템이 수십 개 생겨났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더리움입니다. 비탈릭 부테린이 19살 때 백서를 쓴 것으로도 유명한 그 이더리움 말입니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에도 통용되는 자체 암호화폐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전자 결제의 편의나 보안을 개선하는 건 이더리움의 태생적인 목표와 거리가 멉니다. 그보다 이더리움 블록체인 위에 사람들이 뭐든 필요한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 운영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주는 데 본질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현재 개발 중인 이더리움 앱만 해도 더 정확한 예측을 가려내기 위한 집단지성 기반 예측시장부터 블록체인용 페이스북 대체재, 그리고 크라우드펀딩 서비스까지 족히 수백 개는 헤아릴 겁니다. 대부분 서비스는 아직 베타버전까지도 갈 길이 먼, 알파 단계에도 오지 못한 아이디어에서 갓 그 서비스나 제품 원형을 구워낸 정도로 소비자들에게 선보이기에는 아직 부족한 단계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갓 발걸음을 뗀 서비스임에도 이더리움 전용 암호화폐인 이더는 비트코인 거품에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엄청난 가격 폭등을 경험했습니다. 덕분에 부테린은 순식간에 전 세계에서 손꼽는 갑부 반열에 올랐습니다.
이더리움 블록체인에서 통용되는 암호화폐들의 쓰임새는 애플리케이션의 분야만큼 다양합니다. 앞서 예로 든 후안 베넷의 파일 코인 시스템도 이더리움 기술을 바탕으로 만든 서비스입니다. 파일 코인 시스템에서 IPFS 프로토콜을 채택하는 개발자 혹은 공유한 데이터베이스를 보관하는 데 이바지한 이용자는 보상을 받습니다. 프로토콜 랩스는 바로 이 보상 수단으로 쓸 자체 암호화폐 파일코인을 개발하고 있는데, 앞으로 몇 달 안에 시장에서 공개적으로 파일코인 일부를 판매할 계획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여름, 프로토콜 랩스는 몇몇 투자자들만을 대상으로 제한적으로 한 시간 동안만 파일코인을 판매해 1억 3,500만 달러를 모았습니다. 베넷은 이를 ‘한정판 특별 판매’라고 부릅니다. 각 암호화폐가 개인들이 사용할 수 있게 공개되는, 즉 시장에 데뷔하는 일련의 절차를 암호화폐 공개(Initial Coin Offering, ICO)라고 부릅니다.
암호화폐 공개에 ICO라는 이름을 붙인 건 회사의 주식을 처음 상장하는 주식 신규상장(Initial Public Offering, IPO)를 떠올리게 합니다. IPO는 인터넷 버블이 한창이던 1990년대의 상징이기도 했죠. 하지만 ICO와 IPO에는 아주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투기 목적으로 코인을 사들이는 사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사들이는 건 사기업의 일부 혹은 기업의 지적 재산을 소유한다는 지분 증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IPO와 분명히 다릅니다. ICO 때 사들이는 코인은 (파일코인의 경우에서처럼) 파일코인 네트워크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이바지하는 사람들에게 보상으로 지급하는 용도로 계속 생성됩니다. 소프트웨어를 개선하는 개발자들도 대가로 코인을 벌 수 있고, 남는 하드드라이브를 대여해 전체 네트워크의 저장 용량을 늘리는 데 기여해도 코인을 받습니다. 파일코인이 계속 누군가에게 지급된다는 것은 곧 누군가 어딘가에서 파일코인 블록체인 네트워크에 무언가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크리스 딕슨처럼 이더리움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 기술이 현존하는 통화 체계를 무너뜨리거나 갉아먹으려는 의도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보상으로 지급되는 대가를 코인 대신 토큰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토큰에 비유하는 게 정말 마음에 듭니다. 일종의 시장 상품권이나 백화점 상품권을 떠올리시면 이해가 빠를 거예요. 각각 정해진 곳에서는 상품권을 내고 물건이나 서비스를 살 수 있죠. 하지만 상품권이 있다고 기존 통화 체계가 존립을 위협받지는 않잖아요. 블록체인상에서 발행하는 토큰도 마찬가지예요. 실제 법정 화폐로 쓰려고 발행하는 게 아니죠. 대신 블록체인 생태계 안에서만 쓸 수 있는 유사화폐처럼 쓰일 뿐입니다.”
메타마스크의 창업자 댄 핀리도 딕슨과 생각이 같습니다.
“여기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우리가 아예 새로운 가치 체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라고 생각해요. 그 가치 체계가 기존 화폐와 꼭 닮아야 할 이유가 없죠.”
유사화폐든 아니든 ICO가 잇단 성공을 거두자 금방 수상한 점투성인 ICO들이 나타났습니다. DJ 칼리드, 패리스 힐튼, 플로이드 메이웨더 등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유명 연예인들이 갑자기 블록체인 전문가 행세를 하며 바람을 잡고 ICO를 홍보했습니다. 벤처캐피털 회사 유니온스퀘어의 창업자 프레드 윌슨은 2017년 10월 자신의 블로그에 ICO의 무분별한 확산을 거침없이 비판하는 글을 썼습니다.
정말 진절머리가 난다. (ICO는) 사기, 다단계나 다름없다. 지금 자기 소셜미디어 계정으로 ICO 홍보에 여념 없는 수많은 유명인은 ICO를 띄워 자기도 한몫 잡아볼 생각에 설렐지 모르지만, 정말 해선 안 될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증권거래법을 위반했을 소지도 다분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윌슨은 블록체인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까지는 이를 열렬히 지지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미 존재하는 비트코인이나 이더 같은 암호화폐로도 모자라 아직 블록체인이 무언지도 모르는 일반 소비자들이 부지기수인 만큼 제대로 된 관련 제품이나 서비스가 출시되려면 한참 먼 상황에서 ICO에까지 이렇게 엄청난 관심과 돈이 쏠린다는 것은 이미 투기 자본이 블록체인 시장에 상당히 많이 들어왔다는 방증일 겁니다. 인터넷 버블이 한창이던 1990년대 말에는 그래도 사람들이 아마존에서 책을 사고, 인터넷으로 신문이라도 읽는 등 인터넷이 그나마 보통 사람들의 삶 속에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습니다. 또 정확히 어떤 형태일지는 몰라도 인터넷 없이는 못 살 세상이 온다는 전망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지금은 정보가 도는 속도가 워낙 빨라졌고, 암호화폐 마니아가 아니고서는 설명을 들어도 이해가 잘 안 되고, 주변에 그 기술을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힘든 낯선 기술에 이미 수십억 달러를 투자받은 일이 흔하디흔합니다.
(뉴욕타임스, Steven John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