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페@스프] ‘얄팍한 나’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지?
* 지난해 11월부터 뉴스페퍼민트는 SBS의 콘텐츠 플랫폼 스브스프리미엄(스프)에 뉴욕타임스 칼럼을 한 편씩 선정해 번역하고, 그에 관한 해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가 쓴 해설을 스프와 시차를 두고 소개합니다. 스브스프리미엄에서는 뉴스페퍼민트의 해설과 함께 칼럼 번역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 소개하는 글은 3월 9일 스프에 쓴 글입니다.
예술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어렵고 지루해하는 이들은 있을 수 있지요. 그러나 이들에게도 각자 나름대로 감동한 이야기와 음악, 그림은 분명히 있을 겁니다. 이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배우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희망찬 내일을 계획하겠지요.
뉴욕타임스의 데이비드 브룩스는 오늘날 손꼽히는 뛰어난 칼럼니스트 중의 한 명입니다. 그의 저서인 소셜 애니멀, 인간의 품격, 두 번째 산은 모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좋은 평을 받았습니다. 지난 2일, 브룩스는 이 시대에 우리가 왜 예술을 가까이해야 하는지 글을 썼습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한 문장, 한 문장이 가슴에 울려 저는 몇 번이나 그 문장을 노트에 옮겨 적었습니다.
전문 번역: 정치 과잉의 시대, 미술관에 가보면 어떨까요
브룩스는 칼럼의 서두에서 오늘날의 일상을 한 사람을 얄팍하게(shallower) 만들려는 외부의 끊임없는 시도에 대한 투쟁으로 묘사합니다. 정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삶은 외부 자극에 대한 반응의 연속입니다. 그 반응은 그대로 우리의 미래에 영향을 미치지요. 이때 우리는 판단과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좋은 선택 혹은 나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무엇이 좋은 판단인지에 관한 결정은 그 자체로 매우 어려운 문제지만, 대체로 모두가 동의하는 기준은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이 바라는 미래의 모습이나 상황에 가까이 가게 하는 선택이 좋은 선택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외부 자극의 상당수는 우리의 약점을 노리는 자극들이며, 우리는 별로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자극에 반응하고 자극을 따라가다가 우리가 바라는 미래와 멀어지곤 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브룩스가 말하는 ‘얄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브룩스는 그 원인으로 ‘기술‘과 ‘정치화’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기술의 상징인 스마트폰은 시시각각 우리의 관심을 끌기 위해 수많은 불필요한 자극을 만들어냅니다. 정치화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충성하려는, 우리가 가진 가장 강력한 본성을 의미합니다. 인간에겐 세상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를 집단의 문제로 환원시켜 쉽게 판단하려는 나쁜 습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외부의 시도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브룩스는 ‘예술로의 도피‘를 말하고 있습니다.
좋은 예술은 단순화를 거부한다
그러면 어떻게 예술로의 도피가 얄팍한 나를 벗어날 힘을 주는 것일까요? 위에서 본 것처럼 얄팍한 정신이란, 모든 것을 단순화시켜 생각하려는 충동입니다. 기술과 정치화는 우리를 단순하게 만드는 반면, 예술은 정확히 그 반대로 작용합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좋은 예술인가라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좋은 예술을 판단하는 정답이 존재하지는 않지만, 많은 이들이 동의하는 기준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일방적인 해석이 가능한 작품보다는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한 작품이 더 좋다는 겁니다. 즉, 좋은 예술은 세상을 단순하게 해석하려는 시도에 저항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좋은 예술의 또 다른 특징은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특징도 우리에게 세상을 좀 더 겸하게 자세로 대하도록 해줍니다.
이 부분에서 브룩스의 묘사는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곧, 책이나 노래에 빠져 넋을 잃은 경험은 시간과 공간의 존재를 잊게 만든 것이고, 이는 ‘내 안에서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자의식 강한 자아의 입을 닫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겸허함입니다. 놀라운 직관이 아닐 수 없네요. 저 역시 책과 음악에 빠져 넋을 잃은 소중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 경험이 세상이 주는 수많은 좌절과 피로감을 견디게 해주었지요.
일상을 다시 보게 해주는 예술의 힘
아름다움은 자아를 잊게 만들며, 새로운 세상을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를 성장시킵니다. 예술은 바로 그런 아름다움을 일상의 도처에서 발견하게 해줍니다.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 속에 있다는 말(Beauty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의 의미는 바로 그런 것일 겁니다.
브룩스는 에드워드 호퍼를 통해 뉴욕을 골목과 고립된 사람들로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고 말하며 글을 마무리합니다. 아마 이것이 예술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겁니다. 바로 일상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만들며, 매 순간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게 하는 힘 말이지요. 그 순간 다른 모든 것은 무의미해지며, 우리는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어쨌건 내일은 내일의 해가 떠오를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