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과잉보호와 완벽주의가 부른 미국 대학생들의 자살 (3/3)
2015년 7월 30일  |  By:   |  세계  |  1 comment

옮긴이: 명문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 이미 인생의 목표로 정해진 채 부모가 정해놓은 길을 따라 걸어오기만 한 아이들은 대학에 입학한 뒤 별것 아닌 변화에도 큰 좌절과 시련을 맛봅니다. 부모가 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줬던 아이들에게 홀로서기란 너무나 힘겨운 과제입니다. 늘 완벽하기만을 요구받아온 아이들이 작은 실패에도 크게 낙심해 존재론적 회의마저 느끼며 목숨을 끊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때, 그 책임은 학생 자신에게보다도 부모의 과잉보호와 대학 시스템, 끊임없이 완벽하기만을 요구하는 문화에 있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이 글을 읽는 부모님들은 여러분의 아이가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할 시기가 왔을 때 주체적인 판단을 내리고 홀로 설 수 있도록, 모든 문제를 나서서 해결해주는 대신 아이들이 스스로 문제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응원하실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글을 읽는 청소년, 청년들은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에 휘둘려 스스로 자존감을 떨어뜨린 채 괴로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뉴욕타임스가 미국 대학 캠퍼스에서도 잇따라 발생하고 있는 학생들의 자살 문제를 다루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뉴스페퍼민트는 세 편에 나눠 이 글을 소개합니다.

2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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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이니아대학에서 학생 정신건강 위원회를 이끌었던 소아정신과 전문의 로스타인(Anthony L. Rostain) 박사는 학생이 이미 수치심을 느끼고 있을 때 섣불리 비교의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가 가장 나쁘다고 말합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리는 격으로 안 그래도 불안한 학생에게는 “너는 그것밖에 안 돼”라는 잔혹한 선고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수치심이란 스스로 큰 결함이 있다고 느끼거나 완벽에는 한참 모자란다고 느끼는 감정을 말합니다. 수치심에 시달리는 학생들은 더 잘 할 수 있는데 아직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대신, 난 원래 실력이 부족해서 해봤자 안 된다고 좌절합니다. 이번 일은 잘 안 풀렸지만, 다음번엔 더 잘 할 수 있다고 자신을 격려하는 대신, 내 인생은 완전히 꼬여버린 실패한 인생이라고 단정해 버립니다.

미국에서 부유한 계층의 지나친 교육열과 성적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그로 인해 나타난 부작용들은 여러 차례 논란이 됐습니다. 하지만 최근 학생들의 잇단 자살은 논쟁에 새로운 불을 지폈습니다. 지난 3월 허핑턴포스트는 머리기사의 제목을 다음과 같이 달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대학이라는 이름 아래 우리 아이들에게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걸까?”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프랭크 브루니(Frank Bruni)는 수년간 도저히 정상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대학과 성적에 목을 매는 학생, 학부모들을 지켜본 뒤 책을 썼습니다. 책 제목은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당신의 인생을 결정하지 않습니다: 대학 입학에 너무나 쉽게 인생의 모든 걸 걸어버리는 당신을 위한 해독제(Where You Go Is Not Who You’ll Be: An Antidote to the College Admissions Mania)>입니다.

미국의 영어 표현 가운데 헬리콥터 부모, 혹은 헬리콥터 양육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극성 부모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마치 헬리콥터처럼 자식 곁을 늘 맴돌며 아이에게 문제가 생길 때마다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주는 부모를 말합니다. 헬리콥터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당연히 자립심이 없고 소위 맷집도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혼자서 낯선 상황에 부딪혀보고 문제를 해결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죠. 이는 아이의 정서 발달에도 상당히 안 좋은 영향을 끼칩니다. 부모가 없으면 영원히 어른이 되지 못하는 겁니다. 완벽주의에 사로잡혀 자식에 대해 갖게 되는 지나친 기대, 그리고 자식이 바라는 것을 일일이 다 해주며 아이가 다 클 때까지 응석받이처럼 키우는 잘못된 양육법은 예전에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청소년 세대를 만들어냈습니다. 성공에 과도로 집착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피할 수 없는 작은 실패를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는 나약한 청소년을 말입니다.

