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리즈 체니의 정치 인생
2022년 10월 28일  |  By:   |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  No Comment

한때 원내 공화당 3인자이자 3선 하원의원이었지만, 지난 대선에서 트럼프가 진 게 맞다며 선거 불복을 내세운 트럼프에 반기를 들다가 당내에서 배척당한 리즈 체니 하원의원이 와이오밍주 공화당 경선에서 패배했습니다. 체니를 누르고 경선에서 승리한 이는 트럼프의 지지를 받은 해리엇 헤이그먼으로, 공화당 지지율이 높은 와이오밍주인 만큼 무난히 하원에 입성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번 중간선거에서 트럼프가 지지 선언을 남발하는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자신의 영향력을 부풀리려는 시도라는 지적도 있지만, 어쨌든 이번 경선 결과는 공화당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건 트럼프 전 대통령임을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리즈 체니는 딕 체니 전 부통령의 딸로 지명도도 높고, 부정 선거를 주장한 트럼프 대통령과 명확히 선을 그으며 공화당 의원으로는 드물게 의회의 1월 6일 의사당 테러 조사위원회에도 참여한 인물입니다. 자연히 체니는 공화당 안에서 반 트럼프 진영의 중추로 여겨졌는데, 그런 체니가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한 인물과의 표결에서 완패한 만큼 공화당 지지자들의 표심은 여전히 트럼프 쪽으로 쏠려있는 듯합니다.

 

리즈 체니는 경선 결과가 나온 직후 패배 수락 연설을 통해, 쉽고 확실한 길이 있었지만 자신은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또 경선은 끝났지만, “진짜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덧붙였습니다. 폴리티코는 존 매케인의 2008년 대선 직후 연설 등 역사에 남은 패배 수락 연설들을 소개하면서, 리즈 체니의 연설 역시 패배를 인정하지 않은 패배 수락 연설이라는 점에서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평가했죠.

체니는 작년 5월 워싱턴포스트에 기고한 칼럼에서 트럼프는 “민주주의를 작동시키는 헌법 구조의 필수적인 요소인 선거 결과에 대한 신뢰와 법치를 망가뜨리려는 인물”이라며, 공화당이 트럼프를 선택할지, 진실과 헌법 수호를 선택할지 갈림길에 서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법치와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정권 교체야말로 보수적인 공화당이 지켜야 할 가치의 핵심이라고 썼습니다. 실제로 그의 경선 패배를 두고 진정성을 증명하고 존엄과 원칙을 지켜냈다는 점에서 승리이며, 미치 매코널 같은 인물과 달리 역사에 기록될 거라는 평가도 나옵니다.

사진=워싱턴포스트 영상 갈무리

체니는 경선이 끝난 뒤에도 지난 대선 이후 고수해온 태도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즉, 트럼프가 다시는 백악관에 (대통령으로) 돌아갈 일이 없도록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겠다고 말한 겁니다. 이를 두고 체니가 2024년 대선 출마를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물론 숫자로 드러나는 체니의 당선 가능성이나, 공화당이 가까운 미래에 반 트럼프 노선으로 갈아탈 가능성은 영에 가깝습니다. 현재 트럼프와, 트럼프 2.0으로 평가받는 론 드산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차기 공화당 대선 후보로 압도적인 지지도를 자랑하고 있고, 체니의 지지율은 한 자릿수를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노련한 정치인인 그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러나 대선 경선은 전국적인 관심 속에서 자신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무대이기도 하고, 오로지 트럼프를 막기 위해서라면 체니의 존재가 게임의 판세를 바꿀 변수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출마가 무의미하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의사당 습격 조사위원으로서 트럼프를 공격할 무기를 누구보다도 많이 가지고 있는 인물이니까요.

공화당 정치인 가운데서는 드물게 강경한 반 트럼프 노선을 걷고 있는 체니는 민주당 지지층으로부터 전례 없는 관심과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체니가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면 공화당의 표를 갈라 먹기보다 오히려 민주당 성향의 유권자들에게 더 어필한다는 여론조사 결과도 있을 정도입니다. 바이든이 재선 도전을 선언해 민주당 경선을 건너뛰고, 더 많은 민주당원이 공화당 대선 경선에서 투표권을 행사해 체니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의견도 있습니다.

사실 체니는 트럼프와 척지기 전까지 공화당 내에서도 보수 성향으로 분류되던 인물이었습니다. 최근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를 뒤집었을 때 박수를 보냈을 만큼 임신중절 합법화에 꿋꿋이 반대해왔고, 작은 정부와 적은 세금의 신봉론자이자 외교 정책에서는 이스라엘 지지에 네오콘으로 분류되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논쟁적인 사안에 대해 의견을 바꾼 이력도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 딕 체니가 일찌감치 레즈비언인 작은 딸 메리 체니의 결혼을 지지하고 나선 것과 달리 여동생과 공개적인 불화를 겪을 만큼 동성결혼 합법화에 오랫동안 강력히 반대해왔지만, 2021년에는 이를 후회한다고 말하고 2022년에는 46명의 다른 공화당 하원의원들과 함께 동성결혼 합법화 법안에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원칙을 지키기 위해 당내 입지를 포기한 정치인에게 미국 유권자들은 어떤 답을 내놓을까요? 앞으로 미국 선거 정국에서 체니가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또 개인적으로는 어떤 변모를 보여줄지 지켜봐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