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과잉보호와 완벽주의가 부른 미국 대학생들의 자살 (2/3)
옮긴이: 명문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이미 인생의 목표로 정해진 채 부모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걸어오기만 한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한 뒤 별것 아닌 변화에도 큰 좌절과 시련을 맛봅니다. 부모가 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줬던 아이들에게 홀로서기란 너무나 힘겨운 과제입니다. 늘 완벽하기만을 요구받아온 아이들이 작은 실패에도 크게 낙심해 존재론적 회의마저 느끼며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 그 책임은 학생 자신에게보다도 부모의 과잉보호와 대학 시스템, 끊임없이 완벽하기만을 요구하는 문화에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이 글을 읽는 부모님들은 여러분의 아이가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을 때 주체적인 판단을 내리고 홀로 설 수 있도록, 모든 문제를 나서서 해결해주는 대신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응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글을 읽는 청소년, 청년들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휘둘려 스스로 자존감을 떨어뜨린 채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뉴욕타임스가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도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학생들의 자살 문제를 다루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세 편에 나눠 이 글을 소개합니다.
—–
캘리포니아 산마테오(San Mateo)시에서 토목기사와 유치원 선생님 부모의 맏딸로 태어난 캐서린은 꽤 어린 나이에 자신이 명문 대학에 진학했으면 하는 부모님의 바람을 알아챘다고 말합니다. 캐서린의 말에 따르면 부모님이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이른바 극성인 편은 아니었지만, 어린 캐서린은 부모님이 자기가 무언가를 잘 했을 때 해주는 칭찬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부모님이 저에 대해 좋은 말을 하시는 걸 들을 때, 아니면 다른 부모님이 자기 자식들이 이룬 성과를 기분 좋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세운 것 같아요. 제가 무언가를 잘 해서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그들이 내게 가진 기대치를 충족시킬 때 그때 일종의 뿌듯함을 느낀 거죠.”
펜실베이니아대학에 추가합격 소식을 들은 2013년 6월, 캐서린은 이 엄청난 기회를 절대 헛되이 쓰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합니다. 아직 신입생이 되기도 전 여름, 캐서린은 강의 목록을 살펴보며 미리 자기가 할 수 있는 데까지 공부를 했습니다. 전공을 일찍 선택하면 혹시 모를 시간 낭비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아 수학을 전공해 나중에 선생님이나 교수가 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아주 계획적인 사람이거든요. 앞으로 2년, 3년, 아니 5년 정도 계획은 상당히 촘촘히 짜여 있어요.”
전공이나 직업에 관련된 큰 계획에 맞춰 다른 일도 예정대로 일어나야만 했고, 캐서린은 일이 잘 풀릴 거라고 믿었습니다.
“부모님의 바람에 따라 기독교 신앙을 가진 착실한 남자친구를 만날 거라고 믿었어요. 아니 꼭 그렇게 돼야만 했어요. 그래야만 계획대로, 목표대로 부모님이 사셨던 그런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 테니까요.”
문제는 캐서린 스스로 미처 예견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이미 고등학교 때 여러 차례 남자가 아닌 여자에게 마음이 가는 자신을 발견한 적이 있지만, 캐서린은 자기 삶의 근간인 부모님과 교회가 동성애를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에 그런 감정을 억누르고 애써 외면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펜실베이니아대학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때 캐서린을 앉혀놓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지금껏 부모의 말을 잘 듣고 자라줘서, 부모의 바람대로 잘 커 줘서 고맙다고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딸아, 아빠는 언젠가 있을 너의 결혼식과 너의 남편이 될 사람을 상상하며 기다리는 맛에 산단다. 그게 내 삶의 낙이란다.”
이렇게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하면 동성애라니, 당치도 않은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기숙사에서 알게 된 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온종일 눈앞에 아른거리자, 캐서린은 결국 이는 거스를 수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캐서린은 점점 실의에 빠집니다. 캐서린의 일과를 보면 실의에 빠질 틈도 없어 보이긴 했지만요. 아침 7시 반에 눈 뜨는 순간부터 밤 10시까지 공부, 수업, 숙제, 운동, 클럽 활동이 정말 빼곡히 차 있었습니다. 여기에 근로장학생에 선발돼 일주일에 10시간은 일을 해야 했고, 미적분학처럼 열심히 따라가지 않으면 뒤처지기 쉬운 수업에는 특히 시간을 많이 할애했습니다. 지금 이게 최선인 걸까, 더 열심히 할 여지는 없는 걸까 회의가 가끔 들긴 했지만, 지금까지 열심히 해서 이루지 못한 게 없던 캐서린입니다. 잘 될 거라고 믿고 정진했습니다.
그러다 첫 번째 고비가 찾아옵니다. 미적분학 수업 중간고사에서 60점을 받고 만 겁니다. 성적은 상대 평가로 나오지만, 이런 점수로는 낙제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수학을 전공하겠다는 계획에 근본적인 회의가 들면서,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캐서린을 엄습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분명한 계획이 있었는데, 그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하는 순간 다른 방편을 찾을 엄두가 안 났어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저 위에 있는데, 거기에 한참 못 미치는 데서 허우적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고통과 우울증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 목숨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캐서린은 학생이 자살했을 경우, 부모님이 미리 내주신 등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지 규정을 찾아본 뒤 손목에 칼날을 그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 있는가?’라는 존재론적 물음에 늘 뒤따르는 것이 ‘나는 얼마나 잘 하고 있나?’라는 질문입니다. 1954년 사회심리학자 페스팅거(Leon Festinger)는 우리가 남들과의 비교를 통해 우리의 가치를 가늠한다는 사회비교이론(social comparison theory)을 내놓았습니다.
오늘날 소셜미디어는 이 사회비교이론을 적용할 만한 상황을 말 그대로 극대화시켰습니다. 우선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는 사진, 글들은 일상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가공을 거친 것들입니다. 더 예쁘게, 더 밝게 꾸며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여기에 스마트폰을 비롯해 모바일 기기로 소셜미디어에 늘 접속해 있는 우리는 친구들의 근황을 분 단위, 초 단위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와 비교할 거리가 끝없이 제공되는 셈이죠.
코넬대학에서 학생 상담센터를 운영하는 일스(Gregory T. Eells)는 “다른 친구들은 나처럼 고생하지 않고 힘들지도 않다”는 잘못된 생각을 키우는 데 제일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소셜미디어라고 말합니다. 상담 중에 자기 말고 다른 모든 학우는 행복해 보인다는 말을 하는 학생들에게 일스는 언제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교정을 걸을 때마다 학생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저 친구는 병원에 갔다 오는 길일지 모르고, 저 친구는 식이 장애로 고생했을지 모르고, 또 저 친구는 항우울제 처방을 받고 약을 먹고 있을지 모른다고 말이야. 내 직업이 상담을 해주고 마음을 치료하는 사람이잖니?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한없이 행복하고 성숙하고 심리적으로 단단하지 않아.”
소셜미디어와 실제 마음 상태의 간극은 스스로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던 매디슨 홀러란에게서도 발견됩니다. 그녀의 소셜미디어 계정에는 늘 웃고 있는 사진, 햇살 가득 비추는 곳에서 여유롭게 파티를 즐기는 사진밖에 없었지만, 그녀의 친언니는 매디슨이 항상 고등학교 친구들의 생활을 부러워했다고 말합니다. 그녀가 목숨을 끊기 한 시간 전에 마지막으로 올린 사진도 필라델피아 시내에 있는 리튼하우스 광장(Rittenhouse Square)이 하얀 불빛으로 가득 덮여있는 사진이었습니다. (뉴욕타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