2002년부터 스탠퍼드대학에서 10년 동안 신입생 생활처장을 맡아 온 리스콧하임스(Julie Lythcott-Haims) 교수는 오랫동안 이 새로운 세대의 청년들을 바로 곁에서 관찰해 왔습니다. 아주 간단한 질문에도 답을 찾지 못하면 크게 당황하는 학생, 자기가 정말 무얼 하고 싶은지 모르는 학생들을 수도 없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한참 대화를 나누다가 지금 자기의 모습이 자신이 정말 원하던 것과 너무나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은 학생도 여럿 있었습니다.

“학생들이 자기가 무슨 일을 했다, 어떤 상을 받았다, 공부를 얼마큼 잘했다고는 말 잘 해요. 정말 다들 대단하죠. 그런데 너는 어떤 사람이었냐는 질문에는 잘 대답을 못 해요.”

리스콧하임스 교수를 더욱 놀라게 한 건 학생보다도 학부모였습니다. 자식을 대학교까지 보내놓고도 늘 전화로 일과를 다 들어야만 마음을 놓는 부모들이 갈수록 늘어났고, 아예 전화로는 마음이 안 놓이는지 캠퍼스에 나타나서 수강 신청하는 걸 도와주고 지도교수를 만날 때도 따라다니는 부모들도 더러 봤습니다. 이런 도가 지나친 부모의 간섭을 두고 이제는 헬리콥터 부모 대신 잔디 깎기 부모라는 신조어가 생겨났을 정도입니다. 헬리콥터처럼 자식을 따라다니는 데 그치지 않고, 아예 잡초도 다 뽑아주는 것처럼 자식이 스스로 풀어야 할 문제까지 다 해결해주려는 부모를 일컫는 말입니다. 리스콧하임스 교수는 마지막으로 학생들의 반응에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건 내가 할 일인데 왜 엄마, 아빠가 나서서 해주냐고 당황하면서 그런 도움을 뿌리쳐야 할 것 같은데, 적잖은 학생들이 오히려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부모에게 크게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마다 ‘가장 친한 친구’로 또래 친구, 동기들보다 부모님이라고 답하는 비율이 높아지는 게 괜히 그런 게 아닙니다.

“어린이들은 부모의 사랑으로 튼튼하게 자라나야 합니다. 부모의 사랑에 숨 막힐 듯한 부담을 느껴 오히려 나약해진다면 그건 큰 문제입니다. 우리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자신을 지키지 못할 만큼 나약하다면 이건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할 문제 아닐까요?”

리스콧하임스 교수가 2005년에 쓴 글의 일부입니다. 학생들은 자기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자존감이 낮았으며, 좀처럼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작은 실패와 시련에도 특히나 힘들어했는데,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성적, 성격에 지나치게 집착한 부모의 양육 탓에 스스로 무언가를 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리스콧하임스 교수는 2012년에 책을 냈습니다. 제목은 <우리 아이를 어른으로 길러내기: 과보호의 덫에서 벗어나 아이들의 성공을 준비하는 법(How to Raise an Adult: Break Free of the Overparenting Trap and Prepare Your Kid for Success)>입니다.

1979년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키며 30개 언어로 번역된 심리학자 앨리스 밀러(Alice Miller)의 <천재가 될 수밖에 없었던 아이들의 드라마: 참 자기를 찾아서(The Drama of the Gifted Child: The Search for the True Self)>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정말 뛰어나고 동시에 감성적으로도 민감한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이나 필요를 억제하면서까지 모든 노력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밀러는 아이들의 자기를 지워버린 노력이 결국 우울증이나 공허함, 무기력함, 소외될지 모르는 두려움과 같은 감정을 낳는다고 지적했습니다.

다시 자신 앞에 펼쳐진 난관에 극단적인 방법으로 안녕을 고하려던 캐서린 이야기입니다.

