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생체실험 데이터가 과학적으로 쓸모가 있다면 써도 될까?
세계 2차대전 당시 나치의 의사, 과학자들은 수많은 인간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했습니다. 이런 실험은 모두 조직적인 고문, 대량 학살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무방한, 그래서 도덕적으로는 당연히 비난 받아 마땅한 반인륜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윤리적 난제가 발생합니다. 생체 실험 자체는 물론 끔찍한 범죄였지만, 만에 하나 실험 결과가 달리 얻기 어려운 희귀한 데이터를 제공하거나, 의학 기술 발전에 꼭 필요한 지식을 담고 있다면 어떡해야 할까요? 그 데이터를 써도 될까요?
‘나쁜 짓을 해서, 범죄를 통해 얻은 데이터는 “올바른 과학”이 아니므로 그 데이터도 형편 없는 수준일 거야, 신경쓰지 않아도 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간편하고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시피 과학과 윤리는 반드시 일치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떤 데이터가 조야한 수준이라면 그건 연구 방법이나 분석이 잘못됐기 때문이지 연구 윤리를 지키지 않아서 그렇다거나 그 연구를 진행한 과학자나 연구를 지원한 기관이 악당이라서 그런 건 아닐 테니까요. 사실 나치가 끔찍한 범죄를 통해 얻어낸 데이터들 가운데는 결과만 놓고 보면 참고할 만한 것들이 있습니다.
저체온증(Hypothermia) 실험이 대표적입니다. 나치는 실험 대상이었던 사람들을 얼음물에 담근 뒤 얼마나 시간이 지나면 감각이 사라지거나 혹은 죽는지를 기록했습니다. 이 끔찍한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는 차가운 물 속에서 사람의 몸이 냉각되는 속도를 확인시켜주었고, 어느 시점까지는 몸을 다시 덥히는 게 효과가 있을지 판단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나치의 실험 결과들은 사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과학 논문에 인용되곤 했습니다. 하지만 논문들은 이 희귀한 데이터들이 어디서 났는지 전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 후반, 미국의 과학자 로버트 포조스(Robert Pozos)는 나치의 저체온증 실험 결과가 선박 사고로 차가운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치료하는 데 꼭 필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며, 이 데이터를 공개하고 관련 연구를 장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뉴잉글랜드 의학지(New England Journal of Medicine)는 포조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치가 사용했던 유독가스인 포스겐 가스와 관련된 나치의 생체실험 데이터도 미국 환경보호국(US Environmental Protection Agency)이 앞장서 사용을 금지했습니다.
공리주의적인 관점에 선 사람들은 이미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올 수는 없으니, 해당 데이터가 연구를 진행하는 데 꼭 필요한 것이라면 좋은 목적으로 잘 쓰면 되지 않겠냐고 말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같은 공리주의 관점을 견지하더라도 조금 더 복잡하게 생각한다면 그렇게 쉽게 결론지을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 이내 드러납니다. 생체실험의 희생자들은 죽었지만, 남아있는 그들의 유족들이 어떤 연구가 생체실험 데이터를 바탕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받을 고통은 어떻게 해야 하나요?그들의 고통과 연구의 진전으로 우리가 누릴 혜택 가운데 어떤 게 더 중요하고 큰지를 판단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생체실험 데이터를 활용하는 걸 허락하는 일 자체가 반인륜 범죄에 조금이나마 면죄부를 주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일부 윤리의식이 투철하지 않은 연구진에게는 비윤리적인 연구의 유혹에 더 쉽게 빠지도록 하는 데 일조할지도 모를 일이고요. 데이터 사용을 용인은 하되, 공개적으로 그 데이터가 반인도주의 범죄에 해당하는 생체실험을 통해 얻어낸 데이터라는 사실을 숨기고 연구 내용만 발표하도록 하면 이런 문제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모르지만, 그 또한 거짓말을 부추기는 것이 될 테니, 올바른 연구 윤리에 어긋날 것입니다.
이 문제는 특히 결과에만 집중해서 판단할 사안이 아닙니다. 설사 모든 인류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연구 성과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그 연구가 나치의 생체실험 데이터를 사용했다면 그것 자체가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일일 테니까요. 투명성을 제고하고 윤리적인 기준을 꼼꼼히 세우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한 사회가 (데이터를 추출해낸) 해당 범죄의 피해자들에게 윤리적으로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에 따라 한 가지 기준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회는 피해자가 당한 일이 정말 나쁜 범죄라는 걸 공표하고, 가해자를 반드시 가려내 응분의 대가를 치르도록 하고,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이 받을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필요한 보상을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 모두가 그런 끔찍한 일이 있었다는 걸 잊지 않고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겠죠.
나치 피해자들과 그들을 대하는 사회적인 태도,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판결한대로 온 사회가 나치의 범죄를 엄중히 규탄하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 정당한 처벌을 내렸으며 사회 구성원 모두가 나치의 범죄를 잊지 않고 있다면, 해당 데이터를 사용할 수 있는 기반은 닦인 셈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연구가 허용되더라도 해당 데이터를 얻은 경로를 명확하게 밝히도록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1950~1980년대 이뤄진 연구들이 윤리적으로 잘못된 이유는 바로 출처를 밝히지 않고 범죄를 통해 얻은 데이터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The Convers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