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브룩스 칼럼: 뇌과학을 넘어서
누군가 흥미로운 이론을 제시하고 세상을 부분적으로 설명하는 데 성공했을 때, 사람들이 그 이론으로 나머지 모든 세상을 설명하려 드는 것은 종종 되풀이되는 현상입니다. 오늘날 뇌과학에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 분야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는 중이며, 이때문에 사람들은 뇌과학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을 설명할 게 될 것이라 여기기 쉽습니다. 여기에는 두가지 서로 다른 모습의 주장이 있습니다. 보다 구체적인 접근을 통해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뇌에 대한 자세한 스캔 영상이 사람들의 선택과 생각을 알려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높은 수준의 주장은 사람들로부터 “완고한 유물론자(Nothing buttist)”로 불리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이들은 인간은 곧(Nothing but) 신경들의 집합일 뿐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인간의 행동은 물리법칙에 의해 결정되며, 중독은 뇌질환에 불과하고, 자유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칩니다. 그리고 뇌과학이 인간을 이해하는 심리학과 다른 분야들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생각은 바로 현실에 의해 부정됩니다. 뇌와 마음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뇌 활동 영상을 통해 감정, 반응, 희망, 욕망을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샐리 사텔과 스콧 릴렌필드의 새 책 “브레인워시: 무모한 뇌과학의 유혹(Brainwashed: The Seductive Appeal of Mindless Neuroscience)”은 자기공명영상장치 속에서 관찰되는 편도체 활동의 해석에 있어 어려운 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편도체는 공포, 행복, 신기함, 화, 성적 흥분이 있을 때 활성화 됩니다. 즉 편도체활성화를 발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우리가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문제는 한 가지 활동이 뇌의 매우 많은 영역에 걸쳐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예일대학의 생물물리학자 로버트 슐만이 쓴 “브레인 이미징”에 의하면 “작업 기억(working memory)”에 관여하는 뇌의 부분은 적어도 30군데 이상입니다. 저명한 심리학자 제롬 케이건은 서로 다른 뇌의 상태가 한가지 활동을 유발시킬 수 있으며,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매 번 다른 반응을 보일 수 있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의미’의 문제가 있습니다. 케이건은 보는 사람이 목 마를때와 그렇지 않을 때 한 잔의 물은 다른 의미를 가진다고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주체(agency)의 문제가 있습니다. 하루는 끽연가였던 사람이 다음날 금연을 선언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자신의 뇌의 상태를 예측할 수 없는 형태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사텔과 릴렌펠드는 뇌과학을 통해 불확실한 삶을 보다 측정가능한 과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려는 이같은 노력을 “신경중심주의(neurocentrism)”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다양한 수준의 학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 학문들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에 의한 모호함을 줄이기 위해, 한 가지 원리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에 유물론적 결정론을 적용함으로써 인간이 가진 자유에 의해 발생하는 모호함을 제거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 이상주의는 언제나 어리석은 결과로 끝을 맺었습니다. 오늘날의 놀라운 과학 발전과 축적된 데이터를 향유하기 위해 필요한 일은 이들 과학과 데이터의 한계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제 누군가 당신에게 뇌 스캔 결과를 이야기하려 한다면, 한 번 쯤 그 내용을 의심해보길 바랍니다. 뇌가 곧 마음은 아닙니다.
(NY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