캐서린은 가까운 친구, 가족에게 분홍색 장미로 장식된 편지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써놓고 그 편지 다발을 책상에 차곡차곡 쌓아놓았습니다. 매디슨 홀러란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 캐서린의 룸메이트는 캐서린이 밥도 잘 먹지 않고 내용을 알 수 없는 편지를 자꾸 써놓는 걸 보고 이야기 좀 하자며 캐서린을 앉혔습니다. 캐서린은 자기도 자살을 생각했었다고 담담히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다 훌훌 털어냈다며 룸메이트가 보는 앞에서 써놓은 편지 다발을 휴지통에 버렸습니다. 하지만 룸메이트가 몇 시간 뒤 방에 돌아왔을 때 휴지통에서 편지들만 자취를 감췄습니다. 룸메이트는 이 사실을 기숙사 사감을 비롯한 학교 담당자에게 알렸습니다. 생활처장의 권고로 상담을 받은 캐서린은 즉시 입원 치료를 받게 됐습니다. 수많은 상담과 결석, 청소년 정신 상담을 하는 비영리단체 액티브 마인드(Active Minds)에서의 인턴십 이후에야 캐서린은 복학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들은 대개 휴학 규정이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규정에 나온 사유 외에 휴학을 하면 복학이 거절되는 예도 있어, 학생들이 학교 측에 자세히 사정을 알리려 하지 않을 때도 있을 정도입니다. (예일대학은 한 학생이 자살을 결심하고 써놓은 유서에서 복학이 거절될까 두렵다는 내용이 발견되자 지난 4월 휴학 규정을 완화했습니다) 캐서린의 엄마가 입원한 딸을 처음 보러 와서 꺼내놓은 걱정도 휴학 후에 학교에 돌아가는 데는 지장이 없겠냐는 것이었습니다.

캐서린의 부모는 이 기사의 취재 사실이 모두 맞다고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이 겪어야 했던 아픔과 지금의 캐서린에 대한 생각을 물었을 때 “우리는 캐서린을 정말 사랑하고 언제나 응원한다”는 짧은 답변만 남긴 채 나머지는 캐서린이 스스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캐서린이 다시 찾은 자기 자신과 함께 설계하고 있는 삶은 기존의 모습과는 꽤 많이 달라 보입니다. 훨씬 너그럽고 여유가 있다고 해야 할까요? 부모님의 뜻에 따라 들었던 보수적인 기독교 동아리 대신 캐서린은 훨씬 진보적인 기독교 동아리에 가입했습니다. 자기의 성적 취향을 솔직히 마주하고 나서야 깨닫게 된 레즈비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동성애를 지지하는 기독교 동아리에도 가입했습니다. 펜실베이니아대학 학생들이 정신 건강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편하게 나눌 수 있는 블로그 펜시브(Pennsive)의 발기인으로도 참여했습니다.

펜실베이니아대학도 올가을부터 동료 학생들끼리의 상담 프로그램을 개설하는 등 새로운 정책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 가운데 “못생긴 셀카 올리기 캠페인(ugly selfies)”은 호응이 상당했습니다. 소셜미디어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만 올리는 세태를 풍자해 더 솔직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드러내자는 취지에서 시작된 캠페인입니다. 전국적으로도 10개 대학의 심리학자, 상담사들이 모여 총 90개 학교에 상담 센터 설립을 추진하는 등 학생들의 정신 건강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움직임이 퍼지고 있습니다. 캐서린이 치료를 받은 뒤 인턴으로 일했던 액티브 마인드는 15년 만에 전국 400여 학교에 지부를 둔 조직으로 성장했습니다. 캐서린은 여전히 펜실베이니아대학 지부의 인터넷 사이트 담당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캐서린의 손목에는 아직도 잘못된 결정으로 남은 상처가 있습니다. 캐서린의 손목시계는 그 상처를 가리는 용도이기도 하죠. 하지만 캐서린은 더 이상 진짜 자신의 모습을 숨기려는 노력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고, 부모님도 천천히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꽤 많이 마음의 문을 여셨어요. 아버지는 어머니에 비하면 아직 어려워하시죠.”

중간고사에서 60점을 받아 캐서린을 곤혹스럽게 했던 미적분학 수업에서도 열심히 노력한 끝에 A- 학점을 받았습니다. A-, 예전 같으면 최고가 아니라 속상해하고 끙끙 앓았을지 모를 학점이지만, 이제 캐서린은 다릅니다. 성적과 미래에 대해 한결 여유를 갖게 됐죠. 수학 대신 캐서린은 심리학을 전공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 정해진 게 없는 불확실한 상태를 예전의 캐서린이라면 아마 못 견뎠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캐서린은 훨씬 강해졌습니다.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이리저리 부딪혀봐야죠. 아직 몰라도 되는 게 있고, 부딪혀보며 직접 익혀볼 수 있는 시간과 여유가 주어졌다는 건 감사할 일이에요.”

(뉴욕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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