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진 칼럼] 수정헌법 2조와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의 비뚤어진 원전주의
미국 대법원과 관련 있는 사람들이 절대로 휴가를 쓸 수 없는 달이 있다면 6월입니다. 법으로 정해진 미국 대법원의 한 해는 10월 첫 번째 월요일에 시작해서 이듬해 10월 첫 번째 월요일 전날인 일요일에 끝납니다. 보통 대법관들은 6월 말 또는 7월 초부터 여름휴가 및 휴지기를 갖고, 한 해 동안 고민하고 논의한 사건들에 관해 내린 결정을 휴지기 직전인 6월에 잇달아 발표합니다. 대법관은 물론 대법관의 심복인 로클럭들, 재판에 참여한 변호사, 로펌, 담당 기자들에게도 6월은 가장 바쁜 달입니다.
지난주 임신중절권을 헌법의 권리로 인정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이 반세기 만에 뒤집혔고, 그보다 하루 전에는 한 세기 이상 지속된 총기 규제법이 수정헌법 2조를 어겼다며 위헌 판결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총기 규제법에 대한 판결의 다수의견을 쓴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이 오랫동안 신조로 여겨 온 원전주의(originalism)에 관해 살펴보려 합니다.
먼저 총기 규제 법안의 골자부터 살펴보죠. (국내 언론에도 정리가 잘 돼 있습니다)
뉴욕주를 비롯해 총기 소지 및 사용을 엄격히 규제해 온 주에서는 오래전부터 개인이 집 밖에서 총기를 휴대하려면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이런 법이 있는 주에서는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총기를 휴대(concealed carry)하고 있다가도 정부의 허가가 없는 채였다가 적발되면 처벌받았습니다.
미국에서 총기 사고, 총기 난사 사건은 하도 흔히 일어나서 미국 전역이 총기 문제로 들끓는 것처럼 보이지만, 엄밀히 말하면 그동안 뉴욕주를 비롯한 7개 주와 수도 워싱턴 D.C.에서는 이런 총기 규제법이 있어서 공공장소에서 총기를 소지하기가 무척 까다로웠습니다. 그런데 대법원은 지난주 뉴욕주의 총기 규제법이 수정헌법 2조를 위반했다며 위헌이라고 판결했습니다. 총기 규제법의 보호를 받던 미국인의 숫자는 8,300만 명에서 하루아침에 0이 돼버렸습니다.
토머스 대법관의 극단적인 원전주의를 두고 역사에 대한 몰이해와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례만 극단적으로 취사선택해 왜곡한 비뚤어진 원전주의라는 지적이 잇따라 나오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조슈아 제이츠(Joshua Zeitz)가 폴리티코에 쓴 칼럼은 토머스의 억지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원전주의는 헌법을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취급하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등장한 새로운 기술이나 가치관을 반영해 헌법을 새로 해석하지 않죠. 여기서 비롯되는 문제와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제대로 된 원전주의자가 되려면 역사를 똑바로 이해해야 하는데, 토머스는 그걸 전혀 못 하고 있습니다.
수정헌법 2조 조문을 한 번 살펴보죠.
A well regulated Militia, being necessary to the security of a free State, the right of the people to keep and bear Arms, shall not be infringed.
규율이 잘 서 있는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므로,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수 있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해선 안 된다.
폴리티코 칼럼에서 민병대 부분을 굵은 글씨로 표시해 번역에도 그렇게 했습니다. 저 부분이 토머스 대법관이 법조문을 멋대로 취사선택하며 빠트린 부분입니다.
대개 법이 인정하는 시민의 권리는 그에 관한 의무와 연동돼 있습니다. 총기의 경우 수정헌법 2조는 분명 시민이 총기를 소지할 권한을 인정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규율이 잘 서 있는 민병대에 복무하며 공동체를 안팎의 침입과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의무를 다하는 경우에 한해서입니다.
중앙집권화된 군대 조직이 없던 18세기 말 미국에서 민병대는 공동체와 지역을 지키는 데 필요한 조직이었습니다. 총 없는 군대는 지금처럼 그때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민병대를 위해 시민이 총기를 소지할 권리를 인정했을 뿐 민병대와 아무런 관련 없는 이유로 개인이 총기를 소지할 권리는 오히려 법으로 제약하거나 규제하도록 한 게 수정헌법 2조가 쓰였을 당시의 상식에 부합합니다.
수정헌법 1~10조가 포함된 미국 권리선언(Bill of Rights)을 쓴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버지니아주에서 “군 복무 의무와 관련 없는 이유로 집 밖이나 공공장소에서 총기를 소지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한 주법을 두 차례나 제정했습니다. 수정헌법 2조를 쓴 매디슨이 버지니아에서 만들었던 법은 230년이 지난 오늘날이었다면 보수적인 원전주의자들이 득세한 대법원이 곡해한 수정헌법 2조에 따라 폐기됐을 겁니다.
이번에는 1868년 수정헌법 14조 이야기를 해보죠. 수정헌법 14조는 주 정부가 적법한 절차를 따르지 않고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거나 시민의 기본권을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미국 시민의 기본적인 권리 가운데 총기를 소지할 권리도 포함됩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역사를 똑바로 이해하는 원전주의자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시대적 배경이 있습니다. 바로 1868년이 남북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는 점입니다.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는 북부 주들의 지지를 받던 공화당 의회가 수정헌법 14조를 제정한 이유는 자명했습니다. 남부 주들이 노예였던 흑인들을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노예제를 되살리려고 갖은 수를 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남부 주들이 입안한 이른바 흑인 단속법(Black Codes)은 노예의 자녀들에게 (미국 시민에게는 시킬 수 없던) 노동을 시키거나 흑인들에게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 인정하지 않은 권리가 바로 총기를 소지하거나 민병대를 조직할 권리였습니다. 그러니까 수정헌법 14조의 핵심은 총기 소지권을 인정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총기를 소지할 권리를 포함한 수많은 시민의 권리를 피부색에 따라 달리 인정하지 못하도록 주 정부를 규제했다는 점입니다. 토머스는 여기서도 자기 입맛에 맞는 사실의 파편만 취사선택했습니다.
위의 두 사례만 보더라도 토머스 대법관의 판결문은 본인이 오랫동안 강조한 역사적 맥락을 전혀 읽지 못한 ‘비뚤어진 원전주의’임을 알 수 있습니다. 대법원에 인정된 권한 가운데 하나는 헌법을 비롯한 모든 법을 최종적으로 해석할 권한입니다.
6:3이라는 압도적 우위를 갖게 된 보수 성향 대법원은 이제 본격적으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려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토머스 대법관의 총기 규제에 관한 다수의견처럼 역사를 아전인수하고 멋대로 취사선택해 왜곡한 뒤 주장하는 비뚤어진 원전주의는 대법원을 향한 미국인의 신뢰를 떨어뜨릴 뿐입니다.